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대에 '제2의 김예슬' 이라고?
얼마전 사회의 소모품을 거부하고 고려대학교의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김예슬 양의 이야기가 화재가 되었다. 일명 '김예슬 선언'은 명문대를 꿈꾸는 학생들과 현재 명문대에 재학중인 학생들을 포함한 이 사회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작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기업의 요구에 맞추어 젊은이의 인생이 세팅되는 현실에 대한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점에서의 선언인 것이다.
'김예슬 선언' 이후에 곳곳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를 따라서 대학을 뛰쳐나오는 학생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의 채상원 군이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 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여서, '제2의 김예슬 선언'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채상원 군의 글은 '김예슬 선언' 보다 좀 더 논리적이고 잘 짜여진 글이라고 생각한다. 잘 짜여진 구성의 칼럼이었다. 하지만 '김예슬 선언' 만큼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다. 그의 생각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논거의 문제 역시 아니다. 그저 마음이 뭉클해지는 무언가가 약하다는 것 뿐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제공하는 하청 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어, 의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 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대학 거부를 선택한 고려대 김예슬 씨의 자보 中
얼마 전 고려대학교 김예슬 씨의 자퇴 선언이 있었다. 혹자는 부적응자의 현실 도피라 말하지만, 문제는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적응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 그 자체에 있다. 대학 거부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 우리들도 잦은 회의감에 휩싸이며 때로는 현실에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황하기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어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대학교에 들어가면 누릴 수 있다는 '자유', '낭만' 따위에 대한 환상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내 친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노력해왔다. 간신히 그 과정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온 지금, 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 가졌던 대학 생활에 대한 환상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대학이란 곳은 본격적 무한 경쟁의 닫힌 공간일 뿐이며 그 공간은 우리에게 그 어떤 삶의 의미도,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제2전공 의무화, 영어 강의 확대, 상대평가제 등의 제도는 더욱 많은 것을 강요하고 무조건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위기를 그 어떤 주류 경제학도 설명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진 마당에, 대학은 별 고민 없이 지난 수십 년간 사용해온 커리큘럼을 답습하고 있다.
이렇게 낡고 답답한 대학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 무한 경쟁의 쳇바퀴에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한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강요하는 이 대학에 우리가 상상한 대학 생활이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하는 사람, 대안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은 대학 교수님도, 정치인도 아니다. 바로 우리 대학생들이다. 우리의 삶을 그들에게 내맡길 수는 없다. 이에 나는 오늘 조용히 다짐을 해보려 한다. 자발적 퇴교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지금의 대학을 거부하기로. 대학의 주인이 되어 대학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기로.
세상은 이미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보수적 인사들이 아무리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포퓰리즘이다 해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이제 무상 급식이 아주 상식적인 정책이고 필요한 정책임을 느끼고 있다. 체벌 금지, 보충 수업 선택권 보장 등이 포함된 경기도의 학생 인권 조례가 입법 예고됨으로써 학생들의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이미 2007년에 "더 이상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세계화의 시대가 아닌 지역화의 시대라는 의미이다. 또한 자유 무역도 그 수명을 다하고 보호 무역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변화의 시기에 한국 사회와 대학은 여전히 철지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주의만을 외치고 있다.
격변의 시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대학 내의 모든 구습과 싸워야 한다. 경쟁 일변도의 신자유주의의 피해들이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이 기존의 가치들이 더 이상 아무런 대안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 싸움은 더욱 절실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커리큘럼,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획일화된 교육 방식에는, 대학생을 미래 사회의 주체로 보지 못하는 낙후한 교육관이 근본에 자리하고 있다.
새 사회의 동력을 창출할 수 없는 대학에서는 그 어떤 비전도 찾을 수 없다. 우리 대학생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서 수업 내용과 수업 방식에서부터 시작해서 병든 대학 사회의 본격적 수술에 나서야 한다. 전체 대학 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고 대학생 스스로가 대학의 주인으로 거듭날 준비를 해야 한다.
김예슬 씨는 자보에서 대학과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자신 몫의 돌멩이가 빠져도 탑은 끄떡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탑을 반대하는 모든 우리 돌멩이들이 힘을 합쳐 흔들어보자. 그리고 우리들의 새로운 탑을 세우자. 시대는 더 이상 낡은 탑을 거부하고 새로운 탑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과학대학 08학번 채상원
3. 만약에 수명이 90세로 늘어난다면?
현재의 대학교육이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다음은 필자가 2008년 쓴 글에 자료로 쓰인 <나이별 세대별 경제활동 추이> 표 이다.
의학의 발달에 기인하여, 앞으로 평균수명 90세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가정 할 때에, 현재의 교육제도와 근무기간에 엄청난 모순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대학, 대학원, 군대, 어학연수 까지 마치고나면, 대략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시기는 28~30세 정도가 된다. 그리고 회사에서 오래 근무를 한다고 가정해도 대략 50세 정도면 은퇴를 하게 된다. 물론 능력이 뛰어나서 기업의 수뇌부까지 승진하거나, 오래 근무할 수도 있겠지만, 소수의 이야기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50세 이전에 회사로부터 은퇴권고를 받는다.
20년 열나게 공부해서, 고작 20년 써먹는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교육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50세 이후의 나머지 40년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전의 사고관으로는 나머지 삶을 자식이 부모를 먹여살리고, 경제적인 지원을 해야겠지만, 그렇게 따지더라도, 50대에 2세대가 직장을 얻고 경제적인 자립이 있기까지 10년간의 경제적인 위기의 시기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80대에 또한번의 가계경제의 위기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비단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의 모순에 있고, 결국에는 현재의 모든 제도와 물질만능주의도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왜냐하면 하나는 현재의 교육과 기업의 제도와 문화가 비 효율적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4. '나'로 시작하여, '우리'가 되어야 한다.
'채상원 선언'이 '김예슬 선언'과 다른 점은 김예슬 양은 고려대학교의 자발적 퇴교를 그녀의 결론으로 한 것이고, 채상원 군은 서울대학교에 남아서 학교측과의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선언은 모두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대학은 더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닌, 간판 브로커로 전락되어있고, 그 곳에서는 더이상 젊은이의 꿈을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채상원 군의 글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그의 글에는 '나'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래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정작 채상원 군은 학교측과 투쟁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건 뭔가 잘못 된 것이다. 아니면 현재의 기득권 세력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개인적으로 채상원 군은 알지 못하지만, 사회 기득권 세력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서울대학생 하나가 학교를 상대로 대자보를 붙이던, 1인 시위를 하던 학교측이 눈 하나 깜짝 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교육관련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은 현재의 대학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해서 저리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는가? 대통령이 이명박인데?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채상원 군이 현재의 대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학의 문화가 바로서야 한다는 취지는 옳지만, 그 방법에서 뭔가 어긋났다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채상원 군은 결국 서울대라는 기득권은 차마 놓지 못한게 아닌가? 대학 내에서 대학을 부정한들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 대학은 이미 기업으로부터, 학생들로부터 '돈'이라는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계속 들어오는데, 아쉬울게 없다. 그들의 정책과 철학을 바꿀 이유가 없다. 이건 당연하다. 때문에 채상원군은 나름 분투를 하겠지만, 이런저런 주변의 만류와 충고, 스트레스에 결국엔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나' 로 시작하여, '우리' 가 되어야 한다. 김예슬 양은 '더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심장이 뛰지 않으면 모두의 심장이 뛰지 않는 것이다. 채상원 군은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심장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대학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다. 대학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 전체와 마주선 것이다.
나는 그가 대학 내부에서 대학측과 싸울 것이 아니라, 벌판으로 나와 많은 젊은이들의 뛰는 심장과 하나라 되길 바란다. 대학 속의 '혼자'가 아니라 벌판위의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에너지가 생겨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세상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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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채상원 군의 글의 취지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대 내부에서 서울대를 바꿔보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학교 내부에서는 채상원 군이 고립되어, 에너지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반면 서울대는 단지 서울대가 아니라 하나의 네트워크 집단이고, 계속해서 에너지가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학생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건 어쩌건 눈하나 깜짝 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채상원 군이, 혹은 누군가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툴을, 공식을 발명해서 일반화 시킬 수 있다면, 누구도 대학에 가야 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고, 대학의 제도와 네트워크의 에너지가 차단될 것 입니다. 인간수명 90세 시대에 20년 써먹자고, 20년 공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므로 필연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게 되어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지식의 공급과잉현상은 지난 십여년간의 아파트 가격 상승처럼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채상원 군은 되려 밖으로 나와서, 새 시대의 첫차가 되길 바란다는 것이지요.
동력원없는 저항은 '히피'로 흐르기 쉽상.
자본에 저항하되 자본을 타넘을수 있는 과학기술로 무장해야하고
새로운 네트워크와 발달된 소통문화로 극복해야하오.
그것없는 선언은 대략 무의미.
물론 이와 별도로, 창의적인 인재들이 썩어가는 현재의 고착화된 한국대학구조에
경종을 울리는 일은 보기좋은 일이오.
보면 볼수록 50대는 청년기, 60-70대는 장년기, 80대가 원숙기의 세월이 되어야 함을 느끼오.
희망과 에너지가 불끈 솟음을 느낀다면 언급하신 구조론 대학 신입생의 오바인가요?^^
대학은 여기 있소.
공납금도 없고 등록금도 없소.
숙제도 없고 레포트도 없소.
수업 중에 땡땡이쳐도 무방하오.
입학도 없고 졸업도 없지만 적어도 손해보지는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