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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629 vote 0 2008.12.30 (23:01:37)

 

만유의 아르케는 무엇인가?

선각자는 ‘만유의 아르케는 물이다’고 선언한 탈레스가 되겠다. 어원으로 보면 아르케(arche)는 ‘이끌다’는 뜻을 가진다. 무엇인가? 연역은 인과율에 기초하며 원인이 결과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arche의 어원은 한a 꼭지che로 우두머리(꼭지)가 이끈다는 뜻. ‘-che’는 모자cap, 장(章)chapter, 자본capital과 같다. 파생어로 목수tect를 이끄는archi 건축가architect, 나라를 안an 이끄는archy 무정부주의anarchy가 있다.

원인과 결과로 이어진 연쇄적인 사슬구조의 연결고리가 아르케(arche)다. 그것은 만유를 ‘잇는’ 것이며 동시에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질서다. 코스모스다. 사물의 바탕에 내재한 근원의 질서가 있다.

● 만유를 이끄는 아르케는 물이다.

● 원인은 앞에서 이끌고 결과는 뒤에서 좇는다.

● 세상은 인과관계라는 사슬구조에 의해 연역적으로 전개한다.

● 다양하게 전개된 세상이 인과관계에 의해 하나의 보편질서로 통일된다.

탈레스의 언설은 짧지만 거기에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만유는 물이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물의 성질 하나로 참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사물을 끌어다 이론을 풀어내는 이러한 설명법을 가탁(假託)이라 한다.

뒷사람이 탈레스의 설명법을 본받아 다양하게 응용한다. 피타고라스는 ‘만유의 아르케는 수(數)다’고 말했고 프로타고라스는 ‘만유의 척도는 인간이다’고 말했고 플라톤은 ‘만유의 아르케는 이데아다’고 선언했다.

탈레스는 물의 성질 하나로 세상을 꿰뚫어 보았다. 물은 흐른다. 역사도 흐른다. 물은 생물을 생장시킨다. 인류문명도 성장한다. 물은 하늘과 땅 사이를 순환한다. 문명도 1 사이클의 순환구조를 가진다.

물은 다양한 지류를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바다로 이어져서 크게 통한다. 인류문명은 다양한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크게 보면 하나의 보편적인 인류문화로 종합되고 있다.

탈레스의 물에는 많은 진리의 특성이 숨어 있다. 그 물은 동양에서 노자가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말할 때의 유를 의미할 수도 있다. 넓게 보면 석가의 중도(中道), 공자의 중용(中庸)과도 통한다.

세상이 물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 생뚱맞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물의 어떤 속성을 들어 이야기한다면 대부분 수긍할 것이다. 탈레스의 가탁은 물이 아니라 물의 어떤 속성을 끌어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로 상징되는 생명성이다. 그리고 그 생명현상이 만들어 내는 ‘질서’다. 그것은 무엇인가? 일이다. 가장 단순한 원리로 세상 모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설명하려면 일로부터 풀어가야 한다.

● 세상은 일이다. - 세상은 물이다.

● 일은 진행한다. - 물은 흘러간다.

● 일은 순환한다. - 물은 순환한다.

● 일은 출발점을 가진다. - 물은 발원지를 가진다.

● 일은 원인에서 결과로 진행한다. -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 일은 강하면서도 부드럽다. - 물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 일은 피드백 기능을 가진다. - 물은 자정기능을 가진다.

● 일은 성과를 축적한다. - 물은 생명을 성장시킨다.

● 일은 기세를 가진다. - 물은 급류를 탄다.

세상 모두를 하나의 그릇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단순한 하나의 원리로 모두 설명하기. 탈레스가 이 방식을 처음 시도하였다. 전부 한 줄에 꿰어내기다.

탈레스의 아이디어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플라톤과 디오게네스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가 그를 그리스 최고의 현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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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정신의 바탕에는 크게 두 가지 커다란 연역적 발상법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출애굽 사건이다. 둘은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개념이다.

코스모스의 개념은 탈레스의 물로, 피타고라스의 수로, 플라톤의 이데아로 발전하고 있다. 마침내 근대에 와서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회과학 이론으로도 발전하고 있다.

여기서 갈라진 다른 한 갈래가 카오스 개념이다. 이는 프로타고라스가 말한바 만유의 척도로서의 인간을 표상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니체의 생의 철학에서부터 실존주의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친다.

● 코스모스 - 원형, 신의 완전성을 표상한다. 성경의 창세기, 플라톤의 이데아. 탈레스의 물 1원론.

● 카오스 - 변형,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상한다. 프로타고라스의 만유의 척도는 인간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만유는 변화한다.

신(神)이라는 표현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덧붙인다면 여기서 신의 완전성은 진리의 보편성과 같은 개념으로 쓰인다. 자연이 가진 본래의 완전한 모습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코스모스에 근접하고 있다. 서구의 클래식 음악과 그 전통은 코스모스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서구인들은 고전음악 속에서 신의 완전성과 조화로움을 발견하고 찬탄하려 했던 것이다.

반면 그리스 신화들은 너무나 카오스적이다. 그들은 신으로 불리지만 실로 인간에 가깝다. 신이라면 결점이 없어야 한다. 결점투성이인 그리스의 신들은 차라리 니체가 말한 초인에 가깝다.

중요한 점은 그리스인들이 질서와 무질서를 사유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질서나 무질서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 과정에서 폭넓게 사유를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항하여 단결할 때는 질서가 필요했다. 올림픽 경기를 열기 위하여 전쟁을 중단할 때도 그랬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외부에서의 위협이 없어지면 도시국가들이 무질서한 상태로 경쟁을 벌이곤 하였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균형은 반도국가 그리스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무질서한 민주주의 해양국가 아테네가 질서 있는 독재정치의 산악국가 스파르타와 오래도록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에서 논리학과 수학이 발달한 것도 지정학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중국이라면 다르다. 황제가 등장하여 도량형을 통일하고 마차 바퀴의 규격을 통일하며 문자체계를 정비하는 등 질서를 잡아준다.

황토지대의 넓은 평원을 중심으로 정교한 도로망이 가동된다. 사통팔달하여 천하의 질서가 이미 확립되었으므로 중국인들은 더 이상 질서와 무질서의 문제를 사유하지 않게 되었다. 질서가 우선으로 결론이 났다.

절대권력이 편의주의로 문제를 해결해버린 것이다. 반면 산악국가인 그리스는 100여 개의 소국이 공존하며 끝없이 갈등했기에 질서와 무질서의 문제를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가 논리학과 수학의 발달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또 그리스식 민주주의 자양분이 되었다. 언제라도 그러하다. 갈등이 있는 곳에 사유가 있고 사유가 있는 곳에 진보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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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적 요소가 강조된 그리스 신화는 인간적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로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다. 아폴론은 코스모스에 가깝고 디오니소스는 카오스와 친하다.

아폴론은 신에 가깝고 디오니소스는 인간과 친하다. 아폴론은 클래식에 가깝고 디오니소스는 팝과 친하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함은 아폴론의 신성(神聖)과 대비되는 디오니소스의 휴머니즘을 강조한 바 되겠다.

● 만유의 아르케는 코스모스다.

● 코스모스의 반대편에 카오스가 있다.

● 코스모스의 질서는 신의 완전성을 표상한다.

● 카오스의 무질서는 만유의 척도로서의 인간을 표상한다.

● 신성과 인간성,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변증법적 대결로 설명할 수 있다.

질서와 무질서, 원형과 변형, 완전성과 불완전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역사이래 인간의 모든 갈등은 신의 완전성을 엿보려는 클래식적 가치와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대중적 가치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카오스라는 표현은 오해될 수 있다. 카오스가 곧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에 숨은 그것은 가치다. 신의 완전성을 반영하는 질서와 그 질서에 다가서려는 인간의 가치가 변증법적 대결을 이룬다.

서구의 사상사는 신성(神聖)과 휴머니즘 사이에서 갈등한 역사다. 헤브라이즘이 신성에 기울었다면 헬레니즘은 휴머니즘에 기울고 있다. 중세의 교부철학이 신성에 기울었다면 르네상스는 다시 인문주의를 부활시켰다.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 이래 근대의 사실주의, 고전주의 흐름이 신성에 기울었다면 낭만주의, 인상주의 흐름은 휴머니즘에 기울었다.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신성에 기울었다면 21세기에 우리의 가야 할 길은 휴머니즘의 부활이다.

역사의 시계추가 신과 인간, 원형과 변형, 코스모스와 카오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시대정신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순환구조의 패턴이 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

하나의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하는 형태로 생산관계의 혁신을 요구하게 되며 이는 공동체에 새로운 질서를 요청하게 된다. 그때마다 역사의 시계추는 신성으로 기울어진다.

신성은 계몽주의를 낳고 계몽주의는 사회에 신질서를 요구한다. 계몽주의가 요구하는 신질서는 높은 효율성을 낳는다. 그러나 그러한 그 효율성의 추구가 인간의 가치를 희생시킨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신질서가 일정부분 인간 자신에게 내면화되었을 때 다시 인간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양식이 등장한다. 새로운 양식은 역사의 시계추를 다시 인간 중심으로 옮겨 놓는다.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 신기술 등장≫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추동하여 신질서의 요청≫ 계몽주의 출현≫ 주변부 이탈≫ 주변부와 중심부 사이에서 쌍방향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양식 출현.

이러한 흐름은 문화사, 양식사, 회화사, 음악사, 정치사에서 두루 관찰된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근대주의와 탈근대의 조류가 모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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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정신은 처음부터 인간성 쪽으로 기울어졌다. 동양에는 클래식 문화가 없거나 빈약하다. 클래식 정신의 출처가 되는 아폴론의 개념, 코스모스의 개념, 창세기의 개념, 출애굽의 개념이 약하다.

반면 서구는 클래식의 전통과 팝의 문화가 팽팽하게 대결하며 조화롭게 발전하고 있다. 신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헤브라이즘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헬레니즘이 변증법적인 대결을 이루고 있다.

동양정신에서 이데아의 세계는 출발점이 불분명하다. 만유의 아르케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논리학과 수학의 부실이 그 하나의 원인이다. 또 전제군주의 등장이 사상의 발전을 가로막은 점도 크다.

일본사에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에도시대 일군의 사상가 무리가 출현하여 중국의 제자백가와 유사한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근대사상과도 맥이 통하는 혁신적인 사상가도 있었다.

일본판 루소도 있었고 일본판 마르크스도 있었다고 한다. 유물론도 있고 존재론도 있고 인식론도 있고 언어학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사유는 근대적이었으나 그들의 힘으로 근대를 열어젖히지는 못하였다.

일본의 근대는 서구에서 수입한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표현을 빌린다. “메이지 정권은 근대를 서양에서 사들였다. 학문이나 기술의 형태로 수입한 것이다. 때문에 근대라는 어감에는 다분히 비싼 약이라는 이미지가 들어있다.”

그들은 근대를 외국에서 들여온 기계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근대의 양식을 자기 내면에 체화한 것은 아니다. 근대적이었던 일본 정신이 진정한 근대와는 연결되지 못하였다.

안도 쇼에키의 저작이 뒤늦게 발견되자 일본인들조차 ‘앗 우리의 조상이 이렇게 근대적인 사상을 만들어 내다니’ 하고 깜짝 놀라는 식이다. 그들의 저작은 훗날 다락방에서 발견되었을 뿐 당시의 일본은 봉건에 푹 절어 있었다.

근대는 보편적 세계질서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세계와 개인이 일대 일로 맞장을 뜬다. 세계와 나 사이가 직통으로 연결된다. 그 중간에서 소통을 방해하는 계급, 귀신, 우상, 신분, 차별과 억압은 제거된다.

● 근대는 거대한 소통이다. ≫ 근대는 세계와 나를 다이렉트로 연결한다. ≫ 세계와 나 사이에서 막아선 신분, 계급, 우상, 차별, 편견의 장벽을 제거한다.

봉건은 피라미드 구조다. 사회는 계급질서에 의해 낱낱이 구획되고 인간은 그 구획 안에 갇힌다. 세계와의 만남은 황제나 교부만의 특별한 권한이다. 개인은 어떻게도 세계정신과 만날 수 없다. 그것이 봉건이다.

근대란 세계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기다. 중간에서 개인의 시야를 가리는 일체의 장벽을 폐지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질서 그 자체를 탄핵하고 개인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도시대 일본의 자유로운 공기가 ‘개인’을 사유하게 하였으나 보편질서를 사유하지 않은 일본의 근대는 학자의 골방에서 시들어가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실학도 마찬가지다. 근대적이지만 그것이 근대는 아니다.

일본에서 남은 것은 죽음에 대한 찬미를 위주로 하는 사무라이 문화다. 일본의 인문주의는 쇼군의 칼 아래 굴복한 셈이다. 논리학과 수학의 부재 그리고 신의 완전성을 재현한다는 클래식 개념의 부재가 원인이다.

세계정신을 사유하지 않는 인문주의는 뿌리내리지 못한다. 중국에도 논리학과 수학이 있었지만 맹아 단계에서 좌절하였다. 죽림칠현이니 청담사상이니 하는 남조시대의 인문주의는 세기말의 퇴폐주의로 흘렀다.

중국인들에게 아폴론적인 영감을 던져주어야 했던 클래식한 견해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중국의 탈레스, 중국의 피타고라스, 중국의 플라톤들은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다. 세계정신을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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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럽에서 되는 것이 중국에서는 안 되는가? 이는 중국에서 되는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 백화제방이 일본에서는 맹아 단계에서 사멸한 이치와 같다. 일본 열도는 문명의 크기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다.

세계정신은 보편적 질서에 대한 사유다. 일본은 면적이 좁다. 그러므로 질서에 도달하기가 쉽다.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인데 덴노가 혼자서 2천 년간 그 일을 대리해 버렸다.

대다수 일본인은 덴노에게 맡겨놓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사회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보편질서를 사유할 동기가 약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원의 황토지대에 농경지의 면적이 넓을 뿐 질의 깊이를 담보할 수 있는 지리적인 복잡성이 없다. 유럽은 아랍권과 아프리카권, 지중해권, 북유럽권이 피레네로 막히고 알프스로 나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으로 막힌다.

강과 사막과 바다와 숲으로 격리되어 독자적인 문명의 생장점들을 다수 보존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 문명은 그 격리된 다자를 연결하는 교통로에서 꽃을 피웠다. 문명의 본질은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을 육로로 잇는 교통의 요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일어난 문명이 아프리카와 유럽을 해로로 잇는 지중해로 옮겼다가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후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과정은 문명의 핵이 배후지를 찾아 이동하는 경로와 일치한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처음 문명이 일어났을 때 그 배후지는 이집트였고 문명이 이집트로 옮아갔을 때 배후지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이었다.

지중해의 섬으로 문명이 옮겨갔을 때는 그리스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가 배후지였고 문명이 이탈리아 반도로 옮겨갔을 때는 이베리아 반도가 배후지였고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갔을 때는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가 배후지였다.

다시 아메리카 대륙이 새로운 배후지로 떠올랐을 때 그 교통로에 있었던 영국이 전성기를 구가했고 지금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간 문명은 중국과 러시아, 인도를 새로운 배후지로 선택하고 있다.

문명의 핵이 유럽에 있을 때 영국이 배후지인 아메리카와 중개하면서 강자가 되었듯이 문명의 핵이 아메리카에 있는 지금은 한반도가 새로운 배후지로 떠오르는 중, 러와 중개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있다.

● 문명은 핵과 배후지를 잇는 교통로에서 발전한다. ≫ 문명은 새로운 배후지를 찾아 끝없이 이동한다. ≫ 문명의 교통로는 대륙과 해양 사이에 있다.

중국은 문명을 확산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갖지 못하였다. 지중해와 알프스와 피레네와 다뉴브강으로 조각조각 나뉜 유럽과 달리 황토지대에 인구가 집중되어 문명의 생장점들이 여러 개 존재할 수 없었다.

생물이라도 그러하다. 잡종들이 건강한 유전자를 보존하고 있다. 순종만 남으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 다핵구도의 유럽과 달리 단핵구도의 황하문명은 문명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구문명 또한 기독교 일변도의 문화적 패권주의가 문명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다. 아랍문명과 유교문명, 제3세계 문명 등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세계의 존재가 인류문명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한다.

유럽문명도 위기가 있었다. 중세 암흑시대가 그러했다. 단일종교의 억압이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효과를 냈다. 다행히 지리적으로 격리된 이탈리아 반도가 문명의 해방구 역할을 해서 르네상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알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 반도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자유의 공기는 프랑스와 독일을 지배하고 있던 신흥왕조의 지배자들을 위협하였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게르만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을 것이고 그 시점에서 문명의 해방구였던 피렌체는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 경우 르네상스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문명의 지속적인 생장을 위해서는 문명의 생장점들이 다수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시기에 소통할 수 있도록 반도와 섬이 징검다리 구실을 해주어야 한다.

유럽의 지정학적 환경은 절묘하다. 지중해와 반도와 섬이 곳곳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중국은 그렇지 않다. 중국은 주변에 지리적으로 격리된 반도와 섬을 거느리지 못했다. 알프스와 지중해가 없었다.

중국의 피렌체들은 그 자유의 공기가 전제군주들을 위협한 결과로 진시황과 같은 폭군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다. 한반도가 있고 대만이 있고 베트남이 있고 일본열도가 있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은 이웃해 있으면서도 지리적으로 적절히 격리되어 있다. 전혀 다른 언어와 전통과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 다름이 보배다. 다르기 때문에 소통해야 할 이유가 찾아진다.

다름이 소통을 욕망하게 한다. 다름이 동기부여가 된다. 다름이 문명의 생장점을 이루어 그 문명을 건강하게 한다.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사유의 기반은 유교주의에 의해 크게 공통되고 있다. 그러므로 소통할 수 있다.

바로 지금이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반도와 섬이 역할 할 때다. 중세 암흑시대에 유일하게 문명의 불씨를 보존했던 피렌체가 했던 일을 지금은 서울이 해야 한다. 동방문명의 르네상스가 있어야 한다.

서구는 죽어가고 있다. 침략자 부시의 폭정을 보라. 인간의 상상력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다를 바 없다. 옛날에 많았던 서구문명의 생장점들은 점차 사멸하여 가고 있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지리적인 격리가 무의미해졌다. 그때 그 시절 아프리카가 다르고, 아랍이 다르고, 지중해가 다르고, 게르만이 달랐지만 지금은 EU로 통합되어 전부 같아졌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유럽이 낮을 때 아랍에서, 아프리카에서, 지중해에서, 인도에서, 신대륙에서 흘러든 물이 유럽에서 모여 꽃을 피웠다. 지금 그들은 높아졌다. 오만해졌다. 서구정신은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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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족 설화는 북방계 설화고 난생설화는 남방계 설화다. 한국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북방계 천손족 설화와 신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계 난생설화가 공존한다. 이것이 한국의 창세기라면 창세기다.

중국의 신화들은 신농씨, 축융씨, 여와씨, 복희씨, 반고씨 등을 말하고 있으나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중국사에는 창세기가 없거나 빈약하다. 중국사에는 출애굽의 드라마가 없다.

창세기는 무에서 유를 얻는 과정을 서사한다. 출애굽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국사는 언제나 약탈자들이 남의 것을 빼앗을 뿐이다. 중원의 대지는 비옥했고 물산은 언제나 풍부했다. 중국사의 영웅들은 단지 정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중국에서 하나의 국가 혹은 문명이 탄생하는 초기 단계에 대한 연역적 전개가 서사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개념을 사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만유의 아르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르케는 ‘이끌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끌어낼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중원에 물산이 가득 있었기 때문에 단지 달려가서 그것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다르다. 그들은 사막에 산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그들의 소망이다. 그들은 40년을 사막에서 헤매다가 겨우 그것의 일부를 얻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나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나치게 현실주의자, 실용주의자, 인간주의자다. 중국에서는 인간이 만유의 척도임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신의 완전성에 대한 탐구는 없었다. 중국사에는 너무나 많은 프로타고라스들이 있었다.

왜인가?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타게 찾을 필요가 없었던 거다. 중국에 없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정글로 사막으로 신대륙으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모든 필요한 것은 중국에 있다. 단지 그것을 차지할 뿐이다.

유교사상에 아폴론적인 요소가 상당하지만 서구에 비해서는 약하다. 유교는 신(神) 중심의 철학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철학이다. 그들은 신의 질서를 빌리기 위한 목적의 클래식한 관점에서 탐구하지 않는다.

중국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공자를 말하지만 나는 노자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강조한 질서는 주나라의 이상정치, 혹은 요순의 이상정치인데 이는 초기조건에서 멀어진 설계이다.

서구의 창세기가 아담과 이브가 탄생하기 이전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설명하고 있는데 비해 공자는 아담과 이브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문명시대의 사건을 연역의 제 1원인으로 삼고 있다. 이래서는 이데아가 되지 못한다.

한국 전통의 순장바둑이 약한 이유는 일본바둑과 달리 포석 단계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이미 아폴론에서 멀어진 거다. 초기 조건의 탐색이 부족하다. 이 방법으로는 충분히 연역적 사고를 전개할 수가 없다.

초기조건의 민감성에 주목해야 한다. 바둑의 첫 한 수가 이후에 올 많은 수의 상대적인 위치를 결정한다. 이 부분에 대한 탐색의 정도가 이후로 전개될 문명의 성패를 총체적으로 결정한다.

서구문명이 바둑의 첫 한 수를 잘 두었다면 동양문명은 포석을 생략하고 바로 중반의 전투로 진입하였다. 동양의 손자병법이 전투에는 강하지만 임기응변에 불과하다. 이는 설계도 없는 건축과 같고 나침반 없는 항해와 같다.

노자는 공자보다 늦은 시대의 인물이지만 공자가 말한 요순시대 이전의 초기조건을 탐색하고 있다. 공자는 지식인과 관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이지만 노자는 중국인 모두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 공자가 노자의 후배라는 설은 믿기 어렵다. 노자가 출생한 남쪽 초나라는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시골이다. 노자가 문자로 된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문명이 발전한 시대 사람이라면 노자는 공자보다 후대의 사람이어야 한다.

창세기가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듯이 노자 역시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 말씀이 데카르트의 제 1원인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이로써 기점을 삼아 인과율의 사슬에 아르케(arche)의 고리를 걸어 연역으로 전개한다.

노자의 언급은 간명하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이 한 줄로 성경의 창세기와 모세의 출애굽을 갈음한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이 약간 보충하고 있다.

장자 내편에서 혼돈지덕(混沌之德)의 우화는 그리스 신화에서 코스모스와 카오스 개념과 닮아 있다.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개념이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그는 직관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남해의 지배자 숙과 북해의 지배자 홀이 중앙의 혼돈을 방문하여 잘 대접받고 답례로 혼돈의 몸에다가 인간의 일곱 구멍과 같은 일곱 구멍을 뚫어주었는데 하나씩 구멍을 뚫어나가기 7일 만에 혼돈이 죽고 말았다.

인간의 몸에 있는 일곱 구멍을 건축에 비유하면 7개의 출입문과 같다. 문은 사람이 드나들기 위한 것이며 여기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혼돈의 몸에 질서를 부여했더니 혼돈이 본래의 신묘한 조화를 잃어버렸다.

장자는 코스모스가 아닌 카오스, 아폴론이 아닌 디오니소스, 원형이 아닌 변형을 지지하고 있다. 신의 완전성이 아니라 보다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에 대한 지지가 되겠다. 문명을 하나의 일로 보고 동기부여를 탐색한다.

도교주의는 너무나 인간적인 철학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만유의 척도는 인간이라고 말했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만유는 변화한다고 말했다면 노자와 장자는 처음부터 그러한 전제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질서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경험칙으로도 알 수 있다. 권위적인 질서가 일시적인 성과를 내지만 곧 주변부의 이탈로 인하여 더 큰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어떤 조직을 꾸리든, 국가를 건설하든, 회사를 창업하든 간에 처음 출발단계에는 강력한 질서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설계도가 필요하고 나침반이 필요하고 서열이 필요하고 리더가 필요하다. 일곱 구멍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직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국가가 잘 운영되고 있을 때는, 회사가 안정궤도에 올랐을 때는 약간의 비효율을 감수하고라도 개인에게 자유를 주고 재량권을 주고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경험칙으로 알 수 있다.

질서는 시스템의 최적화를 낳고 최적화는 자원을 100퍼센트 소모한다. 조직이 100퍼센트 가동될 때 외부에서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면 예비자원의 부족으로 환경변화에 대처하지 못하여 조직은 붕괴되고 만다.

안전한 변방에 자유라는 이름의 예비자원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환경은 부단히 변화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다음 시대의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 변방에 새로운 변혁의 씨앗을 뿌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정신이 낙후한 점도 있지만 인류문명 차원에서 보면 동양정신은 서구문명의 위기에 대비하여 남겨둔 예비자원이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대책 없는 충돌 앞에서 인류를 구할 희망은 유교문명의 지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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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애설의 묵자에 맞서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내 몸의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에 이득이 된다 해도 그 터럭을 뽑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역시 노자 사상의 계승이다.

여기서 천하(天下)의 개념이 문제로 된다. 천하는 곧 세계 보편질서다. 이는 음양(陰陽)의 질서로 출발하여 낮과 밤의 질서, 하늘과 땅의 질서, 임금과 신하의 질서, 강자와 약자의 질서, 남자와 여자의 질서로 다양하게 연역된다.

양주가 천하를 부정함은 코스모스를 부정한다는 것이며 곧 아폴론의 부정, 신의 완전성에 대한 부정, 클래식한 가치에 대한 부정, 지방정부의 중앙정부에 대한 부정으로 다양하게 연역된다.

오늘날 대다수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유교가 아닌 도교다. 그 사상의 기초는 철저하게 아폴론의 부정, 디오니소스의 긍정에 있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이 노자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크다. 커도 너무 크다. 대다수 변방 중국인 입장에서 자금성의 황제와 조정의 권력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그들은 차라리 체념한다. 도교적 관점에서 황제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중국인들은 니체가 말하기 2천 년 전에 이미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공자는 귀신을 멀리하라고 가르쳤고 석가는 무신론자다. 그 결과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변증법적 대결은 중국사에서 희미하게 되었다.

논리학, 수학과 같은 아폴론적인 학문은 중국에서 폄하되었다. 신의 완전성, 진리의 보편성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세계정신을 사유하지 않았고 이데아를 획득하지 못했다. 원형은 잃었고 변형은 넘쳐났다.

오늘날 중국의 드라마가 무협지다운 과대망상을 일삼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즐겨 도술을 부리고 둔갑술을 구사하며 비현실의 세계로 도피해 버린다. 니체의 초인이 신선의 이름으로 떼로 등장한다.

아세아에서 한류 드라마가 성공하는 이유는 한류가 유교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주의는 가부장적인 질서를 강조한다. 중국의 무협영화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부분이 바로 질서 개념이다.

한국은 좁다. 좁기 때문에 엄격한 질서가 있다. 중국은 다르다. 허다한 농민반란, 흉년에 나타나는 거대한 유랑민 무리들, 끝없이 반복된 북방 이민족의 침략이 중국인에게서 질서의 개념을 앗아간 것이다.

양반의 체면도 선비의 위엄도 소용이 없다. 흉년에 수백만 명으로 늘어난 유랑민 무리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 버리면, 북방에서 쳐내려온 몽골족이 한번 휩쓸어 버리면 모든 것이 제로상태로 변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돈 뿐이다.

육조시대 이래 끝없는 혼란과 거듭된 오랑캐의 지배로 해서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간 지식인들 사이에서 현실도피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청나라 지배하의 한족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인들은 신의 완전성을 부정하고 비전과 이상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 결과 클래식한 관점은 조명되지 않았다. 고전주의는 진작 죽었고 인상주의만 꽃을 피웠다. 남종화는 출발부터 인상주의다.

서구에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천 년 전에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인상주의 화풍이 자리 잡은 것이다. 기법과 배경은 다르지만 원형과 변형이라는 본질은 같다. 사실주의가 원형이면 인상주의는 변형, 북종화가 원형이면 남종화는 변형이다.

아폴론이 먼저 와야 한다. 원형을 먼저 이루고 다음에 변형이 도입되어야 한다. 원근법과 명암이론과 색채이론이 회화의 원형을 구성한다. 원근법이 발견되기도 전에 남종화가 등장했다면 본말의 전도다.

그 결과 동양정신은 지도 없이 여행을 떠난 셈이며, 설계도 없이 건축한 셈이며 나침반 없이 항해한 셈으로 되었다. 그 건축은 붕괴하고 그 여행자는 길을 잃고 그 항해는 실패하게 된다.

유교는 도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클래식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공자는 형이상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사후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공자는 실용주의자에 현실주의자였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초월적 세계를 바라보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이미 좁아져 있었다. 출발점을 잘못 찍었다. 더 높은 시선을 가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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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도 천하를 말하고는 있으나 공자의 천하는 세계의 보편질서가 아니라 정치분야에 한정되는 권력의 질서다. 천하의 이데아로부터 군신관계를 연역한 것이 아니라 군신 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천하를 끌어댄 것이다.

유교주의는 지나치게 실용적이다. 일종의 편법이다. 이렇듯 공자의 부족한 측면을 도교에서 빌려 보충한 것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고 주희의 성리학이다. 도교 역시 인간적이지만 그래도 도교에는 최소한의 우주론이 있다.

천자문은 천지현황 우주홍황 일월영측 진숙열장 한래서왕 추수동장의 순으로 전개한다. 먼저 하늘과 땅의 바운더리를 구획하고 있다. 인간의 시선이 닿는 끝단의 지점을 확인하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 울타리를 먼저 그려보는 것이 이데아의 관점이다. 태양이 왕이고 달이 신하면 별자리는 백성이다. 일월영측 진숙열장은 태양과 달 그리고 별자리의 운행으로 천하의 질서를 설명한다.

겨울이 갔는데도 봄이 오지 않는다면 곡식을 기를 수 없으니 인간이 살아갈 수가 없다. 한래서왕 추수동장은 그 질서들이 잘 파악되고 통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봄이 왔는데도 씨앗의 준비가 없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질서를 파악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학문이 필요하다. 천자문의 시작은 학문의 존재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천하의 보편질서를 빌려 그로부터 인간 사회의 권력질서를 일구어내기다.

천자문은 남조시대 양(梁) 나라 주흥사가 지었다고 한다. 남조시대는 도교 사상이 유행했던 때다. 중국의 문화 예술은 남조시대에 도교와 불교 영향으로 크게 일어나 당나라 때 꽃을 피웠다.

중국인의 정신세계는 이 지점에서 완성된 것이며 명, 청대를 거치면서도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남조시대의 화려한 중국문화를 만든 지식인들은 그 시대의 비주류였다. 이후 중국문화는 총체적으로 비주류 문화가 되었다.

공자는 사회의 권위적인 질서를 강조한 점에서 아폴론 지향의 고전주의적 태도를 보이지만 유교에는 우주론이 없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역의 음양론이 우주론을 대신한다. 그러나 약하다.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은 그런 점에서 유의미하다. 하늘의 원형이정과 인간의 인의예지가 통한다. 하늘과 인간이 소통한다는 착상은 클래식한 신의 완전성과 팝적인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된다.

동중서는 신의 코스모스와 인간의 카오스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하고 있다. 이는 상당히 진보한 사유가 된다. 중국에서 유교주의가 불교, 도교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중립적 태도 때문이다.

불교 역시 형이상학에 소홀하다. 인도사상에 형이상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인도에서는 형이상학이 크게 발달했다. 문제는 석가가 바라문교 전통에서 비롯한 인도철학의 형이상학을 상당부분 폐기해 버린 데 있다.

아쇼카왕 시대에 인도 전역에서 번성했던 불교가 점차 쇠퇴하고 힌두교가 발달한 이유는 중국에서 유교가 국가적으로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도교주의가 더 신앙된 이유와 같다.

형이상학이 없는 사상은 인간정신의 창발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원시적이고 조악한 사상이라 해도 인간은 결국 형이상학이 있는 쪽을 선택한다. 연역적 사유의 출발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재야 학계의 흐름을 보아도 유교보다 도교가 인기 있다. 김용옥의 동양학 강의라 해도 공자보다 노자가 더 재미있다. 도교의 형이상학이 세계와 개인을 다이렉트로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유교의 개인은 정치구조에 얽힌 시스템의 하부구조로서의 개인이고 도교의 개인은 세계와 맞선 개인이다. 자유주의 맹아가 있다. 그러므로 유교는 봉건을 극복할 수 없고 도교가 오히려 근대성이 있다.

불교도 이후 금강경에서 형이상학을 보완한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만유의 아르케는 물이다’라는 탈레스의 탐구보다 발전된 형태이다. 바둑의 첫 한 수가 아니라 상당히 진행된 중간단계의 싸움바둑이다.

학문의 첫 출발점을 어느 위치에 찍을 것인가? 포석 단계를 생략해서 안 된다. 건축가는 설계도를, 여행자는 지도를, 항해사는 나침반을 챙겨야 한다. 이데아가 있어야 하고 원형이 발견되어야 하고 코스모스가 서사되어야 한다.

● 도교 : 노자의 명가명, 장자의 혼돈 - 창세기의 말씀 혹은 그리스 신화의 코스모스와 카오스에 가깝다.

● 유교 : 요순과 주나라의 이상주의 - 시원이 되는 우주론이 아니라 문명이 발달한 역사시대 모델이다. 이러한 중간 모델로는 인간의 창발성을 자극할 수 없다. 일부 학자의 관심사일 뿐 대중적 인기가 없다.

● 불교 : 연기설과 색즉시공 공즉시색 - 리그베다의 웅대한 우주론이 강한 원시성을 보여주고 있는 데 비해 훨씬 발달한 시대의 고급한 이론이다. 창발성을 자극하기 어려운 중간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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