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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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9051 vote 1 2008.12.30 (22:49:02)

나란 무엇인가?

인간이 추상적 사고에 약하다는건 큰 문제다. 칸트 철학이 난해하다 해도 한 줄로 요약된다. 헤겔이나 니체라도 마찬가지. 완전성이 있다. 예전에는 그걸 신에게서 찾았다. 그것이 인간에게도 있다고 말한 이가 칸트다.

신의 그것과 인간의 그것이 연결되는 경로를 생각한 사람이 헤겔이고 교회의 신은 빼놓고 이야기하자고 말한 사람이 니체다. 이게 본질이다. 그 완전성이 나침반이 되어 인간의 삶을 규율하므로 철학인 거다.

진리니 뭐니 말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건데 철학자들이 난삽하고 장황한 문장을 써대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관성을 모른다.

왜? 모형화, 수치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모델링, 시뮬레이션 작업, 포지셔닝 작업을 통한 추상화 과정이 중요한 것이 그 때문이다. 매뉴얼을 짜고 알고리듬을 제시하면 간단히 답이 나오는 이야기다.  

추상화가 안 되니 주소를 모른다. 나침반을 잃었다. 인덱스가 없고 목차가 없고 검색기능이 없다. 뒤죽박죽이다. 그러니 철학이 점차 문학을 닮는다. 문학에 심어져 있는 작가의 논리틀이 얼마간 완전성을 반영한다.

완전성이 반영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난삽해진다.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다. 이야기를 풀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학, 예술에는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논리틀이 있고 그 논리틀에 완전성이 반영되어 있다.

철학은 완전성을 찾는 작업이다. 철학이 문학을 닮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철학의 실패를 의미한다. 완전성 그 자체를 찾으면 될 터인데 어떤 철학자는 혼자서 진흙을 주물러 질그릇 따위를 만들어놓고 말한다.

‘봐라. 이 그릇 완전에 가깝지 않니? 이건 나의 철학이란다.’ 이러고. 또 어떤 철학자는 나무를 잘라서 물레방아를 만들어놓고 ‘이거 좀 봐 완전에 가깝게 작동하지 않니?’ 이러고. 이런 식의 각개약진이다.

결론은 인간이 추상적 사고에 약해서 수치화 모형화가 안 되니 중구난방이라 이거다. 인간의 원초적 한계다. 필자의 주장은 인간이 추상적 사고에 약해도 보통 약한 것이 아니며 아주 약하더라는 거다.

그러한 인간의 원초적 약점을 인정해야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나갈 수 있다. 지금도 대학의 많은 강좌들은 일정한 체계 없이 도제식으로 운영된다. 학문의 근본인 철학과 문학, 미학이 가장 심하다.

국문과가 있지만 거기서 무얼 가르친다는 말인가? 문학이 뭔데? 인문학이 뭔데? 여전히 체계가 없다. 자연과학은 다르다. 체계가 있다. 과학은 성과가 축적된다. 논리학과 수학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학과 수학이 뭐지? 그게 바로 순수추상 그 자체다. 논리학과 수학은 추상만을 따로 모아서 구체화 시켜놓은 거다. 그러니 추상적 사고를 못해도 최소한 계산은 해낼 수 있다. 숫자라는 구상이 있으니까.

추상이란 예의 그릇과 물레방아에서 추구된 공통점인 완전성만 쏙 빼서 말하는 거다. 논리학과 수학은 그렇게 빼놓은 거다. 구조론도 마찬가지다. 공통분모를 빼서 추상화 시켰다. 그 추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만 쏙 빼서 말하면 되는데 누구도 그렇게 못한다. 구조는 뼈다. 항상 그 뼈에 살을 덧붙여서 말한다. 인디언이라면 어떨까? 추상용어가 없다. 예컨대 성실하다, 지혜롭다는 말이 없다면 어떨까?

‘저 사람은 곰이고 저 사람은 여우로구나’ 무슨 뜻이지? 곰은 성실하고 여우는 지혜롭다. 저 사람은 성실하고 저 사람은 지혜롭고? 이렇게 번역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러니 인디언 추장의 연설은 그 자체로 문학이다.

철학자들은 애매모호한 관념적 용어 속으로 숨지만 인디언 추장들은 그 관념들을 구체적인 사물에 비유하여 말하니까 감이 쏙쏙 온다. 추장이 칸트보다 백배 낫다. 어떤 소설가의 작품보다 위대하다.

학문은 원래 추상이다. 사과 한 개와 숫자 1을 연결하는 논리구조 그 자체가 추상인 거다. 1+1=2라는 법칙은 그 사과의 성질과 무관하다. 사과는 달고 감은 떫고 탱자는 시지만 그래도 1+1=2인 거다.

별개의 논리구조다. 그게 추상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게 구분이 안 된다. 어떤 사과는 굵고 어떤 사과는 잘고 어떤 사과는 싱싱하고 어떤 사과는 썩었는데 어째서 다 2냐? 혼란이 시작된다. 그렇게 모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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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나’를 찾는다. 그러나 보통은 ‘나를 버리라’고 말한다. 이거 수준이 낮은 거다. 나를 버려서 뭣하게? 고(苦)에서 벗어나려고? 그건 고(苦)에 붙잡혀 있는 불쌍한 아저씨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집착을 버려라. 평정을 찾으라. 번뇌를 극복하라.’ 다 어린애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달라야 한다. 지성인은 달라야 한다. 배웠으니까 달라야 한다. 애도 아니고 어른이니까 달라야 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텐가?

제 자리에 퍼질러 앉아서 개인의 문제나 해결하고자 끙끙대고 있대서야 될 일인가? 하긴 개인의 문제도 해결못한 주제에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덤벙대며 나서도 웃긴 짓이긴 하지만 말이다.

개인의 문제는 혼자 해결하는 거다. 함께 해야 재미있다. 지성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쭉쭉 뻗어나간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된다. 함께 가는 거다. 우리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멋진 계획이 있다.

구조론은 혼자 만들었지만 두 사람이 알고 네 사람이 알고 결국 모두가 알게 된다. 그 쭉쭉 뻗어가는 과정이 즐겁다. 이건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깨달음은 인생을 걸고 멋진 계획 하나 세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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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한다는 사람들 중에 '에고' 라는 표현을 상투적으로 쓰는 사람 많더라. 입만 뗐다 하면 에고타령이다. 어떤 논변이든 '에고' 들어가면 일단 구라로 보아야 한다. 하긴 ‘에고’ 안들어가도 거의 구라더라마는.  

상투적이라는 말은 '에고는 나쁜편, 안에고는 우리편' 이런 초딩들의 선악 이분법에 기댄다는 거다. 유치하게 말이다. 진부하게도 말이다. 하여간 명상한다는 사람들이 '에고'를 거의 부정적 의미로 쓰더라.

이게 아마 라즈니쉬가 유행시킨 헛짓거리가 아닌가 싶다. 에고는 자아다. 자아는 나다. 에고는 그냥 나다. 명상가들이 그걸 부정적 의미로 쓴다는 것이 이상하다. 내가 나쁜 건가?

구상과 추상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이게 안 되면 다 안되는 거다. 물질과 영혼, 육체와 정신은 구분이 다른 거다. 물질에는 물질의 논리가 있고 정신에는 정신의 논리가 있다.

사과가 굵다, 잘다, 잘생겼다, 못생겼다, 썩었다, 싱싱하다는 사정과 1+1=2의 사정은 완전히 다른 거다. 침범하면 안 된다. 구분 확실히 하자. 에고는 정신의 논리다. 순수추상으로 논해야 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극복한다는 것은 물질의 논리를 버리고 정신의 논리를 얻자는 것이다. 사이비들이 보통 에고를 나쁜 의미로 쓰는데 ‘육체는 나쁜 것, 정신은 좋은 것’ 하는 식이다.

물질의 논리를 버려야 하는 것은 물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과목이 수학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논리는 수학과 같다. 순수하게 기능만 가지고 판단하는 거다. 그 사과의 때깔이 어떻다는 것은 논외다.

무엇인가? ‘A면 B다’의 규칙이 있다. 그 A와 B 사이에 둘을 연결하는 고리만 빼서 논하는 거다. 그래서 뺄 추(抽)다. A와 B의 사정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그 사이만 보자. 그게 수학이고 논리학이고 구조론이다.

추상은 ‘A면 B다’이다. ‘=’의 좌우에 1+1과 2가 있다. 이쪽에 하나가 더 붙어 1+1+1이면 저쪽에도 하나가 더 붙어 2+1이다. 오직 그 부분만 쏙 빼서 보자는데 합의가 되어야 한다. 추상하기다.

나는 에고다. 에고는 자아다. 그것이 나의 인격이고 존엄이고 정체성이다. 왜? 나의 일관성, 연속성, 동일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딴나라떼가 어제 사고를 쳤으니 내일도 사고를 칠 거다.

계속되는 거다. 그래서 정체성이다. 어제 사고친 딴나라떼와 내일 사고칠 딴나라떼가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동일성 곧 아이덴티티, 자기 정체성이 성립되는 거다. 그놈이 늘 하던 짓을 또 하니까.

왜? 자아는 자기주도권이다. 권이다. 권은 저울이다. 만유는 저울이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저울이다. 나는 하나의 저울이다. 내가 저울이므로 내가 평가한다. 그 지점에서 나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와 같다.

‘나’라는 것, 자아라는 것은 정체성을 말함이며 그것은 동일성, 일관성, 연속성이 있다는 거고 그 이유는 그곳에 저울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저울이 같은 저울이니까 동일성을 발휘하여 동일하게 판정하는 거다.

그대 안에 저울이 있다.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저울은 권이다. 권은 권력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손에 쥘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권력을 쥔다'고 말한다.

왜냐? 옛날에는 권력을 구상화(물질적으로 구체화) 해서 임금의 옥쇄라든가 왕홀이라든가 따위를 만들어서 권력자가 그것을 손에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옥쇄나 왕홀이 권력인가? 아니다.

권력은 추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추상을 구상화 시키는 오래된 습속이 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의 국가권력은 수하르토의 부인이 손수 짠 국기란다. 그걸 손 으로 꽉 움켜쥔 사람이 국가의 권력을 쥐는 거다.

마을마다 권력이 있는데 주로 전해내려오는 오래된 항아리 따위다. 항아리를 손에 쥔 사람이 촌장이다. 그러나 이건 무지한 사람들의 얄궂은 풍습일 뿐. 우리 추상하기에 성공하자. 권력은 손으로 쥐는게 아니다.

권이란 무엇인가? 일의 우선순위가 있다. 앞사람이 안하면 뒷사람이 못하게 되어 있는 원리다. 예컨대 자식이 효도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은 불효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다.

왜? 태어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효도해야한다. 이런 논리적 당위가 권이다. 특허권, 소유권, 상속권 등 모든 권이 그러하다. 상속권을 폐지하면? 부자는 돈을 탕진해 버린다. 상속 안되면 국가소유로 넘어갈테니.

국가에 뺏기기 전에 써서 없애버린다. 곧 사회가 붕괴되는 거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스템은 각종 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관념 사회주의가 각종 권을 부정한다면 논리적인 자가당착이다.

권을 부정하면 공동체의 존립기반이 붕괴된다. 사회는 파괴되고 붕괴된다. 권의 해체는 공동체의 해체다. (물론 잘못된 권은 해체되어야 한다. 조중동 떨거지들의 말도 안 되는 기득권 말이다.)

생존권, 인권, 행복추구권, 인격권, 자기존중권 등 진보가 주장하는 권도 마찬가지다. 권의 부정은 근본적인 사회의 붕괴를 낳는다. 범죄가 일어나고 온갖 사회적 일탈이 일어난다. 시민의 저항이 일어난다.

어떤 이유로도 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면 안 된다. 권은 저울이고 저울은 이쪽과 저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저울추가 기울어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시키든 본인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주식을 하든, 부동산을 하든, 경마를 하든, 술을 먹든, 담배를 피든, 그래서 망해먹든, 그래서 대박나든, 그래서 병걸리든 간에 본인이 책임지고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결정할 일이다. 그래야 사회가 돌아간다.

사회는 각종 권들의 정교한 집합체다. 개인의 권과 집단의 권이 있다. 모든 종류의 권을 존중해야 한다. 권은 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물론 귀족의 특권과 같은 가짜 권들은 확실히 검증되어야 한다.

나란 무엇인가? 권의 한 단위다. 나는 하나의 저울이다. 권은 개인으로도 사회로도 국가로도 공동체로도 팀으로도 가족으로도 회사로도 있다. 그런데 나 자신도 권에 있어서는 대상화 될 수 있다.

권의 입장에서는 나도 타자일 수 있는 것이다. 에고라는 말이 생긴 것이 그 때문이다. 에고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나 자신도 그 권의 관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함일 터이다.

관리된다는 것은? 말썽쟁이 꼬마를 관리하듯이 내버려두면 사고치니까 관리한다는 거. 에고를 어른의 통제를 받는 꼬마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가? 나는 말썽쟁이 꼬마인가? 그렇게 인격이 미숙한가?

나는 권이다. 권은 저울이다. 저울은 잰다. 판정한다. 나도 판정한다. 내가 내 밖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판정한다. 판정하는 사람은 판사다. 판사님은 높다. 판정받는 사람은 법정에 붙들려온 죄인이다.

그러니 에고는 낮고 그 에고를 판정하는 순수의 뭔가는 높다. 그래서 낮은 에고, 죄인 에고, 피고 에고는 혼내줘야 한다. ‘에고를 버려랏.’ 이런 유치발랄한 논법이 제시된다.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웃긴 생각이다.

에고를 왜 버려? 얼빠진 생각이다. 순수추상을 따라가자. 나는 에고다. 에고는 권이다. 권은 힘이 있다. 권은 내가 남에 대해, 타자에 대해, 사회에 대해, 진리에 대해, 역사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그 에고의 통제대상에는 나의 몸도, 나의 감각도, 나의 인격도 포함된다. 나 위에 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나를 하나 더 올려놓다 보니 내가 둘이 되어서 정신분열이 될 지경이다. 구상과 추상을 혼동하니 말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으려고 통제대상인 나를 에고라 하고(정신분석학 용어를 멋대로 변개해서.) 그 에고를 버리라고 하는 모양이다. 사이비들이 말이다. 에고 위에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이원론은 사악하다.

컴퓨터는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기도 하지만 컴퓨터 자신의 데이터를 수리하기도 한다. 나는 바깥을 바라보고 행동하지만 나 자신을 바라보기도 한다. 나라는 에고 위에 순수의 내가 하나 더 있는게 아니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통제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소프트웨어 자신도 통제한다. 나라는 개념은 원래 소프트웨어의 나, 권의 나, 판정하는 나, 추상의 나를 말함이다. 내가 에고다.

깨달음은 에고를 버리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권이고 저울이고 그 저울로 만유를 판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다. 자기 자신도 판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에고는 나의 문제도 세상의 문제도 해결한다.

물질과 영혼, 육체와 정신, 하드와 소프트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을 사진기로 촬영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영혼을 물질로 보는 거다. 촬영되면 어찌 영혼일까? 촬영 안되니까 영혼이지.

영혼은 사회적인 소통의 의미로 기능할 때만 의의있다. 그 저울의 연속성 동일성 계속성 일관성을 영혼이라고 하는 거다. 영혼을 물질로 보면 개념이 죽어서 사어가 된다. 이미 사어에 가깝게 되었지만.

진정한 나는 권으로 존재한다. 권은 저울이고 저울은 힘이 있다. 나의 경험과 인식과 판단과 행동과 양식을 통일한다. 정체성을 부여한다. 나를 나답게 한다. 그 저울의 판정이 옳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울이 변덕을 부려서 동일성에 어긋나는 판정을 내린다면? 저울이 눈금을 속인다면? 나는 정신분열이 되고 만다. 저울의 판정이 한결같으므로 나의 성격과 인격과 자존감이 유지되는 거다.

그 저울의 판정이 한결같게 하려고 노력하므로 인격이 있는 거다. 그 저울의 판정이 한결같을 때 권위를 가진다. 특허권, 소유권, 상속권, 인격권, 행복추구권, 저작권 등이 따라붙는 거다.

만약 저울이 변덕을 부린다면? 어떤 쥐처럼 아침 저녁으로 다른 말을 한다면? 특허권, 상속권, 소유권, 인격권 다 몰수다. 인권없다. 인간의 권이 인정되는 것은 그 한결같음의 권위를 인정해서이다.

그러므로 권을 키워야 한다. 자아의 성숙이다. 에고의 발달이다. 자아가 미숙한, 에고가 덜 발달한 자는 어리광을 부리고 의존하며 항상 '누구 때문에'라고 말한다. 자신의 권을 패대기치는 격이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판정했으면 내 책임이지 왜 누구 때문이란 말인가? 노예들은 말할 수 있다. ‘다 주인 때문이다.’ 판정은 언제나 주인이 하니까. 노예가 아니므로 권을 주장하고 행사해야 하는 거다.

하여간 저울을 가진 자가 갑이다. 어디를 가도 그렇다. 저울이 표준이다. 인터넷도 표준을 선점한 자가 다 먹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왕이 저울을 만들고 자를 만들고 도량형을 통일했다. 왕권이 거기서 나오니까.

인격을 닦고 지성을 일구면 권이 커진다. 한결같은 판정을 내리면 권이 힘을 가진다. 범죄를 저지르면 권을 잃는다. 어떤 쥐도 범죄를 저질러 참정권 일부를 박탈당했는데 불쌍타고 사면해줬더니 기어올랐다.

인간은 권이 있다. 인간의 모든 가치는 권에서 나온다. 그 저울을 운용하되 한결같은 판정을 내림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고 존엄성에 도달해야한다.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자기존중감을 얻어야 한다.

권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내가 저울임을 모르고, 끝내 그 저울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모든 가치판단을 세상의 풍파에 맡기면, 그 저울에 아무 것도 올려보지 않으면, 나는 희미해진다. 나는 사라진다.

나는 벌레와 같아진다. 나다움을 잃고 만다. 나는 빛을 잃고 향기를 잃고 메아리를 잃는다. 신의 완전성과 소통하지 못한다. 신의 저울과 연결되지 못한다.  나의 권을 버릴 때 나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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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들의 에고타령은 기독교의 원죄설 비슷하다. 원죄설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일단 피고석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놓고 교회 자신은 높은 판사 자리에 떠억 올라 앉는다. 불공정하다.

선수는 평등한 사각의 링에 올라야 한다. 누구는 처음부터 판관이고 누구는 처음부터 피고라면 이것이 될 말인가? 이건 사기다. 사이비 명상가들의 수법도 비슷하다. 뭐든지 에고탓으로 치부된다.

몸에 에고라는 이름의 나쁜 악령이 붙어있으니 굿이라도 해서 떼내야 한다는 식이다. 원죄설은 만능이다. 에고타령은 만능이다. 그런 점에서 사악하다. 원죄는 없다. 타파되어야 할 그런 에고는 없다.

분명히 말한다. 모든 것을 부정적 의미로만 말하는 ‘비워라. 버려라. 깨부수라. 떼내라. 없애라. 무(無),’ 따위의 표현들은 진정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진짜라면 어둠이 아니라 빛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어둠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빛이 어둠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가짜들은 말한다. ‘어둠을 비워라. 어둠을 버려라. 어둠을 걸레로 닦아라. 어둠을 빗자루로 쓸어라. 원죄를 씻어라. 에고를 타파하라.’

나는 구조론이라는, 신의 완전성이라는, 사랑의 뻗침이라는 빛에 대해서 말한다. 완전성이라는 태양에서 빛이 비치듯이, 사랑의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하여 뻗치듯이, 저절로 뻗어나오는 것이다.

저절로 오는 것이므로 진짜라면 구태여 갈고 닦고 쓸고 버리고 광내고 할 이유가 없다. 스위치만 켜면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키만 돌리면 자동차에 시동이 걸린다. 빛은, 진리는, 깨달음은, 생명은 언제나 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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