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까?
‘운명적인 만남’과 ‘운명적인 기회’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운명’이라 믿고싶은 ‘생각’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대가 ‘운명’이라 느끼는 여인을 만났다면, 당신은 이전부터 여인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인간은 보고싶은 것을 보고 듣고싶은 것을 듣고 생각하던 것에 반응하게 되어있다. 당신이 취업준비생이라면, 주변에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들,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 취업과 관련된 뉴스들이 눈에 들어 올 것이다.
주변에 유난히 결혼하는 커플이 많이 보인다면, 당신은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빵집을 잘 찾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피시방을 잘 찾는 것과 같으며 당신이 자동차를 교체 할 때마다 같은 차종의 자동차가 길거리에 많이 보이는 현상과 같다.
이는 '시크릿'에서 막연하게 이야기 되어지는 ‘끌어당김의 법칙’ 과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당신이 무언가를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만듬으로써 그저 당신이 그것을 알아 본 것이다. 내게 끌어당겨졌다는 무언가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극장에서 ‘본 투비 블루’를 보고 ‘트럼펫’에 관심을 두었더니 길거리에 트럼펫을 손에쥐고 걸어가는 노인이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나의 인생이 가장 불행하다.’ 는 무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 갔더니 사람들 얼굴에 생기가 없고 바쁘기만 하더라.’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의 인생을 바라보라. 혹 그게 ‘자신’이었다면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유를 갖길 바란다. 삶에서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서울과 같은 바쁜 도시에서도 여유있는 사람들을 보기 마련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당신이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며 ‘운명’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다. ‘운명'을 '정해진 것’ 이라 '생각' 한다면 ‘인생’은 참 쉽다. 어떠한 행위를 해도 ‘운명 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회피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함이다.
‘운명’ 은 ‘만들어가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