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낌없이 주는 나무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한 그루 사과나무였었나 보다.
첫 만남에서 나무는 소년에게 잎사귀를 준다.
소년은 잎사귀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그늘에서 논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나무는 훌쩍 커버린 소년에게 사과를 준다.
소년은 사과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다.
세 번째 만남에서 나무는 가지를 준다.
소년은 가지를 베어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다.
네 번째 만남에서 나무는 기둥을 통째로 내준다.
소년은 나무를 베어서 배를 한 척 짓는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을까?
다섯 번째 마지막 만남에서 나무는 돌아온 소년에게 그루터기를 내준다.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그루터기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네 번째 만남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으나...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이 장면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문장을 두고 작가는 많이도 망설였을 거다.
나는 작가의 망설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호하게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무에게는 아직도 내줄 것이 남아있고
소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기에.
한국의 TV드라마는
첫 만남에서 손을 잡고
두 번째 만남에서 팔장을 끼고
세 번째 만맘에서 키스를 하고
네 번째 만남에서 두 번 째 키스를 하고
다섯 번째 만남에서 세 번 째 키스를 한다.
일본의 TV 드라마는
첫 만남에서 섹스를 하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뭘 해야 하지?
한국의 TV 드라마가 인기있는 이유는
단계적으로 강도를 높여가는 전략을 쓰기 때문이다.
어제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면
뻔할 뻔자 오늘은 두 사람이 팔장을 낄 것이고
내일은 두 사람이 키스를 할까?
궁금증을 유발한다.
일본의 TV 드라마는
첫 번째 만남에서 갈데까지 간다.
첫 번째 만남에서 교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교환하고
두 번째 만남에서 할 일이 없어서
삐치고 돌아앉아 고뇌를 한다.
(일본 드라마는 침실장면이 적다. 첫 만남에서 모든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스킨십을 할 이유가 없다. 반면 한국 드라마는 오직 침실이 드라마의 목적인 것처럼 온갖 수단을 써서 조금씩 침실로 접근하여 가다가 결국 침실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 드라마는 사랑의 진행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 때문에 드라마가 사정없이 늘어진다. 반면 일본 드라마는 사랑 그 자체 보다는 사랑을 매개로 한 개인의 인격적 완성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사회부적응의 오타쿠족이 사랑을 매개로 사회에 적응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드라마가 쓸데없이 길게 늘어지지 않는다. 드라마적인 재미는 한국이 낫겠지만 뻔한 설정의 반복에 불과하다. 극의 수준은 확실히 일본이 높다.)
그러나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사랑은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사랑은 만나는 것이다.
우리 어떻게 만날 것인가이다.
우리는 무언가 주고받을 일이 있을 때만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신뢰 뿐이며
서로가 줄 수 있는 것은 허락 뿐이다.
사랑은 허락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온전히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첫 만남에 모든 것을 허락해 버리면
더는 허락할 것이 없다.
첫 만남에서 잎사귀는 물론 가지도 허락하고
줄기와 그루터기 마저 내주고 나면
두 번째로 만날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무는 소년을 변화시킨다.
나무가 하나씩을 허락할 때 마다
소년은 성장하여 더 큰 욕망을 나무에게 제출한다.
소년의 욕망의 성장은 소년의 정신적 성장의 증거다.
나무의 도움으로 하여 소년은 더 큰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나무가 행복해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듯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사랑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며
온전히 허락하는 것이다.
첫 만남에서 전부를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허락하기로 하여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실이지 나무는 첫 만남에서 모두를 허락한 것이다.
잎사귀를 주고 가지를 주고 줄기를 주고 그루터기 까지 다 내준 것이다.
다만 소년이 그것을 가질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나무는 다만 허락했을 뿐이다.
그러한 허락하기가 소년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소년이 성장하는 동안 나무도 성장한 것이다.
첫 만남에서 겨우 잎사귀를 허락할 수 있었을 뿐이었으나
두 번째 만남에서 가지를 허락할 수 있을 정도로 나무는 성장한 것이다.
소년의 사랑이 나무를 성장하게 촉매한 것이다.
서로는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의 허락하기로 하여 네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네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는다면
또 너의 성장이 나의 성장을 촉매하지 않는다면
정녕 네가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나 역시 달라질 수 없을 것이며
서로의 사랑은 실패다.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를 완성하기다.
사랑은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의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며
그러한 만남으로 하여
나를 변화시킴으로써 상대방도 변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성장하게 함으로써 상대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서로는 온전히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아직은 증명되지 아니한
지금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너의 미래까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존재가 만나는 형태로만 성립한다.
좋은 글씨는 종이와 먹의 만남이다.
좋은 도자기는 흙과 불의 만남이다.
종이의 마음과 먹의 마음이 서로를 다치지 않고
서로의 가치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새로운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 글씨의 미학이다.
흙과 불이 서로를 다치지 않고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의 가치를 완성하면서
새로운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 도자기의 미학이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서로는 만나되 서로를 손상하지 않아야 한다.
서로를 완성시키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만나지 않고는 예술이 아니며
만나지 않고는 사랑이 아니며
만나지 않고는 미학이 아니다.
만나지 않고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 만날 것인가이다.
표피로 만날 것인가 밀도있게 만날 것인가
우리는 늘 만나지만
진정 만남에 실패하고 만다.
먼저 자기 자신과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전부와 만나기에 성공할 때
자신의 전부를 들어 상대의 전부와 만날 수 있다.
당신은 먼저 자신의 전부와 만나기에 성공했는가?
깨닫기에 성공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