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철학은 질문하고 미학은 답한다. 철학은 한 마디로 “왜 사느냐?”는 질문이고 미학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사랑하니까”다.

“왜 사느냐?”

“사랑하니까!”

예서 시작하고 예서 끝난다. 그 바깥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 모든 이야기들은 이 하나의 문답에 다양하게 칼라를 입혀 풀어놓은 것이다.

철학으로 시작하고 미학으로 완성된다.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것이 전부다. 처음부터 끝까지다. 이 안에 모두 갖추어 있다.

철학은 물고기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근원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것이다. 근원에서 신의 완전성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다.

그 다음은? 그 완전성이 내 안에 갖추어 있음을 알아채고 그 완전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내 자유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강한 개인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 자유의 이름으로 나만의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것이다.

나의 자유만큼 너의 자유가 있으며 서로는 서로의 정원을 방문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는 것이며 그것이 인생의 전부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미학이다.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인생의 해답이다.

신이 완전하므로 인간도 완전하다. 그 완전을 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끌어내어진 완전에서 자유가 얻어진다.

온전한 자유에서 거룩한 만남이 얻어지는 즉 사랑이다. 그 사랑을 멋지게 연출하는 것이 미학이다. 그 방법으로 신이 인간에게 던져준 질문에 답한다.

깨달음에 대한 논의는 많았으나 네거티브였다. 즉 부정어법을 쓰는 것이다. 이 방법은 철학적 질문일 뿐 미학적 답변이 아니다.

옛 선지식들은 부지런히 질문하여 무지를 드러낼 뿐 답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미학이 없는 철학은 공허한 것이다.

철학자가 인상을 쓰고 우수에 젖어 우울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뭔가 있어보이기는 하나 아름답지 않다.

신, 진리, 재현, 자유, 강한 개인, 사랑, 완전, 미학, 의미, 가치, 깨달음, 관계망, 소통, 역사, 문명, 만남, 동반, 밸런스, 패턴, 울림과 떨림.. 나는 이런 포지티브한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쓴다. 부정이 아닌 긍정의 언어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안다 하는 사람들은 이런 단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진리, 사랑, 신(神) 이런 단어는 사실이지 금기시 되어 있다.

질문할 때는 지났고 이제는 답할 때가 되었다. 용기있게 이런 단어들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언어란 혼자 쓴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써줘야 소통이 된다. 신비님이나 아제님께 제안하는 바는 달마을이 이런 긍정의 언어를 유통시키는 진원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왜 사느냐?", "사랑하니까!" 이 예정된 질문과 답변을 조금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배달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욕망 때문이다. 욕망이라면 일단 생물학적 본능에 기초한 원초적 욕망이 있겠고, 환경과의 교감에 의한 사회적 성격으로서의 후천적 욕망이 있겠다.

진정한 것은 완전에 관한 욕망이다. 즉 어떤 것을 그 자체로서 완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한송이 꽃을 꺾어서 그 꽃을 내가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꽃에 걸맞는 시(詩) 한수를 던져줌으로써 그 꽃의 가치를 완성시키겠다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사랑이다.

저 절벽에 핀 한송이 꽃을 기어코 꺾을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의 존재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 시(詩) 한수를 던져줄 것인가?

꽃을 꺾는다.. 물질적 소유 위주의 서구적 사랑법

꽃을 바라본다.. 무소유의 동양적인 사랑법

꽃의 분위기에 걸 맞는 시(詩) 한수를 던져준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

본능적인 욕망과, 감성적인 욕망과, 이성적인 욕망이 있다. 자아로 말하면 본능적 자아와 감성적 자아가 있는가 하면 이성적 자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성적 자아가 등장할 때 감성적 자아는 모습을 감춘다는 점이다. 감성적 자아가 등장할 때 본능적 자아는 모습을 감춘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라깡류의 본능적 자아에 대한 논의는 의미없고, 또 에리히 프롬 류의 사회적 자아에 관한 논의도 역시 의미없다.

본능적 자아 - 성욕, 식욕과 같은 생물학적 욕망

감성적 자아 - 부끄러움과 떳떳함, 자연스러움과 어색함. 타인과의 비교판단.

이성적 자아 - 주어진 일을 미학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의지.

꽃을 꺾는 행위가 본능적 자아의 발로라면, 꽃을 바라보는 일은 감성적 자아의 발로이고, 꽃에 걸 맞는 시 한 수를 던져주는 일은 이성적 자아의 자유로운 실천이다.

깨달음을 논함에 있어서 비우라 혹은 버려라는 말은 말, 곧 무(無), 멸(滅), 허(虛), 공(空), 비(非), 불(不), 유(柔)들은 낮은 단계의 욕망이라 할 본능적 자아와 감성적 자아를 버리라는 말이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라 말은 완전에 관한 욕망, 즉 이성적인 자아를 획득하라는 말이다.

비워야겠지만 모든 비우기는 더 높은 레벨에서의 만나기를 위한 비우기다. 만남이 없는 비움은 의미없다. 이성적 자아를 획득하지 못하는 본능적, 감성적 자아의 버림은 의미없다.

버리기로는 평정심에 도달할 뿐 신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더욱 의미를 배달하기와 가치를 실현하기에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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