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랑을 말하는가? 사랑을 이야기 하자면.. 저 인간이 또 무슨 말로 구라치나 하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혹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해도 ‘사랑이다’가 아닌 ‘사랑하다’로만 알아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소통은 실패다. 백 번의 뽀뽀를 하거나, 천 통의 편지를 쓰거나, 하루 종일 님을 그리워하거나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무언가 노가다(단순반복작업)를 하는 것이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부끄러워 한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노가다 짓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묵한다. 결국 아무도 사랑을 말하지 않게 된다. 코엘료가 멋쟁이인 것은 그가 용기있게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어눌하기는 마찬가지다. 보석처럼 빛나는 표현도 있지만 횡설수설이 다분하다. 어쨌든 그는 적어도 사랑을 말하는데는 성공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단호하게 침묵한다. 그들은 결코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경상도 남자처럼 말로 표현은 안하지만 묵은 정은 알아달라는 식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종이 소리를 내듯 소리를 내야 한다. 종이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내가 치지 않아서 그렇지 한번 치면 좋은 소리가 날거라고 우긴다면 허무하다. 종은 소리를 내야 종이다. 말해야 한다. 사랑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고, 깨달음을 말하고, 자유를 말하고, 소통을 말하고, 진정성을 말하고 다 말해야 한다. 정치인 민생쇼처럼 노가다 뛰는 짓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말해야 한다. 사랑은 이다에서 있다를 거쳐 하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그 내부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과연 사랑이냐다. 이지 않으면 있지 않고 있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이다와 있다를 증명하지 않은 채로 하다를 주장함은 진짜가 아니다. 이다면 있으므로 하지 않아도 스스로 넉넉하고 있으면 저절로 하게 된다. 내부에서 절로 넘쳐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은 때가 되어야 핀다. 때가 아닌데도 핀다면 진짜가 아니다. 큰 불꽃은 한꺼번에 타오른다. 노가다를 반복할 이유가 없다. 꽃이 피듯 불이 타듯 진짜여야 한다. 테마가 있어야 하고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를 가지는 것이다. 내부에 결을 가지는 것이다. 내적 정합성을 판정할 기준을 얻는 것이다. 일관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으로 쭉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유리된다. 분리된다. 동양화에 여백이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고민의 반영이다. 주제가 강하게 부각될수록 배경과 분리되어 어색해진다. 스타일의 획득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다. 작가는 스타일을 얻을 때 분리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 작가가 소설에, 혹은 그림에, 혹은 음악에 뚜렷하게 자기 메시지를 심을수록 조잡해지는 현상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림이 포스터가 되고, 산수화가 지도가 되고, 문학이 계몽이 되고 구호가 되고, 음악이 군가가 되는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느냐다. 그러므로 작가는 스타일을 얻어야 한다. 내 안에 reed를 얻어야 한다. 사랑이어야 한다. 스타일은 스틸에서 나온 말이고 steel은 강철이다. 강철은 건물의 골조다. 골조는 뼈다. 이야기의 등뼈를 얻음에 의해 그러한 인물과 배경의 분리현상은 극복된다. 이중섭이나 고흐나 박수근이나 마찬가지다. 스타일을 얻었다.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노가다를 반복한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포지션을 얻는다는 것이다. 종이 소리를 낸다는 것은 고유한 파장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으로 일관되는 것이다. 그것이 종의 등뼈다. 퉁소가 소리를 낸다는 것은 reed를 가지는 것이다. 기타가 소리를 낸다는 것은 pick를 가진다는 것이다. 진동수를 가진다는 것이다. 주파수대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명할 수 있고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포지셔닝이다. 예수의 사랑은 세상을 품어안는 예수의 포지셔닝이다. 어느 위치에 서느냐이다. 정상의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으로 이어져서 완성된다. 정상으로 통하는 것이다. 쓰지 못하는 작가,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가, 그리지 못하는 화가가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면 어이없다. 넌센스다. reed가 없이 연주한다거나 소리를 내지 못해도 종이라거나 마찬가지로 곤란하다.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 것이다. 종이어야 하고, 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종이 울리는 것이다. 종이 아닌데, 종이 없는데, 종이 울리지 않는데 사랑한다고 우긴다면 곤란하다. 사랑은 물리공간에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구조는 파이프와 같고 저울과도 같다. 하늘과 땅이 파이프의 입력과 출력이면 인간은 그 사이에서 저울이다. 마찬가지로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이 공명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과 땅은 당신을 연주하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음을 가졌다면 그 음을 토해낼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미처 그것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깨진 종처럼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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