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화성의 모래알 숫자를 낱낱이 세어놓고 있는 신이다. 부질없는 짓이다. 신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신은 완벽하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면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적절히 대응한다. 모래알 숫자를 세어놓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말단직원이다. 상급자가 갑자기 질문을 던지면 머뭇거리지 말고 대답해야 하니까. 신은 그런 곤란한 질문을 받을 일이 없다. 모래알 숫자를 세는 뻘짓을 할 이유가 없다. 상황을 통제하려면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래알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대로 줄어들면 줄어드는 대로 변화에 대응할 뿐이다. 신은 대칭의 방법을 쓴다. 50대 50으로 대칭시켜 교착상태로 유도한 다음 계에 에너지를 투입하여 51 대 49의 우위를 달성한다. 그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통제되면 된 것이다. 촌놈이 도시를 방문하면 감탄한다. 도시의 정교한 도로망이나 거대한 건물이나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장치 따위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반면 모짜르트의 음악이나 고흐의 그림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신은 촌놈이 감탄하는 그런 수단을 쓰는 걸까? 천만에. 그것은 인간의 삽질에 불과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세로쓰기로 흘러내리는 괴상한 일본어 글자를 떠올릴 수 있다. 신은 그런 끔찍한 수단들을 운영하고 있을까? 어리석다. 별 볼 일 없는 인간 수준을 들키는 거다. 멍청한건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신은 꽤 똑똑하다. 복잡한 수식보다는 모짜르트의 음악이나 고흐의 그림에 감탄해야 고수다. 우리는 신을 오해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도는 먹히지 않는다. 신은 인간보다 똑똑하다. 인간의 방법을 쓸 만큼 신은 멍청하지 않다. 인간이 감탄하는 물건은 사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구조는 엮임이다. 우주는 두루 엮여서 통짜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엮여있다는 것은 현재상태의 변경에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의미다. 우리가 신을 말할 때는 전지전능이라는 표현을 쓰기 좋아하지만, 우리가 아는 전지전능은 고비용 구조다. 신은 저비용으로 해결한다. 시계태엽이 풀리듯이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은 미련한 인간의 방법이지 신의 방법이 아닌 거다.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복잡한 기계장치는 인간의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베토벤의 운명처럼 콰콰콰쾅 때리고 고흐의 그림처럼 강렬한 인상을 쓰는 것이 신의 방법이다. 신은 복제하고 증폭한다. 한꺼번에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데 톱니바퀴를 하나씩 맞춰갈 이유가 없다. 현대차는 8단기어를 자랑하지만 신은 무단기어를 쓴다. 신은 게임의 법칙을 쓴다. 그것은 맞대응이다. 말하자면 프레임을 거는 것이다. 적은 비용으로 이길 수 있다. 신은 의사결정의 효율을 쓴다. 우리는 물리력의 효율성은 알아도 의사결정의 효율성은 모른다. 신은 지름길을 두고 돌아가지 않는다. 신의 전지전능은 컴퓨터나 기계장치의 복잡함이 아니라 게임에서 언제나 이기는 것이다. 복잡한 기계장치는 통제하기에 좋지 않다. 의사결정 비용이 소모된다. 의사결정에도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계장치는 인간과 같은 하수들이 쓰는 물건이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다가 맞대응하면 되는데 일일이 소수점 이하 백만 자리까지 맞추는 수고할 이유가 없다. 신은 큰 방향을 정해주고 나머지는 시장원리와 같은 밸런스 원리에 맡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걸쳐 다섯 단계의 밸런스가 있다. 5회의 밸런스를 통과하면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다. 신은 알파고의 복잡한 연산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반집승을 끌어내면 된다. 신은 게임을 건다. 프레임을 걸고 전략을 걸어 상부구조에서 이겨놓는다. 우주는 게임에 의해 작동된다. 게임은 5회에 걸쳐 일어난다. 마지막 한 판만 이기면 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가지 게임 중에서 질의 승부만 이기면 된다. 나머지는 밸런스가 해결한다. 매번 이기려고 하면 그 과정에 정보가 상대방에게 넘어간다. 상대방에게 정보를 넘겨주지 않고 이겨야 한다. 중간까지 져주다가 막판 발내밀기로 결승테이프를 끊으면 된다. 그게 비용을 절약한다. 화성의 모래알을 셀 필요가 없고 무조건 상대방보다 한 알 많으면 된다. 프레임을 걸어 게임에 이기면 상황이 통제되고 통제되면 해결된다. 기승전결의 전개에서 기에 서면 이기는데 량을 낱낱이 셈해서 뭣하냐고? 경마에서 이기는 말을 맞출 이유가 없다. 경마장을 운영하면 된다. 사건을 일으키고 맞불을 지르면 되는데 왜 운동 하느냐고? 량은 많고 운동은 빠르고 힘은 강하고 입자는 균형인데 신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이기면 된다. 먼저 오면 이긴다. 먼저 온 자에게는 권력이 있다. 게임의 주최측은 항상 승리한다. 먼저 와서 판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걸고 맞대응해서 판을 교착시킨다. 50대 50으로 교착시켜놓으면 작은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 만으로도 밸런스를 움직이면 계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인간이 쓰는 복잡한 기계장치가 왜 필요하겠느냐 말이다. 하느님이 띠를 정하는데 소는 뚜벅뚜벅 걸어가고 쥐는 몰래 소의 등에 올라타고 갔다고 한다. 마지막에 내달려서 쥐가 테이프 끊고 일등 먹었다. 쥐띠가 소띠보다 앞서게 됐다. 신은 쥐의 방법을 쓴다. 소 등에 타고 가므로 에너지를 아낀다. 마지막 1초에 이기면 되므로 인간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신이 이기는 마지막 1초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인간의 무대다. 소처럼 신을 등에 태우고 가는 인간은 신의 계획을 알아챌 수 있다. 말은 기수의 마음을 읽어낸다. 말의 요구대로 기수가 가는 일은 없다. 기수가 가려는 목적지를 알면 말은 편하다. 인간의 기도는 말이 기수에게 이런저런 요구조건을 내거는 것이니 어리석은 짓이다. 기수의 조건을 말이 읽어내야 한다. 말과 기수의 호흡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기도는 의미가 있다. 전체와 부분은 언제나 상호작용하니까. 신은 인간을 부려먹을 테니까. 신이 원하는 위치에 미리 가 있는 자가 기적을 본다. 신의 의사결정비용을 줄여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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