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자르기 - 머리자르기>
비온다. 빗소리와 차와 나 그리고 음악... 눈을 감아 본다. 고요하게 스며오는구나. 눈을 감으니, 한 생각이 떠오른다.
요즘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리속을 맴돈다. 문득 스쳐가는 대목이 있어서 붙잡아 보았다.
노무현의 말, '이제 여러분들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그 말을 모두 곡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다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이었을까...?
이런 명제가 있다고 치자.
신의 실패는 신의 실패일 뿐이지 인간의 실패는 아니다.
신은 언제라도 안되면 쓸어버리고 새로 하던지 말던지 하자. 이다. 하다 안되면 거기서 멈추게 된다. 한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도무지 말을 못알아 먹는 인간의 한계에 신 스스로 절망한다. 신이 좌절하여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인간에게 걸었던 모든 것을 회수하려 할때, 그때 인간은 '아니야, 기회를 줘. 아직은 더 가볼 여지가 남아 있어. 인간에게 맡겨줘봐.' 어디선가 신의 계획에 '난, 반댈세' 를 외치고 나오는 인간은 꼭 있게 마련이다. 신은 좌절속에서도 묘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그 무수한 거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단 한 송이 꽃을 피울수만 있다면 되는 일이었다. 신은 분노를 하는척하다가 슬그머니 누그러져 '그럼 어떻게 해볼건데?' 라고 묻는다. 인간은 답한다.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신은 생각한다. 계획은 끝나지 않았어...
인간의 문제도 그렇다. 개인이 뭔가를 시도하고 집단이 영향을 받는다. 문제가 발생했다. 인간은 대체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한다. 개인이 집단안에서 무엇인가를 시도해도 최종 수렴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은 실패해도 집단은 실패하지 않는다. 개인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좌절하지만 집단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므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이 개인을 희생시키면 집단은 파멸하게 된다. 신이 인간에게 불씨를 주지 않았다면 신은 파멸하게 된다. 존재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개인의 한계를 넘지 못해 자학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자기 바깥으로 내놓는다. 문득, 미술관에서 누군가는 그림을 본다. 누군가의 가슴에 불이 옮겨 붙었다. 신은 그렇게 계획을 증명하고 실현한다.
노무현은 스스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했다. 집단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과연 노무현은 꼬리였는가? 노무현은 꼬리자르기란 명목을 수면위에 띄워 놓고 실상은 머리자르기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머리를 자르면 어찌되는가? 노무현은 알고 있었다. 이미 머리가 복제되었다는 것을. 아니 기승전결을 알고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노무현은 불씨를 이미 건네주었다. 반면에 그는 개인이라는 틀에 철저하게 갇히게 되었다.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이 먹먹한 피울음에 지금도 코끝이 시려온다. 어쨌든 개인 그 자체로서는 산산히 부숴진 것이었다.
개인은 실패해도 집단은 실패하지 않는다. 자기를 버려서 집단을 살려놓기 때문이다. 불씨를 옮기는 작업에서 방해를 받을때, 그 불씨를 보존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누가? 개인이다. 집단은 불씨가 이미 옮겨진 줄도 모르고 개인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 '이제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라 하였다. 그 뒷말은 아마도,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방향으로 더 넓게 깊게 불씨를 옮겨야 합니다.'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집단에서 꼬리자르기를 액면 그대로 시도한다면 어찌 될까? 불씨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면 어찌되는 것인가? 이럴때 머리자르기란 자기희생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집단에서 자기이익적 희생을 강요하거나 충성심을 악용하면, 집단은 파멸한다. 집단이 파멸하면 개인들도 공멸이다. 불씨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면, 복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노무현을 삐딱하게 바라 보는 자들이 결코 보지 못한 지점이다. 국민의당의 사태는 왜? 볼 것을 제대로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은유된 내용은 특정 종교와 하등의 상관이 없으니, 오해는 사절입니당.
비온다. 빗소리와 차와 나 그리고 음악... 눈을 감아 본다. 고요하게 스며오는구나. 눈을 감으니, 한 생각이 떠오른다.
요즘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리속을 맴돈다. 문득 스쳐가는 대목이 있어서 붙잡아 보았다.
노무현의 말, '이제 여러분들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그 말을 모두 곡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다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이었을까...?
이런 명제가 있다고 치자.
신의 실패는 신의 실패일 뿐이지 인간의 실패는 아니다.
신은 언제라도 안되면 쓸어버리고 새로 하던지 말던지 하자. 이다. 하다 안되면 거기서 멈추게 된다. 한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도무지 말을 못알아 먹는 인간의 한계에 신 스스로 절망한다. 신이 좌절하여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인간에게 걸었던 모든 것을 회수하려 할때, 그때 인간은 '아니야, 기회를 줘. 아직은 더 가볼 여지가 남아 있어. 인간에게 맡겨줘봐.' 어디선가 신의 계획에 '난, 반댈세' 를 외치고 나오는 인간은 꼭 있게 마련이다. 신은 좌절속에서도 묘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그 무수한 거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단 한 송이 꽃을 피울수만 있다면 되는 일이었다. 신은 분노를 하는척하다가 슬그머니 누그러져 '그럼 어떻게 해볼건데?' 라고 묻는다. 인간은 답한다.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신은 생각한다. 계획은 끝나지 않았어...
인간의 문제도 그렇다. 개인이 뭔가를 시도하고 집단이 영향을 받는다. 문제가 발생했다. 인간은 대체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한다. 개인이 집단안에서 무엇인가를 시도해도 최종 수렴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은 실패해도 집단은 실패하지 않는다. 개인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좌절하지만 집단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므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이 개인을 희생시키면 집단은 파멸하게 된다. 신이 인간에게 불씨를 주지 않았다면 신은 파멸하게 된다. 존재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개인의 한계를 넘지 못해 자학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자기 바깥으로 내놓는다. 문득, 미술관에서 누군가는 그림을 본다. 누군가의 가슴에 불이 옮겨 붙었다. 신은 그렇게 계획을 증명하고 실현한다.
노무현은 스스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했다. 집단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과연 노무현은 꼬리였는가? 노무현은 꼬리자르기란 명목을 수면위에 띄워 놓고 실상은 머리자르기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머리를 자르면 어찌되는가? 노무현은 알고 있었다. 이미 머리가 복제되었다는 것을. 아니 기승전결을 알고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노무현은 불씨를 이미 건네주었다. 반면에 그는 개인이라는 틀에 철저하게 갇히게 되었다.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이 먹먹한 피울음에 지금도 코끝이 시려온다. 어쨌든 개인 그 자체로서는 산산히 부숴진 것이었다.
개인은 실패해도 집단은 실패하지 않는다. 자기를 버려서 집단을 살려놓기 때문이다. 불씨를 옮기는 작업에서 방해를 받을때, 그 불씨를 보존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누가? 개인이다. 집단은 불씨가 이미 옮겨진 줄도 모르고 개인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 '이제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라 하였다. 그 뒷말은 아마도,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방향으로 더 넓게 깊게 불씨를 옮겨야 합니다.'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집단에서 꼬리자르기를 액면 그대로 시도한다면 어찌 될까? 불씨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면 어찌되는 것인가? 이럴때 머리자르기란 자기희생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집단에서 자기이익적 희생을 강요하거나 충성심을 악용하면, 집단은 파멸한다. 집단이 파멸하면 개인들도 공멸이다. 불씨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면, 복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노무현을 삐딱하게 바라 보는 자들이 결코 보지 못한 지점이다. 국민의당의 사태는 왜? 볼 것을 제대로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은유된 내용은 특정 종교와 하등의 상관이 없으니, 오해는 사절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