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학문의 역사
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상
과학의 이름 아래 우상은 파괴되었다. 우상이 머물렀던 자리는 이제 과학의 차지가 되었다. 낡은 우상은 새로운 우상으로 대체되었다. 우상이 죽은 시대에 최후의 우상은 과학일 터이다.
21세기 이 문명한 시대에 가장 어두운 곳은 학문이라는 이름의 등잔불 아래이다. 학문의 엄정성이라는 성역에 숨어 오늘날 과학은 날로 신비화되고 있다. 과학이 종교가 되고 과학이 도그마가 되었다.
과학이 신비화되고 우상화 될수록 인간에게서 멀어진다. 기어이 학문이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본래의 학문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자(朱子)의 대학(大學)은 학문의 목적 세 가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첫째 덕(德)을 밝히는 것이요, 둘째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셋째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인간 중심으로 보는 학문관을 의미한다.
오늘날에 와서 학문의 목적은 무엇일까?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려 들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테크닉은 얻었으나 그 본래의 목적은 잊혔다. 학계의 풍토는 거칠어졌고 정신은 황폐해졌다.
나는 오늘날 학문의 목적이 일천 년 전에 대학(大學)이 밝힌 바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 진리의 완전성을 밝히기, 둘째 인간을 새롭게 하기, 셋째 진리와 인간의 대화를 통한 공동체적 이상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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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치를 추구한다. 진(眞), 선(善), 미(美)의 가치들이 알려져 있다. 셋이 별개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의 가치가 시작하고 전개하고 완성함이다. 씨앗 뿌리기가 진이면 거름 주어 키우기가 선이고 꽃 피우기가 미다. 거짓 씨앗은 싹 트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이어야 한다. 부지런한 가꾸기가 아니면 자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이어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 한 떨기 아름다운 꽃으로 완성된다. 마침내 미에 도달한다.
학문도 이와 같다. 먼저 진리의 완전성을 밝힘으로써 학문은 시작하고 다음 인간을 새롭게 하기로 학문은 전개하고 최종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을 아름답게 완성함으로써 학문은 완성된다.
이는 자연의 진리로부터 유도된 하나의 가치가 인간 개개인의 각성을 거쳐 공동체 삶의 양식에 반영되는 과정이다. 자연의 진리≫개인의 깨달음≫공동체의 완성이 모두 한 줄에 꿰어져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이다. 인간이 학문의 주인이어야 한다. 인간이 소극적으로 자연의 사실을 관측하는데 그쳐서 안 된다. 자연의 진리를 인간에게로 끌어와서 인간 자신에게 내면화시켜야 한다.
공자나 노자 혹은 석가나 예수가 옳은가의 여부는 공자나 노자 혹은 석가나 예수가 그려낸 이상주의가 21세기 이 시대 기준으로 보아도 여전히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판명된다.
그 인간의 공동체를 떠났을 때 소크라테스의 진리, 예수의 부활, 석가의 윤회,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의미가 없다. 남이 모르는 사실을 하나 더 안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개인의 앎들이 모여 인류의 집단지능을 이루는데 의미가 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완성시키는데 이바지함으로써 학문은 비로소 의의를 갖는다. 인간을 새롭게 하는데 보탬이 되지 않는 앎은 가치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는 학문의 본래 목적을 잊어버렸다. 오늘날 학문은 사제계급을 양산하는 라이선스 사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학문이 인간을 차별하여 계급의 표지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학문에서 인간이 배제되니 학문은 대중이 접근해서 안 되는 소수 전문가 집단의 비밀스런 테크닉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학문과 대중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해체되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학문을 회복해야 한다.
학문의 인간화를 가로막는 학자집단, 학자면허, 학자신분은 없어져야 한다. 학문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인간이 학문에 종속되어서 안 된다. 학문이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된다면 우리의 21세기는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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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시작 단계에서는 진을 추구한다. 그것은 공자 가로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그것과 같다. 전개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선을 추구한다. 선은 공동체의 공동선이다.
대의와 명분을 밝혀 학문의 성과를 공동체의 성원 모두에게 되돌리기다. 학문이 완성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미를 추구한다. 미는 양식의 완성이다.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만들고 이를 널리 전파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학문이 인간의 삶 깊숙이 침투한다. 인간 자신에게 내면화 된다. 공자가 처음 유교주의 모델을 만들었을 때는 이러한 구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개념은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학문이 인간을 배제하니 종교가 학문의 역할을 대리한다. 학문의 궁극이 삶의 양식을 완성함에 있을진대 오늘날 삶의 양식은 2천 년 전 나사렛 사람 예수가 창안한 기독교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양식을 창안했으나 정치적인 이의제기에 불과하다. 깨달음이 없고 소통이 없으니 양식화에 이르지 못한다. 물질의 운동원리가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 인간 내부에서 동기를 찾아야 한다.
아름답지가 않다. 멋이 없다. 질서가 있되 가치가 없다. 그것으로는 인간을 유혹하지 못한다. 불완전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물리력이 아니라 동기부여다. 깨달음이다. 개인의 각성이다. 각성된 개인의 집단지능이다.
유교주의가 사단칠정을 논함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려는 학문의 자세이다. 하늘의 본성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인간의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유도하고 이것을 다시 사회의 삼강오륜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투박하지만 ‘하늘의 법칙≫인간의 욕망≫사회의 양식’으로 유도되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중심의 진보주의 사상에는 이러한 유도과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이론적으로 부실하다. 인의예지란 무엇인가? 자연의 운동원리인 원형이정에서 질서를 포착함이 의(義), 미를 발견함이 예(禮), 가치를 발견함이 인(仁), 합리성을 발견함이 지(智)다. 물론 이러한 전개는 논리가 아닌 직관에 의존했으므로 투박하다.
마르크스주의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유물론과 소외이론, 혁명이론은 각각 자연의 진리, 인간의 깨달음, 사회의 양식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있지 않다. 별개의 동떨어진 주장이다. ● 자연법칙-인간본성-사회변혁 ≫ 원형이정-인의예지-삼강오륜 ≫ 유물론-소외이론-혁명이론
모든 이론은 자연-인간-사회의 셋을 한 줄에 꿰어내는 데서 체계가 갖추어져 이론적으로 완성된다. 비로소 ‘주의’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모든 학문은 세상을 바꾸는데 의미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자연법칙을 규명하지 못하면 힘이 없으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개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으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과연 마르크스주의는 자연법칙을 규명했으며 이를 토대로 개인의 동의를 구하는데 성공했는가다.
서구의 진보한 과학이 자연의 법칙을 규명하되 그것을 인간에게로 가져오지 못함이 서구정신의 한계다.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서구사상의 뿌리라 할 기독교 사상의 한계와 닿아있다.
완전은 완전과 통한다. 완전한 자연에서 완전한 인간을 유도할 수 있다. 불완전하다면 통하지 않는다. 통하지 않으므로 유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 내부에서 완전성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인간과 사회 사이의 접점이 깨달음이다. 깨달음 없이는 가치가 죽고, 가치가 죽으면 미학이 죽고, 미학이 죽으면 동기부여가 없고, 동기부여가 없으면 이상주의가 없고, 이상주의가 없으면 변혁에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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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상가 중에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사람은 니체다. 니체의 삶이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로 전개된다. 실존주의는 자연의 환경과 인간의 가치 사이의 접점을 모색한다. 인의예지와 원형이정을 잇는 고리를 찾아내기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불안한 모색에 그쳤을 뿐 이상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기독교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노예근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인간의 내부에서 지극한 완전성을 찾아내지 못했다. 양식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들은 의심하고 회의했을 뿐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연의 완전성으로부터 개인의 깨달음을 거쳐 이상주의적인 삶의 양식을 유도하는 절차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이상주의 토대가 되는 미학을 구축하지 못했다.
미학이 없는 이상주의는 실패다. 깨달음이 없으면 가치가 없고 가치가 없으면 미학도 없다. 이렇게 사슬처럼 이어지는 연쇄적인 연역구조 중에서 하나의 고리가 빠져버리면 도미노가 일제히 쓰러지듯이 모두 실패한다.
인간이 우선이다. 개인이 완성되어야 한다. 개인이 스스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학을 세팅함에 의해 가능하다.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개인이 각자 제 위치에서 스스로 완성되지 않으면,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든 인간은 공동체 바깥에서 겉돌 뿐이다. 개인의 인격적 완성이 없이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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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朱子)의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지식 위주의 학문관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이 학문의 목적이어야 한다. 왕양명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를 주장한 것이 그러한 까닭이다.
● 진리의 발견-심즉리 ≫ 개인의 완성-지행합일 ≫ 양식의 완성-만물일체
삶의 싱그러움에 도달하지 못하는 지식 위주의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 왕양명이 그러한 이치를 알았다. 주자의 성학에는 미학이 없다. 왕양명의 심학은 성학에 결핍된 미학을 보완한다. 혜강 최한기의 기학 역시 그러하다.
학문은 어두운 동굴 속을 탐험하듯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두려움 안고 막연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보의 한걸음 한걸음에서 낱낱이 삶의 양식을 완성하여 제각기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고 향기를 전하는 것이다. 참된 학문은 인간 개개인을 완성하고 진정한 삶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전파하기 위하여 모델의 완성이 중요하다. 양식화가 중요하고 미학이 중요하고 깨달음이 중요하고 이상주의가 중요하다.
작더라도 동그라미의 완성을 보여줄 때 울림과 떨림으로 공명한다. 소통한다. 전파된다. 그럴 때 개인의 학문이 모두의 것으로 되돌려진다. 그러므로 먼저 미학적 완성에 대한 비전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되 연대기가 아니라 열전에 비중을 둠과 같다. 역사는 다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물음에 낱낱이 응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시대의 동그라미를 완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건들의 조각을 시간 순서로 나열함은 하나의 일이 시작되고 전개하고 완결하는 1 사이클의 전체과정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경우 후세를 위한 귀감이 되지 못한다. 본보기 되는 시대의 역할모델을 탄생시키지 못한다.
열전(列傳)은 역사를 쓰되 인간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중심으로 바라볼 때 그 역사의 호흡과 맥박이 드러난다. 후세 사람을 위한 본보기가 드러난다. 그 낱낱의 사건들 의미가 제 위치에 자리매김 된다.
진정한 학문은 무엇인가? 21세기라는 이 시대의 물음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이다. 막연한 사실의 파악이 아니라 21세기가 요청하는 답변, 나 개인의 답변, 우리 세대의 답변, 대한민국의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