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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764 vote 1 2018.04.17 (22:38:50)

 

    나를 이해하라


    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의 근원에 다가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대개 타인을 통해 나를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타인의 그림자이기 십상이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를 떠올려도 좋다. 우리는 어쩌면 타인이라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이다.


    허상을 깨고 진상을 깨달아야 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관성의 법칙이 있다. 작용반작용은 상대성이라면 관성은 절대성이다. 우리는 상대성의 세계, 작용반작용의 세계에 적응해 있다. 절대성의 세계, 관성의 세계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작용이 나라면 반작용은 타자다. 나라는 것은 반작용으로 전해진 타인의 그림자다.


    물렁한 것은 물렁하고 단단한 것은 단단하다. 물렁한 것을 만지면 물렁하게 되고 단단한 것을 만지면 단단하게 된다. 물렁한 사람은 물렁한 동굴에 적응한 사람이고 단단한 사람은 단단한 동굴에 적응한 사람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다. 환경은 타인이니 타인의 지배를 받고 길들어서 타인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타자라는 혹은 환경이라는 동굴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에너지는 밀도차가 있는 접점에서 꺾인다. 나와 타자 사이에 밀도차가 있을 때 작용 반작용의 방향전환이 있다. 밀도차가 없다면 에너지는 직진한다. 반작용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관성이 작용한다. 신과 인간 사이도 그렇다.


    신과 인간 사이에 밀도차가 없어야 한다. 환경과 나 사이는 균일해야 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힘이 꺾이는 관절이 들어서면 안 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환경과 긴밀하게 연결하고 에너지를 직진시켜 환경을 이겨내야 한다. 지면 노예가 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우리가 막연히‘나’로 아는 것은 대개 동물의 생존본능이 만든 허상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한다. 다른 사람은 너다. 너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것을 반대하거나 혹은 추종한다. 의사결정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면에서 일어난다. 거기서 대칭원리가 작동한다. 대칭되면 반작용한다. 반작용하여 반대로 가는게 유리하다.


    에너지를 빼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온다. 외부 에너지를 빼돌릴수록 유리하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다르다. 어른은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다. 부인과 자녀가 에너지를 외부로 빼돌리면 피곤하다. 에너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우리’라는 개념을 제안하게 된다. 우리가족, 우리회사, 우리나라로 장벽을 쌓는다.


    에너지가 빠져나가도 멀리 가지는 못하고 ‘우리’라는 것에 갇혀 있으니 다행이다. 에너지를 회수할 수 있다.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는 논리가 선악과 정의와 윤리와 도덕이다. 그러나 실패한다. 너와 나 사이에 관절이 있다. 작용반작용이 있다. 틈새가 있다. 에너지가 슝슝 빠져나간다. 에너지를 가두는 방법은 진보다.


    말이 달리는 동안 기수는 에너지를 빼돌리지 못한다. 배가 항해하는 동안 선원들은 에너지를 외부로 반출하지 못한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동안 에너지를 팔아먹지 못한다. 기수가 에너지를 빼돌리려다 낙마한다. 해적이 에너지를 약탈하는 수는 있다. 하이재킹도 있지만 대개 실패한다. 오로지 진보로만 에너지를 가둘 수 있다.


    진보할 때, 움직일 때, 달려갈 때, 관성의 법칙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에너지를 가둘 수 있다. 그럴 때 타인은 지옥이 아니고 감옥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나를 제압하고 길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내가 타인을 장악하고 통제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게임이다. 신은 게임을 통해 동적균형을 조직해서 에너지를 가둔다.


    세상은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복제다. 의사결정의 연결이다. 의사결정원리는 게임이다. 게임의 환경은 양자적 환경이다. 대결하여 이기는 쪽이 선택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리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이겨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환경의 제약을 이겨내는 것이 답이다. 극한과 같아 부단히 가까워진다.


    도달하지 못한다. 부단히 이겨낼 뿐이다. 부단히 움직여갈 뿐이다. 부단히 진보할 뿐이다. 우리는 달려가다가 행복이나 성공이나 명성이나 출세나 쾌락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면 멈추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틀렸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그 행렬의 선두다. 그 선두는 고정된 위치가 아니다. 목표에 도달해 멈추는 일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정된 목표에 도달하여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행렬의 선두에 도달하여 거기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관성을 조직하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틀렸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그것은 타인이다. 당하는 수가 있다. 나쁜 사람을 선택하면 해코지를 당하게 된다.


    좋은 사람을 선택하면 제압되어 길들여짐을 당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지 않다. 나쁜 것은 나쁘니까 당연히 좋지 않고 좋은 것은 좋아하다가 말려들게 되니 역시 좋지 않다. 나쁜 것은 나를 해치고 좋은 것은 나를 멈추게 한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은 좋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무조건 움직이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나쁜 것은 고쳐 쓸 수 있고 좋은 것은 더 좋게 다듬을 수 있다. 무조건 에너지가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겨야 한다. 움직이는 사람이 멈춘 사람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멈춘 사람이 움직이는 사람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기는 방법은 에너지의 우위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더 큰 게임판으로 올라서야 한다.


    게임 체인지다. 개인으로 이기지 못하면 가족으로 이기고 가족으로 못 이기면 국가로 이기고 국가로 못 이기면 인류로 이겨야 한다. 인류로도 못 이기면 마지막 신으로 이겨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은 드라마다. 드라마는 과정이며 과정에서 용해된다. 개인의 승부는 가족에서 용해되고 가족의 승부는 국가에서 용해된다.


    국가의 승부는 인류에서 용해되고 인류의 승부는 신에 이르렀을 때 용해된다. 토대의 공유로 게임체인지는 가능하다. 환경은 양자적 환경이다. 바둑을 둔다 치자. 내가 이겼다. 상대가 나의 수법을 배운다. 내가 이길수록 상대방에게 기술이 넘어가니 이길수록 손해다. 고수는 게임 체인지를 쓴다. 같은 방법으로 두 번 두지 않는다.


    첫 게임은 개인의 승부로 이기고 다음 게임은 가족의 승부로 이긴다. 그다음은 국가의 승부로 이기고 그다음은 인류의 승부로 이기고 그다음은 신의 승부로 이긴다. 우리는 피아구분의 세계에 산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너는 오토바이를 탄다. 서로 다른 토대 위에 서 있다. 양자적 환경은 토대를 공유한다.


    이기는게 지는 것이니 구태여 이기려 할 이유가 없다. 홍준표가 작은 것을 이길수록 국민에게 밉보여서 큰 것을 진다. 그러나 승부처에서는 이겨야 한다. 평소에 져주다가 마지막 큰 판을 이기면 된다. 세상이 박근혜 탄핵처럼 드라마틱하게 가는 이유는 토대를 공유하면서 게임 체인지를 하기 때문이다. 역설과 역설의 역설이다.


    반전의 반전이 일어난다. 틀렸다. 에너지로 보면 일방향이다. 토대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보트가 출항할 때는 하나의 노를 좌우 교대로 젓는다. 왼쪽을 저으면 배가 오른쪽으로 돌고 오른쪽을 저으면 배가 왼쪽으로 돈다. 이는 역설의 공간이다. 작용 반작용이다. 초보 뱃사공은 허둥대기 마련이다. 게임 체인지다. 고수라면 다르다.


    배가 탄력을 받으면 사공이 어느 쪽으로 젓든 배는 전진한다. 고수는 관성의 법칙을 쓴다. 베네치아의 곤돌라처럼 비틀비틀 똑바로 간다. 한국식 노는 어느 방향으로 젓든 배가 직진한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 삼각돛을 달고 범선은 앞으로 간다. 토대를 공유할 때 관성의 법칙이 작동하는 완전성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


    작용반작용은 불완전하고 관성의 법칙은 완전하다. 상대성은 불완전하고 절대성은 완전하다. 톱니바퀴처럼 정밀한 기계를 완전한 것으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것은 불완전하다. 두 톱니바퀴 사이에서 에너지 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완전성은 공간의 구분에 있지 않고 시간의 연결에 있다. 공간이면 구분되고 시간이면 연결된다.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 부자와 빈자는 공간에서 구분된다. 시간에서는 연결된다. 약자가 강자 되고 패자가 승자 되고 빈자가 부자 된다. 거기에 드라마가 있고 사건이 있다. 완전성은 보석의 단단함에 있지 않고 사건의 부드러운 호흡에 있다. 완전한 것은 롤렉스 시계의 견고함이 아니라 베토벤 음악의 부드러운 호흡에 있다.


    우리는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다는 목표를 세운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어도 완전하지 않다. 그 과정에 누구를 패배시키게 된다. 그만큼 다친다. 곧 토대를 빼앗기게 된다. 내가 돈을 벌면 돈이 다치고 내가 명성을 벌면 명성이 다친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다친다. 국가 시스템을 다치고 마는 것이다.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야 한다. 그것이 드라마다. 돈과 명성은 갈아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개인의 사랑도 행복도 쾌락도 집단의 자유도 정의도 윤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게임에 임하여 자원을 수집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얻었든지 전투를 앞두고 무기를 획득한 것뿐이다.


    진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당신이 돈을 얻으면 토대가 되는 시장이 돌아와 당신을 친다. 당신이 명성을 얻으면 토대가 되는 광장이 돌아와 당신을 친다. 박근혜가 당선을 얻으면 토대가 되는 대통령 제도가 박근혜를 친다. 유시민이 명성을 얻을수록 국민은 정의당을 친다. 게임을 갈아타지 않고 어물대면 당하는 거다.


    게임 체인지를 하려면 방향성을 알아야 한다. 생태계는 진화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진화한 것이 아니고 원래 전략이 있다. 처음부터 방향을 읽고 간다.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관성의 법칙에서 에너지의 효율을 얻어 환경과의 대결에서 부단히 이겨온 기록이다. 공유하는 토대를 장악하고 넓혀온 역사다.


    자연에서 생물의 진화든 사회에서 역사의 진보든 이긴다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 긴 목과 짧은 목의 기린이 있었는데 자연선택의 결과로 목이 긴 개체가 살아남은게 아니다. 이기는 목이 있는 거다. 기린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환경을 이겨야 했다. 게임에서 이긴다는 쪽으로 방향이 좁히면 유전자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애초에 기린 목의 종류는 많을 수 없다. 코끼리는 코로 수풀을 이긴다. 이긴다는 목표가 정해졌으므로 코가 길어질 수 있을 뿐이다. 코가 짧아지지는 않는다. 코는 계속 길어졌다. 코끼리의 목표는 빠르게 자라서 생태계를 단조롭게 만드는 수풀을 이기는 것이며 수풀을 짓밟아 이기려면 덩치를 키우고 코와 상아를 활용해야 한다.


    신의 의미는 역시 환경을 이기는데 있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작용반작용은 원래 안 쳐주는 것이다. 상대성은 안 쳐주는 것이다. 공유하는 토대를 장악하여 에너지를 연결시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다. 사람을 이기려 하는 자는 반드시 치일 것이며 돈이든 명성이든 목적을 정한 사람은 역시 치일 것이다.


    토대를 이기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이길 것이니 사공은 배를 이기고 폭풍을 이기고 마침내 바다를 이겨서 더 큰 바다로 나아간다. 개인의 행복이라든가 평화라든가 쾌락이라든가 혹은 사회의 정의라든가 윤리라든가 도덕이라든가 인간이 선택한 어떤 목적 때문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신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과 신을 딱 잘라서 경계를 나눌 수 없을 뿐이다.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건으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건 속의 존재이고 게임 속의 존재이며 거기서 탈출하지 못한다. 생물은 생태계를 탈출하지 못한다. 인간은 신을 탈출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신을 이겨버리면 신은 게임 체인지를 시도한다.


    신은 반칙을 저질러서라도 판을 엎어버린다. 결국 인간이 진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인간이 신을 만나는 때다. 거룩한 패배로 하여 신의 마지막 수단을 끌어낼 때 그곳에 전율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패배이지만 기쁘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만남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토대의 확인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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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김미욱

2018.04.18 (01:14:00)

신은 인간이 신에게 패배할 때마다 신의 살점을 선물로 떼어 준다. 오늘도 신은 말한다. 여기 와서 내 살점을 베어 먹어라. 인간은 맛있게 그 살을 베어 먹고 힘을 내어 다시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세상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이야말로 신에게 다가서는 지름길이며 신에 대항하는 인간의 무기다. 신은 방어만 하는데도 인간은 늘 나가 떨어진다. 다시 살점을 먹는다. 인간의 방식이다. 신의 사랑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수원나그네

2018.04.18 (03:06:37)

" 다만 인간과 신을 딱 잘라서 경계를 나눌 수 없을 뿐이다.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건으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건 속의 존재이고 게임 속의 존재이며 거기서 탈출하지 못한다."


동렬님의 이 문맥으로 보면 님의 댓글과 본질이 다른 것 같군요.

김미욱님은 양자를 별개의 존재이자 대립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레벨:5]김미욱

2018.04.18 (07:22:26)

신이나 세상과의 타자성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문학적 비유로 표현한 것으로 신은 인간에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자리를 양보하진 않지만 자신의살점을 베어주는 자기 희생를 통해 인간의 도전을 격려하기도 한다는... 신의 전능함 속에 감춰진 인간미를 살점으로... 매번 신을 찾지만 매번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빗대보았습니다. 동적 균형의 범위 내에서 에너지는 자주 그 모습을 바꾸는지라... 매일 기도하고 매순간 체크해야 신을 놓치지 않겠죠. 오해없으시길~ ^^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수원나그네

2018.04.18 (07:39:02)

제가 보기에는 김미욱님의 신은 구조론에서 논하는 신과 개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신앙심'의 관점에서 말하시는 듯~


[레벨:5]김미욱

2018.04.18 (08:26:00)

댓글이 있어서 삭제가 안 되네요. 수원나그네님께 반박을 하려면 꽤 긴 글을 써야하는데 . 사이트 운영자님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삭제해도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8.04.18 (09:45:39)

김미욱님 의견이 잘못된건 아니고 

이런건 원래 아는 사람끼리 해야할 심오한 이야기인데


제 글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무리수라도 진도를 나가보는 것입니다.


신이든 무엇이든 타자냐 아니냐는 상대적입니다. 

공을 못 차는 사람은 공이 타자이고 메시에게는 수족입니다.


신발을 처음 신으면 발이 아프지만 나중에는 신체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공이 지금 내 앞에 있구나 하면 안 되고 축구 안에 공이 있는 것입니다. 


사건 전체 안에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공을 이길 수 있는 거지요.

지금 내가 공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진행과정 안에서 이겨가는 겁니다.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지만 사건 안에서 신을 이기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져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신을 만나는 지점입니다.


박항서가 저 잘나서 베트남을 주물렀다고 믿는다면 착각입니다.

타이밍이 있는 것이며 운때가 있는 것이며 그 운을 소비한 것입니다.


김미욱님은 이러한 내막을 말씀하시려고 한 것이겠지만

신과 나 사이에 토대로 공유되는 사건을 이해했는지가 중요한 것이며 


그것은 축구선수가 공을 다루듯이 익혀나가는 것입니다.

공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월드컵과 지금 이 시합과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사건을 깨달을 때 나와 타자의 경계는 이미 지워져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건을 깨닫지 못할 때 인간은 타인이라는 지옥에 갇히게 됩니다. 

[레벨:5]김미욱

2018.04.18 (11:02:03)

신이란 단어를 철학적 과학적 개념들로 풀어헤친 구조론을 정립하신데다 이런 멋진 글을 연일 쏟아내시는 동렬님을 신이라는 질의 위치에 살짝 배치하고 본인은 부득이 입자의 위치에 서 봤습니다.

수원나그네님의 지적을 접하고 보니 저의 문학적 성향을 이 사이트에선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분 댓글 감사합니다.
[레벨:2]호흡

2018.04.18 (16:42:26)

수원나그네님은 지적다운 지적을 하는게 아니라 그냥 남에게 빈정거리면서 제가 신앙심이란 단어를 사용했던걸로 저격질을 하고 싶은겁니다.취지가 불순하니 신경쓰지 않으시면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8.04.19 (21:3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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