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이론이 필요하다
인간의 창발성은 보다 창세기에 가까울수록, 바둑의 첫 한 수에 가까울수록 그 원시적인 단순성으로 하여 강렬하게 자극된다. 그런 점에서 문명의 초기조건을 구성하는 시원이론이 필요하다.
학문의 출발은 연역이며 연역을 위해서는 애초에 출발점을 잘 찍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과학이 강조하는 경험과 관찰의 귀납은 원형을 찾은 다음 응용단계로 넘어갈 때의 필요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공자나 석가는 초반 포석 단계를 생략하고 문명이 충분히 전개된 시대에 제1원인의 연쇄적인 링크가 시작되는 기점을 찍었다. 노자의 기점은 부실했고 아폴론이 아닌 디오니소스에 기울어졌으니 본말이 전도되었다.
동양정신에는 신의 완전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데아가 부실하다. 우주를 통째로 담아내는 커다란 밑그림을 잡아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의 이상주의가 없다. 그림을 그리되 데생을 생략하고 바로 채색하는 격이다.
금강경의 착상이 놀라운 데가 있으나 MS도스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윈도우즈 버전을 발표한 것과 같아서 순서가 맞지 않다. 이 경우 소스를 공개하지 않은 셈으로 된다. 사유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출현이 불가능하다.
도스라면 누구나 손쉽게 응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지만 윈도우즈는 그것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실제로 MS의 윈도우즈 발표 이후 응용소프트웨어 시장은 거의 죽어가고 있다.
초기 단계의 설계를 드러내어야 한다. 만유의 아르케를 만천하에 공표해야 한다. MS 도스 이전으로 돌아가서 C언어의 원시성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야만 후학들에 의한 버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석가와 노자와 공자는 공통으로 소스를 공개하지 않고 결론부터 들이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석가와 노자, 공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잘못되어 버렸다.
동양에는 빌 게이츠가 너무 많았다. 쓰기는 편한데 업그레이드가 안 된다. 서구정신은 리눅스와 같다. 탈레스부터 마르크스까지 만인이 자신의 지식을 조금씩 보태어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플라톤이 했고, 플라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버전 업그레이드의 역할을 공자의 제자들과 노자, 석가의 제자들은 충분히 하지 못했다.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지 못하고 각개약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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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실패는 만유의 아르케를 탐구하지 않은 때문이다. 혹은 탐구했으나 강조되지 않았다. 또는 초기 단계를 생략하고 있다. 공자는 실용주의자요 현실주의자다. 그는 내세와 우주에 무관심했다.
공자는 귀신을 경원(敬遠)하라고 가르쳤다. 무책임한 태도이다. 자신이 모르는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 셈이다. 니체보다 앞서 생의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 노자다. 노자는 지나치게 인간의 삶에 집착했다.
석가는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형이상학을 부정했다. 물론 이것이 공자나 노자, 석가의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지나치게 많은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잘못은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은 후학들에게도 있다.
※ 마룬캬 존자가 석가에게 물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가 유한한가?” 석가는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 의사를 부르려는데 누군가가 이를 제지하며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권위를 가진 스승이 출발점을 찍어주지 않으면 후학들이 감히 스승이 거론하지 않은 더 앞선 단계를 토론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무례한 일이니까. 공자가 요순시대를 말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요순시대 이전을 말하지 않았다.
중국사상은 봉건왕조가 강조하는 유교주의와 민간에서 수용한 도교주의로 이원화되었다. 유교주의는 몰락하였고 도교 사상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 유교보다 도교가 더 창세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교는 합리적인 정치를 채택했고 도교는 실용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유교정치는 몰락했으나 도교문화는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교문화는 지금 한류에서 합리주의를 얻어 부족한 이데아론을 보충하려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창세기가 부실한 불교가 쇠퇴하고 형이상학이 탄탄한 힌두교로 되돌아가 버렸다. 석가가 마룬캬 존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원하는 해답을 구해 리그베다로 되돌아간 것이다.
동양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획득하지 못했다. 탈레스의 물 1원론이 없었다. 형이상학이 없이 실용학문으로 바로 나아간 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그 저변에는 도교의 지나친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MS의 윈도를 폐기하고 C언어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윈도의 편리함에 길들면 오류의 시정이 불가능하다. 자체적으로 소스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드물지만 그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쇠’와 같은 사람이 있다. 우직하게 도전하기다. 역사시대에 걸쳐 드물게 등장한 돌쇠들이 잘 만들어진 문명의 얼개를 통째로 부정하고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곤 했다.
누구인가? 그는 예수다. 예수는 문명이 발달한 로마시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시골사람이었다. 시골사람의 기백을 가지고 도시의 화려한 문명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용기 있게 맞섰던 것이다.
그는 발달한 로마문명의 화려한 설계도를 무시하고 창세기의 말씀부터 다시 시작한 자신의 설계도를 들이대었다. 문제는 둘 사이에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누구도 시골사람 예수를 설득할 수 없었다.
벽창호같이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꿋꿋하게 밀고 가는 사람, 죽어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 원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서구문명이 아랍권과 아프리카권, 지중해권과 게르만권의 지리적인 격리로 해서 오히려 다섯 갈래 문명의 물결이 마주치는 접점에서 빅뱅을 일으켰듯이 의사소통의 빅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격리와 단절이 필요하다.
부시맨이 문명세계에 나타남과 같다. 문명인들은 부시맨을 겁주려 하지만 부시맨은 문명사회의 모든 가치를 완벽하게 부정한다. ‘저 도시와 건물과 화폐들이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당혹스럽다.
문명인의 호의에 대한 부시맨의 단호한 거절은 인류문명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영화 부시맨의 주인공 니카우는 고집스럽게 저항하여 원시의 세계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문명인이 쥐여준 달러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누구인가? 노자다. 당시 중국 화북지방은 도시가 발달하여 있었다. 제자백가가 출현하여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다투고 있던 때다. 그러나 노자는 미처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남쪽 초나라 시골사람이었다.
그는 도시를 부정했다. 국가도 문명도 부정해 버렸다. 심지어는 수레의 이용도 반대했을 정도이다. 그는 문명세계에 나타난 부시맨과도 같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시골사람의 기백을 가지고 단호하게 문명에 맞섰다.
그는 도시와 국가와 문명과 제도와 시스템을 완벽하게 부정했기 때문에 문명의 초기조건을 탐색할 수 있었다. 길들어서 문명과 타협을 시작하는 순간 만유의 아르케는 생각해 볼 수 없게 된다.
누구인가? 당나라 때의 육조 혜능이다. 그는 진정한 돌쇠였다. 그는 확실히 부시맨이었다. 그는 아예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자를 학습하기를 거부했다. 글자에 의존해야 하는 지혜라면 가짜라는 식이다.
참된 진리는 문명의 초기조건을 구성하는 법이다. 초기조건은 단순해야 한다. 강한 원시성을 내포해야 한다. 신의 완전성을 표상하는 진리가 복잡한 이론일 수 없다. 참된 진리라면 언어와 문자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혜능이 도교 사상에 기반을 둔 전혀 새로운 불교를 창시한 것이 선종불교다. 비로소 중국에서 불교가 대중화되었다. 디오니소스적인 자유로움과 철학사상의 지적인 향기를 동시에 지닌 채로.
기독교가 창세기의 원시성으로 하여 초기조건을 안내하고 있지만 종교적인 한계 때문에 닫혀 있다. 해석의 문이 열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선종불교의 자유정신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인류와 교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창백한 낯빛을 하고 어두운 도서관의 책더미에 갇혀 있다. 그들에게 시골사람 예수의 기백이 있을 리 없고 노자의 호연한 기상과 혜능의 자유주의가 또한 있을 리 없다. 이래서는 죽은 지식이다.
이 시대는 다시 시골사람 육조 혜능을 필요로 한다. 촌사람 노자를 필요로 하고 시골에서 온 예수를 필요로 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를 외쳐줄 문명사회의 부시맨을 필요로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런 사람이다. 월든의 소로우도 그러한 사람이다. 문명의 시원으로 되돌아가서 초기조건을 탐색하고 온 사람들이다. 문명의 바깥세계 가장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지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