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희의 경우 영화 트루먼쇼를 떠올릴 수 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전 인류가 지켜보고 있다. 그 개인은 어떻게 될까? 영화는 엉뚱한 이야기를 해놨지만 그건 영화라서 가능한 코미디일 뿐이다. 만약 그게 현실이 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굴러간다. 일점에 에너지가 모이면 폭발한다. 만인이 한 사람을 지켜본다는 것은 역으로 한 사람이 만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에너지 낙차 성립이다. 많은 경우 주목받은 사람의 희생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유사한 사례는 다양하다. 산골소녀 영자도 있다. 400억 벌었다는 사기꾼 박철상도 있다. 처음에는 선의로 시작했더라도 카메라가 모이면 일이 커져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14억을 번 대학생이 겁도 없이 400억짜리 허풍열차를 탄다. 설국열차는 질주한다. 유럽이라면 어느 망국의 공주 이야기가 많다. 자칭 러시아 마지막 짜르의 후손이 미국에서 발견되어 크렘린궁을 되찾으려 한다는 식이다. 철가면 이야기도 있다. 음모론이 꽃을 피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찰스 군과 결혼한 다이애너 씨다. 그녀는 왜? 찰스는 왜? 왕실은 왜? 왕실은 원래 트루먼쇼를 위해 존재한다.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만인이 각자 자기 소설을 무대에 올리는 거다. 배우는 소재를 제공할 뿐. 결과는 치명적이다. 조 디마지오와 결혼한 마릴린 몬로도 그렇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이 그들 개인 간의 마찰이라고 믿는다. 천만에. 그들의 행동은 인류에 대한 맞대응이다. 대중은 최진실과 조성민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라며 축소하고 싶어 한다. 천만에. 만인에 대한 행동이다. 에너지는 태워졌다.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며 결 따라간다.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다. 이부진과 임우재 커플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만인의 입방아에 올라서 100만 개의 연극이 동시상영으로 공연되고 있었다. 착한 사람이라도 얼떨결에 신데렐라 스토리에 승차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대본에 충실한 못된 의붓언니 1, 못된 의붓언니 2를 연기하며 고현정을 깐다. 평범한 사람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면 비극은 궤도를 타고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무엇인가? 대중은 최준희와 할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한다. 팩트가 궁금하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거다. 권력의지다. 그들의 일에 궁금해하는 사실 자체로 유죄다. 장윤정과 그의 엄마도 같다. 권력의지의 충돌. 주목받은 엄마는 무의식의 지령을 따라 대본에 충실해진다. 대본대로 권력을 추구한다. 권력은 권위주의를 타고 가며 권위주의는 남아선호를 부추긴다. 아들에 대한 편애와 집착은 엄마와 딸 사이의 당연한 권력투쟁이다. 남들의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면 증세는 심해진다.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에 따라 돌이킬 수 없다. 훈련된 귀족들만 사방에서 발톱을 들이대는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의연하게 행동한다. 장윤정 엄마나 안정환 엄마는 귀족이 못되었다. 대중은 사실관계를 따져보자며 팩트를 외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건에 에너지가 태워질 때 팩트야말로 가장 진실과 거리가 멀다. 왜? 팩트란 에너지 반응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감대처럼 살짝 건드려도 강렬하게 반응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팩트라 부르지만 신문기자에게 그것은 먹잇감일 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역시 법칙을 따른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무조건 누군가를 희생시킨다. 만인이 지켜보며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에너지의 결집인 것이다. 사실은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거다. 만인은 조성민을 응징하는 방법으로 마초 한국남자들을 교육시키려 했다. 그게 천박한 권력의지다. 조성민의 사례를 교보재 삼아 한국남자들을 계몽시켜보겠다는 선의로 위장된 추한 권력의지다. 그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거다. 조씨 집안과 최씨 집안이라는 두 날개를 가졌던 최준희는 사회의 권력의지에 의해 강제로 한쪽 팔을 잃었다. 대중은 마초 한국남자를 계몽한다는 선한 의도를 앞세워 최준희에게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그들은 선한 의도를 가진 테러는 해도 된다고 믿는다. 성추행 의혹 때문에 자살한 부안 교사 사건도 같다. 가해자는 누구인가? 에너지가 일점에 모여 통제가능성을 상실했을 때 사고는 이미 일어난 있다. 운전기사 없는 버스의 질주와 같다. 누군가를 가해자로 지목하려고 하는 자가 가해자다. 비극의 원인은 통제가능성 상실에 있다. 반드시 운전기사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를 태우지 말아야 한다. 잘잘못을 따져보자며 흥분하는 자가 에너지를 태운다. 흥분하는 자들이 가해자다. 알아야 한다. 이런 사건은 매우 많다는 사실을. 한 번 궤도에 태워지면 무조건 정해진 법칙대로 간다는 사실을. 결과는 누군가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화를 내며 누군가를 비난하지만, 사실은 그게 당신의 뭣 같은 권력의지라는 사실을. 총이 있으면 쏘는 게 인간이다. 쏠 데가 없으면 자신을 쏜다. 대중은 최준희의 한쪽 팔을 꺾었고 반대로 최준희는 자신에게 모아진 대중의 시선이라는 총을 난사해 버린다. 누가 총을 주었나? 언론이? 대중의 관심이? 총은 원래부터 있었다. 반대로 상황을 장악하고 제어할 운전기사가 거기에 없었다. 스승이 없는 나라의 비극이다. 대중의 관심이라는 형태로 에너지가 집중되었다. 상황의 통제가능성을 따르지 않고 신기루 같은 팩트를 주장한 자가 운전기사를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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