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론과 구조론 [일부 고쳐썼지만 거의 새 글입니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관점이 서구 계몽주의 시대의 자연신론 곧 이신론과 통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있다. 나무위키는 공자와 노자, 석가를 이신론자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확실히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이신론이라는 개념이 본래 예언과 기적에 골몰하던 중세 기독교 광신도들을 계몽할 의도에서 나왔으므로 그러한 본질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신론은 신의 천지창조를 긍정하지만 창조 후에는 신이 세상에서 손을 뗐으며 그러므로 기적과 예언을 부정하는 견해라고 한다. 시골에서 목동이 성모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소녀가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면 피곤해진다. 일대소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모상이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식의 이야기는 흔하다. 이런 것을 방치하면 무당과 주술사가 권력을 휘두르는 부족주의로 치닫게 된다. 반지성에 반문명이다. 서구의 이신론은 이러한 소인배의 권력의지를 꺾으려는 엘리트의 노력이다. 반면 공자와 노자 그리고 석가의 입장은 알지 못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결론을 유보하고 미지수로 남겨두는 것이다. 어떻든 논의의 본질은 권력이다. 시골권력이냐 엘리트 권력이냐? 기적은 신이 역사에 개입하는 것이다. 신이 개입하면? 평등해진다. 엘리트는 우월하고 민중은 열등하다. 그러나 신이 개입하여 엘리트의 우월적 지위를 해체한다. 산골의 평범한 목동에게 은총을 내린다. 천사를 면담한 목동이 졸지에 권력을 가져버린다. 동레미 마을의 소녀 잔 다르크도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잡았다. 선언한 다음 증인을 세우면 권력을 얻는다. 쉽잖아. 엘리트가 10년을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 한 권력을 문맹소녀 잔 다르크는 몇 개월 사이에 얻어버렸다. 권력에 대한 태도가 본질이다. 구조론은 서구 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과 입장이 다르다. 신은 언제라도 역사에 개입한다. 엘리트의 권력은 언제든지 무효화될 수 있다. 평범한 농부도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력획득의 방법은 다른 것이어야 한다. 꿈속에서 천사를 만났다거나 성모상이 눈물을 흘렸다거나 혹은 무당의 주술이나 부적과 같은 것들은 권력획득 수단이 아니다. 그런건 그냥 거짓말이다. 혹은 혼란한 시대에 암암리에 형성되는 소인배의 권력의지를 수렴한 것이다. 천사의 면회는 그냥 거짓말이지만 소인배의 권력의지는 진실이므로 반복되는 잔 다르크 소동은 태극기부대처럼 나름 생명력 있다. 구조론은 종교를 부정하지만 종교가 가진 생명력을 긍정한다. 그들의 권력의지를 긍정한다. 물론 그들의 방법론은 단호하게 부정한다. 종교는 해체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본능이 지향하는 근원의 생명력은 긍정한다. 그것은 에너지다. 그것은 대중의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정확히 이신론의 반대지점에 서 있다. 기적은 있고 기도는 필요하다. 본질은 관계설정이다. 이신론은 신을 타자로 본다. 타자는 신일 수 없다. 구조론은 엮임이론이다. 엮여있다. 그러므로 타자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력은 개인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중심에서 위임되는 것이며 대통령의 권력이 인물의 개인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으로부터 위임되듯이 말이다. 권력은 의사결정의 중심에서 전해오는 것이므로 대표성을 가진 누구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누가 대표성을 가지는가는 시험을 쳐서 결정하는게 아니다. 엘리트들의 인맥에 들어야만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노무현처럼 뾰족한 지점에 가 있으면 대표성을 얻을 수 있다. 누구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면 그 사람이 바로 인류의 대표자인 것이다. 시험을 쳐서 에베레스트에 오를 자격증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영국인은 신사이므로 특별히 에베레스트에 오를 자격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건 없다.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 연결된 네트워크 안의 모든 존재는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정상의 뾰족한 지점에 가 있으면, 타이밍이 맞으면, 준비되어 있으면, 결정적으로 운이 좋으면 된다. 권력을 얻는다. 권력은 위임되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사기 쳐서 스스로에게 권력을 위임해 버렸지만, 사실 백년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 밑바닥에 에너지는 응축되어 있었다. 언젠가 영웅은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가 특별히 준비하고 용감하게 그 지점에 간 것이다. 기적은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 기적은 사기를 쳐서 되는게 아니고 어떻게든 에너지를 대표해서 되는 것이다. 타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타자라면 권력이 위임되지 않는다. 타자는 권력을 얻을 수 없다. 타자는 대표성을 가질 수 없다. 서구의 이신론은 신을 타자로 본다. 타자는 결코 신이 아니다. 구조론은 의사결정구조로 본다.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는 외부의 타자가 신일 수는 없다. 그것은 똥이다. 만약 그런게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외계생물체라고 하겠다. 그 외계생물체가 인류를 창조했다면 나는 그 불쾌한 족보를 지운다. 그 외계생물체를 죽인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을 죽여야 한다. 자식을 낳아놓고 돌보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손을 뗐다면 죽이는게 맞다. 부모와 자식에게는 친함이 있다. 친하다는 것은 권력을 위임한다는 말이다. 아들과 딸은 부모의 소유와 지위를 위탁받는다. 그것이 친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친함이 있다. 권력의 위임이 있다.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있다. 에너지는 용틀임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입자처럼 움직이지 않고 플라즈마처럼 움직인다. 에너지는 서열을 매기지 않고 계급을 정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꿈틀거리다가 약한 고리를 발견하면 그리로 터져 나온다. 우연히 그 지점에 가 있던 자가 통하면 대표성을 얻는다. 그래서 기적이다. 물론 통하지 않으면 그 지점에 가 있어도 기적을 보지 못한다. 방향이 맞아야 통한다. 통해서 한편이 되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은 친함이 있지만 등 돌리면 남이다. 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기적은 없다. 그 자리에 가 있어야 하며 타이밍이 맞아야 하며 준비하여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어쩌다 그 자리에 갔다. 현대사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때 신의 미션을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었다. 에너지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엘리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현명하게 에너지의 내밀은 촉수를 피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는 따로 자기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계획을 버려야 한다. 신의 계획을 내 계획으로 삼아야 한다. 텅 빈 마음이 되어야 한다. 내 목적을 버리고 천하의 목적을 내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준비된 자세다. 연주자는 자기 계획을 버리고 악보대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지휘자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약한 고리가 만들어지며 에너지는 곧 그곳을 뚫고 폭발한다. 그 폭발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구조론은 사건으로 본다. 사건은 둘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냥 혼자 있으면 사건은 없다. 에너지는 둘의 모순에서 격발되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다. 닫힌계가 만들어져 있다. 토대의 공유가 있다. 각운동량이 조성되어 있다. 벡터가 있다. 관성력이 조직되어 있다. 매개변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상호작용론이며 또 동적균형론이다. 사건은 언제라도 현재진행형이므로 구조론은 신을 과거의 어떤 존재로 보지 않고 신을 외부의 타자로 보지 않으며, 신을 분리되는 물질적 존재로 보지 않으며, 신을 어떤 이론이냐 원리 혹은 진리로 추상화시켜 보지 않으며, 신의 개입을 부정하지 않는다. 엮여있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떤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의 존재가 아니면 존재가 아니다. 신이 6천 년 전에 지구를 다녀갔든 137억 년 전에 우주를 다녀갔든 버리고 떠난 자는 신이 아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신은 결코 인간 바깥의 타자일 수 없으며 인간과 엮여서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이지 던져놓고 밖에서 팔짱 끼고 관전하는 구경꾼이 아니다. 만약 그런 자가 신이랍시고 버티고 있다면 죽인다. 양자역학 시대이다. 우주의 비밀을 한 꺼풀 더 벗기기는커녕 혼미해졌다. 인간은 여전히 우주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라. 인간이 탐지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는 부분뿐이다. 밤하늘에 별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빛나는 별만 볼 수 있다. 어두운 별도 있다. 그러나 모른다. 우주가 100이라면 99는 정이고 1이 동이다. 인간이 그 1을 포착한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하나의 움직임이 또 다른 움직임을 격발하기 때문이다. 앞선 움직임이 뒤따르는 움직임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의 속성은 불가예측성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자신을 짐朕이라 불렀다. 조짐이라는 말이다. 엘리트는 그러한 에너지의 불가예측성을 싫어한다. 노무현의 불가예측성을 거부한다. 그래서 죽였다. 그런데 살아났다. 사실이지 에너지는 예측가능하다. 에너지가 터져 나오는 약한 고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뿐 지하에 응축된 에너지 총량은 측정이 가능하다. 에너지는 언제나 수렴방향으로 간다. 낮은 곳으로 간다. 엘리트로 가지 않는다. 잔 다르크가 지갑을 주웠다고 시샘할 일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의 속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권력의 속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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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권력이다. 이 선언이 듣고 싶었답니다!
신은 권력 그 자체인데, 왜 신의 아들들은 닭 울기 전에 세번이 아니라 삼천 번 자신이 가진 자그만 권력 마저도 거부하고 살아가는지 안타까울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