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각은 바꾸기 어렵다. 인간은 진화하되 진실을 알기 위한 방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는 많은 일들이 실제로는 나의 생존을 위한 정밀한 방어장치로 작동되고 있음을 깨우칠 일이다. 어린이는 다르다. 엄마의 온전한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린이가 부모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엄마의 젖에 독이 들어있지나 않을까 의심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면?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일이다. 생존모드의 경계심을 풀고 순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가 순수할 수 있는 것은 엄마와 내가 하나임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 순수할 수 있다면 신의 완전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대 안의 무의식적인 방어장치를 해제해야 한다. 생존모드에서 창조모드로 바꿔주어야 한다. 한때 엄마 품에서 아기였던 그대 신 앞에서의 아기로 되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어린이는 욕망한다. 호기심을 가지고 스스럼없이 대상에 다가선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접촉하는 순간의 번쩍이는 전율을 좋아라 한다. 좋은 것을 좋아하기다. 모든 좋은 것은 스스로 완전한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것에 끌리는 법이다. 풀은 자라지만 꽃을 피움으로써 완전하다. 풀의 성장은 거기서 정지해도 좋다. 나무는 자라지만 열매를 맺음으로써 완전하다. 나무의 성장은 거기서 멈추어도 좋다. 풀은 꽃을 피움으로써 벌과 나비와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나무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더 큰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모든 좋은 것은 스스로 완전한 것이며 완전한 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을 준비를 갖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곧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하는 것이며 곧 자기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그리고 더 나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은 완전을 욕망함이며 완전은 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완전이다. 더 큰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선 까지 자신을 성장시켜 나갈 일이다. 거기서 더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완전은 없다. 사랑이 희생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완전한 것을 좋아하고 또 만나는 것을 좋아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만남을 통해 완전해지는 까닭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만날 준비를 갖추는 일이다. 세상 전부와 순조롭게 만날 수 있도록 그대 자신을 향상시켜 나갈 일이다. 덧글.. 결국 가치관을 바꾸자는 건데 인간의 가치관을 바꾸기란 참으로 어렵소. 그대 인생에 있어서 만남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소? 우리는 그저 마주칠 뿐 만나지 못하오.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오. 자연과 세상과 신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오. 자신을 방어하려 들기 때문에 그러하오. 악착같이 살아남아 생존하려 들기 때문에 그러하오. 후손을 남기려하기 때문에 그러하오. 여기에 신대륙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소. 위험천만한 그곳으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중간쯤 읽다가 책을 덮어버린 때는 이십수년 전의 어느 날이다. 묘한 반감을 느낀 것은 어느 일본 문인의 글을 동양정신의 본령으로 표현한데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만남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널리 소통하기 위하여 ‘언어’를 만들어 가는 학문이다. 예수는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확장했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라는 말을 창안했으며 ‘인의’의 공자, ‘열반’의 석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기존 단어의 새로운 사용법을 창안하고 전파한 거다. 그 단어가 널리 쓰여지면 인류에 기여한 셈이 된다. 달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고 그 의미를 확장하는 방법으로 인류에 기여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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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달마방이라는 같은 게시판 하나를 공유하므로 소통할 수 있듯이 소통을 위해서는 반드시 약속된 사전공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그 약속을 우리는 가치라 부른다. 그 가치를 내 안에 반영하는 것을 우리는 의미라 부른다. 우리는 가치라는 소프트웨어를 내려받아 의미라는 PC에 설치하므로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소통한다는 것은 의미를 배달한다는 것이고 의미는 가치의 반영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며 가치는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유도되는 것이다. 즉 만남이라면 둘 사이에 오고가는 1만 바이트의 패킷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PC에 ‘자유’라는 이름의 정보가 없다면 소통은 불발이다. 즉 소통을 위해서는 가치라는 이름의 사전약속, 의미라는 이름의 개인 단말기, 자유라는 이름의 주고받을 정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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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는 연기하지만 각본에 얽매여 있다.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자유는 그의 애드립의 한계까지다. 자유의 크기만큼 시청자와 만날 수 있다.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각자가 큰 자유를 가져야 한다.
PC통신 보다 인터넷이 이용자에게 더 큰 자유를 준다. 텍스트로 만나던 시대보다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만나는 시대가 더 큰 자유를 가진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크기가 만남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다.
나의 자유가 크고 님의 자유가 작다면 역시 만남은 실패다. 자유의 크기가 겹치는 크기 만큼 서로는 만날 수 있다.
동물은 자유가 좁으므로 진정 만날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 역시 자유가 제한된다. 직장 상사나 부하와 만난다면 역시 제한된다. 서로는 평등해야 한다.
사랑이란 가장 큰 자유와 가장 큰 자유의 만남이다. 같은 남성끼리 혹은 같은 여성끼리는 만남이어도 그 자유가 적다. 바운더리가 겹치므로 주고받을 정보가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으로 이성간의 만남 역시 일정부분 제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의 자유의 영역을 넓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에 치여서 혹은 가족에 치여서 혹은 다른 이유로 자신의 자유가 좁혀져 있다면 역시 진정 만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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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본래 하나였고 그 하나로부터 전개해 온 것이다. 지금 나뉘어 졌지만 애초의 하나와 연결되는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끈은 가치라는 끈이다. 그 끈을 내 안에 품는 것이 의미다.
우리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그 끈을 잡는 것이다. 그렇게 신과 만나는 것이다. 신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단히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깨달음의 방법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신의 계획에 참여하여 남들은 할 수 없는 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자유가 없으면 주고받을 정보가 없다.
의미가 없으면 정보를 주고받을 단말기가 없다.
가치가 없으면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공유되어야 할 사전약속(네트워크)이 없다.
신이 없으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즉 단말기도 네트워크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주고받은 것이 없는 것이다.
논리구조가 복잡한 곡일 경우,
화성의 구조를 먼저 파악한 다음 거기에 적당한 감정을 입히는 것이 맞는 순서라고 봄.
하지만 많은 음악가들이 주관적 감정으로만 해석하여 오역을 많이 하고 있음.
대가(세계에 몇명 안됨)들은 그런 오역없이도 주관적인 감정의 세계까지 표현함.
비대가(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조차)들은 대충은 맞지만 군데군데 부실함.
논리구조가 단순한 곡이나 낭만곡들은,
화성의 흐름 자체가 감정의 곡선을 묘사하도록 고안된것 같아서(혹은 우리가 그렇게 훈련이 되어 있어서), 곡을 익힐때는 동시진행이 될때가 많음.
어린아이들은 근육을 익히는 시간동안 동시에 감정 이입(화성의 흐름과 결부된)으로 기억을 하게 됨.
근육의 흐름 자체가 감정이입의 모습을 표현하므로
감정이입없이 근육만 기억할 수는 없음.
감정이입을 못하는 학생은 음악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질이 떨어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성 없어도 운동신경이 좋아 손이 빠르게 돌아가면 웬만큼은 할 수 있음.
레슨 열심히 받고 연습 미친듯이 하면...
위의 감정이입과 밑의 감정이입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
밑의 감정이입은 감정적 요소를 넣느냐하는 문제,
위의 것은 감정의 질에 관한 문제.
밑의 것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미숙하게나마 표현하려는 상태.
위의 것은 진리를 화성의 논리를 초월해서 완전한 설명을 하려는 상태.
그 사람들 중에는 김동렬도 있고, 인기좋은 라즈니쉬 부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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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는 화성과 감정의 순서는 맞으나,
어느 차원을 이야기 하는지가 섞여 있음.
내가 지난번 이야기 한것은 암기에 관한 것.
피아노를 배울때 근육과 화성과 감정이입은 부실한대로 항상 동시진행을 함.
그런데 어렸을때는(우리나라의 경우 고등학생정도까지) 암기할때 주로 근육에만 의존함을 의미. 그다음 단계에서는 화성에 대한 의식을 첨가하고 더 큰 차원의 감정의 질을 의식 대충 그런 순서로 보임.
글에서는
고등학생과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빼면 오히려 극점에서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아 설득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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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내서 헷갈려^^
하지만 그런거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