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배워서 안다. 내가 1의 힘으로 벽을 밀어내면 벽도 1의 힘으로 나를 밀어낸다. 때로는 그렇지 않다. 법칙을 뛰어넘는 통렬한 경험을 하는 때가 있다. 내가 1의 힘으로 벽을 밀었는데 벽은 100만의 힘으로 나를 패대기쳐 버린다. 돌아가는 팽이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면 팽이는 강하게 반발한다.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팽이는 성난 개처럼 덤벼들어 나를 물어뜯으려 한다. 달리는 자동차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보자.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아보자. 등가교환의 법칙은 무시된다. 내 코털 하나로 보상하면 안 되겠느냐고 사자에게 제의하지만 사자는 나의 제안을 가볍게 씹는다. 그런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대표성의 세계다. 기도가 먹히고 기적이 일어나고 신이 개입하는 세계가 있다. 박항서 감독이 살짝 건드리자 베트남이 벌떡 일어났다. 부분을 건드렸는데 전체가 반응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무시되고 등가교환의 법칙이 무시되고 일대일 대칭은 부정된다. 새끼곰을 살짝 건드리자 엄마곰이 맹렬하게 쫓아온다. 꼬마에게 꿀밤을 먹였을 뿐인데 그쪽 집안 식구가 총출동한다. 플라즈마와 같은 에너지의 속성이 드러난다. 에너지는 동적상태에서 작동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팽이를 보자. 지면과 접촉하는 부분은 작은 한 점이다. 한 점이 전체를 대표한다. 우리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구에 산다. 날로 진보하는 동적 사회에 살고 있다. 계속 팽창하는 우주에 살고 있다. 모두 동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동은 부단히 움직이는 것이며 움직이는 것은 외부와의 접점이 부단히 이동하는 것이며 그럴 때 그 부분이 전체를 완전히 대표하게 된다. 그동안 인류의 과학은 가만히 멈추어 있는 정적공간을 탐구했을 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적공간을 탐구하지 않았다. 대표성의 세계를 탐구하지 않았다. 완전성의 세계를 탐구하지 않았다. 에너지가 빠져나간 불완전한 세계를 탐구했을 뿐이다. 에너지를 싣고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에너지를 잃고 멈춰선 자동차를 분해해봤을 뿐이다. 움직임에 의해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때는 완전하다. 전체가 일제히 반응하기 때문이다. 완전해야 통한다. 인간사회에서 그것은 권리 혹은 권력이다. 권력은 한 명이 다수를 대표한다. 인권은 누구든 인류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잠재적인 대표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대표자는 언제라도 한 명이어야 한다. 팽이가 지면과 접촉하는 말단부에는 한 명만 올 수 있다. 그 한 명의 대표자는 부단히 교체되어야 한다. 나머지 다수는 그 한 명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역할이다. 권력의 형성에 기여하므로 모두들에게 권리가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계를 이루고 계의 구성원들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서 통짜덩어리를 이룬다. 그 방법으로 계의 성립에 기여하는 모두는 잠재적인 대표자로 간주되어 인권을 존중받는다. 반대로 계를 파괴하고 시스템을 적대하는 자는 시스템 바깥의 타자로 간주하고 공민권을 박탈해야 한다. 그런 자는 대표성을 부여하지 말고 아주 죽은 사람 취급을 해버려야 시스템이 보호된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개별적으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 1만 년 전 부족민 시절이라면 인간과 오랑우탄의 차이는 무시해도 좋다. 인간이 개보다 나은 점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회를 이루었고 그 사회가 부단히 진보하므로 인간집단과 외부환경과의 관계가 부단히 재조정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인간 개개인이 잠재적으로 사회를 대표하게 되는 대표성을 인정받아서 만물의 영장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다. 동물도 군집을 이루지만 동물의 군집은 진보하지 않으므로 대표성이 없다. 환경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이 없다. 정적인 존재는 대표성이 없다. 오직 동적 존재인 인간만이 대표성을 가진다. 인간만이 사회를 진보시켜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보수꼴통은 공민권을 박탈하고 인권을 부정해야 한다. 다만 인류문명사 단위의 큰 틀에서 보면 보수꼴통들도 나름 기여하는 바가 있으므로 봐주는 것이다. 우리가 소박한 감상주의로 가서 사람이 착하니까 혹은 인간이 불쌍하니까 하고 도덕타령, 윤리타령, 인류애타령의 시시한 논리로 인권을 말하면 안 된다. 닫힌계를 이루는 에너지의 원리로 보면 통짜덩어리라 불가분이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말이고 사실 둘을 딱 나눌 수 없다. 보수와 진보가 사회를 발달시키는 진보경쟁을 벌이는 것이며 진보는 방향을 제시하고 보수는 계에 에너지를 공급하여 판을 키운다. 인류역사 단위로 보면 둘 다 진보이며 보수는 없다. 진보는 바르지만 대신 편협하고 보수는 그르지만 힘이 있다. 그러므로 딱 잘라서 여기까지는 친하고 여기서부터 타자라고 금을 그을 수 없다. 친함이 있으므로 인권이 있는 것이다. 친함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듯이 서로간에 에너지가 흐르므로 친함이 있다. 대표성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부단히 진보하므로 에너지에 의하여 결속되어 친함이 있다. 문명은 동적 존재이므로 구성원들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것이 친함이다. 자동차가 멈추어 있다면 모르되 달린다면 모든 자동차의 부품은 그 자동차에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친함이 있는 것이다. 만약 결속되어 있지 않다면 자동차가 달릴 때 바퀴가 떨어져 나간다. 사회가 진보할 때 보수는 이탈한다. 진보는 앞서가며 길을 열고 보수는 뒤처져서 따라오는 차이가 있을 뿐 어떻게든 함께 간다. 따라오지 않는 보수는 이명박근혜처럼 제거된다. 전두환, 노태우처럼 판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문명이 부단히 진보하므로 문명의 구성원들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으며 누구라도 불시에 인류의 대표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인권이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서로 우정을 키워서 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원래 달리도록 만들어졌기에 부품들이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듯이 인류는 원래 진보하도록 만들어졌고 그 진보는 정이 아니라 동이며 동은 닫힌계를 이루게 되어 있으며 그래서 친한 것이다. 소박한 감상주의 관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부자간에 반목하여 서로 친하지 않아도 부자유친의 친함이 있다. 물리적으로 있다. 상속권 때문에 그것이 있다. 관성이 있고 각운동량이 있고 가속도가 걸려 있다. 다만 친함이 빠져나가 주변에 흩어져 있을 수는 있다. 친자가 아닌 남의 자식에게 가 있을 수도 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여 어디에 있어도 그것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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