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는 옥이 많아서 ‘경주 남석’으로 불린다. 예전에는 안경방 마다 경주남석을 쇼윈도에 전시해놓곤 했다. 백수정, 흑수정, 자수정이 있는데 흑수정이 특히 많고 투명한 백수정으로는 조선시대부터 안경알을 만들었다. 안경알을 만들려면 수정의 사이즈가 이따만하게 커야 한다. 육각기둥의 굵기가 어른 팔뚝만큼 큰 수정도 많았다. 일곱 살 소년은 기슭에서 작은 옥돌을 찾아내곤 했다. 별 가치없는 것이다. 내가 기뻤던 이유는 그 산에 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언젠가 더 멋진 옥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기도 했다. 산 자체가 내겐 보배였다. 어떤 것을 내가 취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람들이 굳이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집에 홈시어터를 장만해 놓으면 친구가 보러오지 않을까. 외제차를 굴리면 길 가던 여인이 합승해주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희망 말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의 표현일 뿐이다. 설사 친구가 찾아와서 맞장구를 쳐준다 해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해도 그것이 그다지 의미있는 일은 아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의 쓸쓸함은 가시지 않는다. 이 우주가 다 보배인데, 내 발밑에 황금이 있는데,(핵융합기술이 발달하면 바닷물을 증류해서 모든 종류의 귀금속을 찾애낼 수 있다. 발밑을 계속 파서 지구 반대편 까지 가면 그 중에 한번은 금맥이 걸린다.) 보물을 찾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보물은 있어야 한다.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전개 과정에서 나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은 재현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누군가의 보물이 되는 수 밖에 없다. 어떤 방법으로 당신은 누군가의 보배가 되겠는가? 아이들은 말하곤 했다. 옥돌을 땅 속에 묻어 놓으면 옥이 땅속에서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커다란 옥돌이 된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뒷산 기슭에 몇 개를 묻어놓았다. 지금 그곳은 감나무 밭으로 변해 있고 옥을 심어놓은 위치는 찾을길 없다. 경주남산이 내게 준 것은 가치없는 작은 옥돌 몇 개 뿐이지만 나는 세상 어딘가에 가치있는 것이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낯설은 것과 처음으로 대면할 때 그 시점에 이미 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보배를 찾으며 그 크고 깊은 산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옥에 끌리었지만 나중은 산에 취하였다. 그 산이 품어 간직한 70여체의 석불과 도처에 산재한 무너진 석탑들과 100여곳의 절터에 취하였다. 더 많은 바위와 계곡과 흙과 풀벌레와 이끼와 버섯과 안개와 바람소리에 취하였다. 나를 유혹한 그것은 조금씩 바톤터치를 한 것이다. 그러한 전개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그 끝 지점에 대한 애초의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 끝에 무엇을 만날지를 알고 간 것이다. 종교의 성지는 완전을 표상하고자 한다.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이 그러하듯이 경주의 불국사가 그러하듯이 최상의 가치를 나타내고자 한다. 천번도 넘게 경주 남산을 밟았고 내게는 어떤 종교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