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의 요체는 집단의 의사결정에 있다. 승리의 조건은 둘이다. 첫째는 신속한 의사결정이고 둘째는 올바른 의사결정이다. 전자는 빠른 판단을 요구하고 후자는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쪽이 승리한다. 문제는 둘의 모순이다. 빠른 판단은 정확도를 희생시키고 정확한 판단은 신속성을 희생시킨다. 역사의 동력원은 둘의 변증법적 대결에 있다.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검증절차를 거쳐야 하며 이는 속도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조적인 최적화로 가능하다.
###
빠른 판단을 위주로 하는 정치는 보수주의다. 보수가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이유는 ‘빠르다’는 장점 때문이다. 물론 보수 그 자체가 빠른 것은 아니다. 빠른 보수만 살아남은 것이다.
보수가 빠르게 판단하는 방법은 첫째 독재를 휘둘러 의사결정 참여자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며, 둘째 완강한 태도로 버티며 현안을 묵살하고 의사결정을 하지 않은 채로 깔고 뭉개는 것이다.
의사결정 참여자의 숫자를 줄이면 그만큼 오판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보수는 망한다. 현안을 깔고 뭉개면 임시 모면이 되나 장기적으로 무능이 드러나서 결국 망하게 된다.
백명의 시민이 민주적으로 토론하면 시간이 걸린다. 보수의 방법은 배제다. 99명의 시민을 의사결정라인에서 배제하고 왕이 혼자 독단적으로 판단하면 된다. 당연히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보수가 살아남는 이유는 오류가 드러날 때 재빨리 방향전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회의하느라 오류를 시정하지 못하지만 보수는 독재자가 혼자 판단하므로 방향전환 속도가 빠르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느리고 우유부단한 보수, 완고한 보수, 오류를 시인하지 않는 보수, 방향전환 못하는 보수, 감정적 태도를 보이는 보수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반드시 도태된다.
보수가 망할 때는 조선왕조가 망하듯이 완전히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보수의 장점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에 집착한 드골과 처칠의 보수가 몰락한 것이 그 예다.
2차대전의 정의는 식민지 독립이다. 민족독립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승국의 환상에 도취되어 손에 쥔 것을 놓으려 들지 않았다. 식민지가 없었던 북유럽에 비해 낙후되었다.
보수가 장점인 역동성을 잃는 이유는 역시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서다, 가장 빠른 의사결정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의 원인이 외부에 있을 때 그들은 의사결정을 기피한다.
드골과 처칠은 신념과 결단의 정치인으로 선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결단의 정치를 강조한 히틀러 만큼이나 결단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결단력 부족으로 패배한 전쟁을 2년이나 더 끌었다.
어쨌든 독일 기민당의 동독 흡수는 빠른 결정이었다. 부시의 이라크 침략도 빨랐다. 이명박의 운하질도 ‘빠르다’는 점을 선전하고 있다. 남의 것을 빠르게 빼앗을 뿐 제것을 빠르게 내놓지는 못한다.
진보가 패배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절차를 거치느라 판단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대신 진보는 충분한 검증을 거치므로 판단이 정확하다. 진보는 장기적으로 승리한다.
집권기간이 짧다해도 역사의 큰 흐름은 항상 진보가 결정한다. 일제에 저항한 진보의 저항이 옳았고, 이승만에 항거한 419가 옳았고, 5월의 광주가 옳았고, 6월항쟁이 옳았고, 촛불이 옳았다.
진보는 항상 옳았고 앞으로도 항상 옳다. 문제는 진보가 옳다는 사실과 진보의 집권이 전혀 별개라는 데 있다. 검증을 중요시 하는 진보의 의사결정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집권에 실패한다.
최악은 느리면서도 틀린 진보다. 진보의 입장에 서 있을 뿐 체질적으로 보수체질인 자들이 있다. 그들은 심사숙고하여 매우 신중하게 판단하면서도 항상 잘못된 판단을 한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
외부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구소련의 몰락, 동구권의 민주화는 외부에서 온 변화다. 진보는 검증을 강조하지만 외부세계를 검증할 수는 없다. 오판을 두려워 하므로 더욱 오판한다.
변화가 외부에서 올 때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발을 들여놓고 볼 일이다. 그들은 신중함을 내세워 머뭇거리므로 고립된다. 뒤늦게 뛰어들어봤자 주도권 잃어 저절로 오판이 되고 만다.
###
최선은 무엇인가? 빠르고 정확한 진보의 건설이다. 역동적인 진보, 유연한 진보,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받아들이는 진보, 오판을 두려워 하지 않는 진보, 외부세계로 뻗어가는 진보라야 한다.
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에서 대비되어야 한다. 대중이 보수화 되는 이유는 어차피 의사결정라인에서 배제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진보로 가든 보수로 가든 어차피 배제된다.
인구가 백만명이라도 결국 어차피 한 사람이 결정하게 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형식일 뿐 어차피 유권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대중의 참여라는 것은 구호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에도 대중은 배제된다. 대중을 참여시키려면 댓가를 줘야 한다. 진보가 승리하는 이유는 대중에게 실질적인 댓가를 주기 때문이다. 20세기를 혁명의 세기라 한다. 본질은 신분상승이다.
대중에게 확실한 댓가를 준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교육과 복지다. 그러나 교육과 복지는 20세기의 이슈다. 이미 주가에 다 반영되었다. 정치구조 안에서 실질적인 댓가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 그 자체를 분배해야 한다. 의사결정권 자체를 넘겨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중간에서 가로챈다는 데 있다. 민주화로 권력을 넘겨받은 조중동이 그 권력을 밑으로 나눠주지 않는다.
독재정권에서는 왕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독재자가 재벌을 통제했고 기득권을 통제했고 조중동을 통제했다. 민주주의는 그 권력을 시민에게 넘겨주는 것이지만 조중동 시민은 그럴 의사가 없다.
결론적으로 진보는 권력을 실질적으로 시민에게 이양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하드웨어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혁신이다. 인터넷에 의해 조중동의 권력이 삭감되었다.
강남 기득권을 제압하는 방법은 신도시를 개발하고 학교를 옮기는 수 밖에 없다. 부단한 혁신만이 실질권력의 이양을 가능케 한다. 문제는 강단중심의 진보가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과연 진보는 인터넷을 선점했는가? 아니다. 인터넷을 선점한 세력은 좌파가 아니라 노무현이었다. 좌파 사이트 중에 뜬 것은 없다. 그들은 노무현을 보수로 밀어내기에 분주했을 뿐이다.
‘알려줘? 넌 보수야!’
참여정부 5년간 좌파의 유일한 레파토리였다. 진보가 진보의 권력을 분산할 의지가 없었다. 진보의 살길은 역동성에 있다. 빠르게 의사결정할 수 있는 혁신그룹은 노무현그룹 외에 없었다.
진보는 오직 혁신에 의해서만 의사결정의 축이 될 내부의 구심점을 건설할 수 있고 속도를 낼 수 있다. 혁신하지 않는 진보는 참된 진보가 아니다. 강단 중심의 진보로는 희망이 없다.
하드웨어의 건설은 내부에 의사결정의 축을 건설하는 것이다. 구심점을 건설하는 것이며 이는 부단한 혁신에 의해 일어나고 혁신은 오직 외부세계와의 촉수를 늘려가는데서만 얻어진다.
작은 물결이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등장이 다시 진보에 약간의 기회를 주고 있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에 민감한 네티즌 세력이 발언권을 가져야 진보가 산다.
소프트웨어의 건설은 체험의 공유에 의해 일어난다. 소통의 코드가 일치할 때 진보는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6월 항쟁이나 촛불항쟁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집단적 체험을 공유한다.
그런 정서적 공감세력이 형성되어 있을 때, 코드의 일치가 얻어져서 진보는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보수를 능가할 수 있다. 월드컵과 같은 축제는 그러한 정서적 공통성 확보의 훌륭한 촉진제가 된다.
진보가 월드컵 길거리응원을 군중의 광기라며 비난한다면 자살행위다. 젊고 자유롭고 무질서한 분위기에 익숙해질 때 진보는 자신감을 얻는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끌어내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무질서를 두려워 하는 진보는 그 떠들썩한 광장의 무질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학습할 기회를 얻지 못하므로 살아남지 못한다. 무질서 안에서의 평온함을 체험한 자가 진정한 리더가 된다.
###
두 갈래 길이 있다면 어느 길을 갈 것인가?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르다. 인간은 9할이 오판한다. 오판하지 않는 경우는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을 때 뿐이다. 데이터가 없으면 거의 오판한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확률보다 오판할 확률이 당연히 높다. 상식적으로는 50 대 50으로 대등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오판할 확률이 약간 높은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높다는데 유의해야 한다.
진보의 큰 결함은 무오류주의다. 학계 중심의 시스템에 의해 오판이 막아진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어떤 판단이든 처음 당하는 상황일 때는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면 정답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약점이다. 이러한 인간적 약점을 겸허히 인정해야 진보가 살아남는다. 왜 인간은 오판하는가? 오판이 어느 면에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썰매개 대장은 바른 길을 알고 있지만 무리들에게 바른 길을 알려줄 방법은 없다. 오직 잘못된 코스로 진입했을 때 사납게 짖으며 목덜미를 물어서 혼내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가장 빠른 썰매개팀은 온갖 골목길에서 온갖 오류를 두루 경험한 팀이다. 오직 오답의 위험을 경고하는 방법으로만 정답으로 이끌 수 있으므로 미리 오답을 경험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쪽을 선택한다. 바른 판단일 경우 확신이 없어서 속도를 내지 못한다. 틀린 판단일 경우 방향을 바꾸면 된다. 이때는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판한다.
현명한 자는 남이 먼저 오판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쓴다. 그들은 행렬의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앞장선 이가 오판하여 허방에 빠지는 것을 보고 교훈을 얻어 추월하는 전략을 쓴다.
그래서 역사의 주도권은 계속 바톤을 넘긴다. 인류의 역사는 2등이 1등을 추월해온 역사다. 이집트는 아랍에 추월당했고 아랍은 지중해에, 지중해는 그리스에, 그리스는 로마에, 로마는 게르만에 추월당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에, 프랑스는 영국에, 영국은 미국에 추월당했다. 다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려 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인 역사의 법칙이다. 오판이 더 합리적이므로 인간은 오판한다.
그러므로 정치는 항상 여야의 밸런스를 추구해야 한다. 어느 쪽이 집권해도 오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판하지 않는 수는 없고 오판에 대비하여 안전한 보험을 들어놓는 쪽이 승리한다.
그것은 내부경쟁이다. 진보는 진보 안에서 경쟁해야 한다. 그 경쟁이 오판에 대한 보험이 된다.
∑ |
이거 느껴본 적이 있소.
그 평온함은 루즈함이 아니라 차라리 긴장 속의 깨어있음에 가까웠소. 근데 그 속에 묘한 평온감이 있더이다.
무질서 속에서도 무언가 질서가 있다는 느낌, 의미가 있다는 느낌. 안전하다는 느낌 같은 거.
생각은 진보적으로,행동은 보수적으로,,,누군가 말했는데?
정치란 무엇인가? 패자,약자에 대한 배려..
오래전 현인이 추구했던 도덕정치는 도덕정치가 안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말이 나왔을거고
앞으로도 계속 되겠죠?
우주의 기가 성장 분열의 기인데 인간 쪼무래기들이 설쳐봤자 도덕정치는 걍 도덕 정치일뿐,,,
그래도 사과나무를 심어야겠습니다.
아! 바로 이거야.
보험걸고, 판을 키우기.
안전성을 담보한 한판 승부.
탁월한쪽으로 꾸려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