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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정치] 2002년 12월 04일 (수) 12:48

백락천(白樂天) 이라는 당(唐)대의 위대한 문장가는 고적한 귀양 살이 시절에 구강(九江) 포구에서 우연히 만난 퇴물기생 하나의 이야기로 ‘비파행(琵琶行)’이라는 눈물겹도록 흥미진진한 서사 시를 썼다. “심양강변 어둑어둑 객을 보내는데, 붉은 단풍 갯부 들 검푸른 강물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퇾尋陽江頭夜送客, 楓葉荻花秋瑟瑟).” 훌륭한 문필가의 역할이란 역시 재미없거나 하찮 은 이야기를 가지고 위대한 재미를 창출하는 묘미에 있다. 3일밤 나는 평생 처음 기자신분으로 대선후보 심야토론을 관전하는 스 릴에 온몸이 떨렸다.

아무리 재미없더라도 재미있는 글 하나쯤은 만들어 낼 수 있겠다 고 자신하고 있었다. 기자실에 앉아 부산하게 들락날락 떠들어대 는 몇몇 기자님들의 소음을 차단하고 토론회에 집중을 했으나 한 시간이 지나니 머리가 멍해져서 필기조차 잘 되질 않았다. 한마 디로 재미가 너무 없는 것이다. 재미를 만들어 볼 거리를 아무리 찾아봐도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쩔거나 어쩔거 나 하고 풀이 죽어 귀가길에 잡은 택시 운전사 아저씨께 여쭈어 보았다.

“재미있었어요?” “재미참 되게 없으라우. 서루 흠집만 내는디, 흠집이랑게 젠부 아는 것뿐 아니것소? 뭔가 새것이 있어야제. 그러니 재미가 없을 건 당연지사제.”

드디어 토론의 막이 오르기 직전 민주당진영 대기실에선 노무현 후보 부인 권양숙여사 주변으로 모여있던 사람들의 초조감도 짙 어만 갔다. 어느 누군가, “기도합시다”하고 외쳤다. “불공드 리는 사람은 어떡하고?” “그래도 기도 한번 해주세요.” 이재 정신부님의 유려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의 한 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펴게 하여주옵소서…” 권양숙여사는 내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그토록 절 박한 순간들이었지만 나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토론이 끝난후 노후보 자신이 기자회견에서 지적했듯이, 우선 TV 토론의 형식이 문제였다. 노후보가 이회창·권영길 두 후보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노후보는 시간제약으로 이후보에게만 질 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 질문도 받지 않은 권후보 는 반론을 해야한다. 뿐만아니라 그 반론자의 순서도 질문의 순 서와 관계없이 이미 결정되어있다. 테제(論)가 없는 안티테제(反論), 이것 자체가 일종의 ‘허무개 그’였다. “반론하십시오.” 도대체 뭘 반론하라는 것인가. 사 회자 염재호교수의 진행언어 중에서 1분이나 1분 30초라는 말은 인수분해해서 빼버려도 되는 말이었다. 모든 문답을 그렇게 규정 한다는 것 자체가 군사정권의 브리핑문화의 소산에서 생긴 타성 인지, 퀴즈문답이나 암기위주 단답식 입시지옥의 연장일까? 공정성 을 전제로 한다해도 문답하는 시간 길이의 다양성은 두시간 내에 서 얼마든지 확보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토론의 초점이 노·이후보 양인에게 맞춰져 있다면 아예 정직하게 두사람의 대결로 제한해도 좋을 것이다. 인신공격은 아 니더라도 서로의 약점들추기에 급급한 노·이후보 사이에서 정강 정책발표의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한 것은 권후보일 뿐이었다. 한 마디로 이번 토론은 민노당 정책발표에 노·이후보가 들러리를 선 셈이 되고 말았다. 노·이후보의 언어는 ‘낡은 정치청산’ ‘부패정권청산’이라는 기존 구호의 쳇바퀴에서 한치도 벗어남 이 없었다.

내가 대기실에서 노후보와 악수를 나눴을 때 노후보는 “긴장됩 니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이후보는 인해장벽을 뚫고 들어간 나를 반기면서 ‘공진단(拱辰丹)’이야기를 했다. 몇년전 우연한 계기에 내가 이후보의 맥을 짚어준 적이 있다. 그때 김 종필 총재가 녹용·사향이 들어간 공진단을 먹고 건강을 유지한 다는 소리를 듣고 당신도 먹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태양인에 가까운 선생체질에 태음인 약인 공진단은 독이 되니 당장 끊으 라고 권유했다.

내 말대로 약을 안먹으니까 오히려 건강이 좋아졌다고 했다. 이 후보는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토론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청문 회스타인 노후보는 TV에 나올수록 유리하다는 예측은 최소한 이 번 토론에 한해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잃은 것은 없지 만 얻은 것 또한 별로 없는 것 같다. 단답식 선(禪)문답에후보는 노후보는 익숙지 않은것 같다. 그에 비하면 TV화면에 약하다는 이 후보는 그래도 선전한 느낌이다. 그러나 대세를 흔들 수 있는 어 떠한 빌미도 잡지못했다. 현 흐름의 고착이라면 이후보에게는 바 람직한 것이 별로 없다.

노후보는 초장에 좀 흠칫했다. 단일화문제에 대한 이후보의 공격 에 노는 보다 확실한 대처를 했어야 했다. 합당이 아니라 후보만 단일화한 것이므로 정책까지 단일화할 것은 없다고 변명한 것은 좀 박약한 펀치였다. 나였다면,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토론을 통한 신사적 단일화 합의 그 자체가 이미 낡은 정치의 청산이며 새로운 이념의 출발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했을 것이다. 미군철수 에 대한 과거의 주장을 지적한 자리에서도 초선의원때 잘 모르고 저지른 실언이었을 뿐이라는 식의 변명은 정당치 못하다. 당시 나의 주장은 정당한 판단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러한 판단을 내리 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성숙했다고 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성장 과정을 서술했어야 한다. 이후보의 ‘극장불’의 비유도 매우 치졸한 것이다. 불은 절대적 사실이다. 물론 꺼야 한다. 그러나 도청은 인간의 관계 항목에 서 성립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그것은 그 관계 항목을 밝혀야만 성립하는 사실이다.

전체를 관망해 보건대 이러한 대화의 장이 재미없다는 이유만으 로 우리는 냉소적인 정치불신을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사회는 분 명히 이런 재미없는 재미를 통해 밝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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