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냐 사슬이냐 물질이냐 에너지냐 세상은 구슬의 집합인가 아니면 사슬의 연결인가? 물질의 집합인가 아니면 에너지의 복제인가? 세상을 물질 알갱이 곧 원자론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그 구슬을 한 곳에 모으는 논리 곧 집합론이 추가로 필요하다. 벌써 어색해졌다. 논리가 둘이면 그 둘을 합치는 제 3의 논리가 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허둥대면 망하는 거다.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세상을 에너지 사슬로 보면 에너지는 알갱이와 집합이라는 두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 지금은 양자역학 시대다. 이에 걸맞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에너지는 원인이고 물질은 결과다. 원인측을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을 알갱이로 보는 사람은 밤송이를 버리고 밤톨을 취한다. 껍질을 버리고 알맹이를 취한다. 틀렸다. 양파껍질에는 순서가 있다. 순서로 보는 사람은 껍질을 버리지 않는다. 양자역학이 분자를 까서 원자를 얻고 원자를 까서 소립자를 얻었지만 계속 까서 얻은 것이 없다. 최후에는 껍질과 알맹이의 순서와 방향을 기록해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대상 내부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껍질을 버리고 알맹이를 주워담던 채집생활의 습관 때문이다. 바꿔야 한다. 진정한 세계는 외부와 연결되는 껍질에 있다. 그 껍질 함부로 버리지 마라. 에너지는 껍질을 타고 온다.
우리는 손가락을 볼 뿐 사이를 보지 않는다.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어떤 둘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미 결정하고 통보된 결과를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결정하는 현장을 잡아야 한다. 사이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이에 무엇이 있나? 관계가 있다. 물질은 내부의 속성이 결정하지만 에너지는 사이의 관계가 결정한다. 물질은 금은 금이라 성질이 고정되지만 에너지는 상대적인 관계에 따라 금도 되고 은도 된다. 에너지는 홀로 움직이지 않으니 언제나 둘이 맞잡고 함께 일어선다. 존재는 곧 사건이며 사건은 의사결정의 연결이며 의사결정은 둘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홀수는 될 수 없고 짝수로만 작동한다. 혼자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혼자 악수할 수 없고 혼자 결혼할 수 없다. 주려면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기려면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거장이 중요하고 도로는 그냥 정거장을 연결할 뿐이라고 착각한다. 틀렸다. 연결하는 도로가 중요하고 정거장은 교통의 편의로 설치한 것이다. 도로는 두 도시를 연결한다. 반드시 도시가 둘이 있어야 도로가 연결된다. 물질은 혼자 있어도 되지만 에너지는 둘이 필요하다. 에너지가 근본이고 물질은 그림자다. nice라는 말의 어원은 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는 것은 골치아픈 것이고 세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근사한 것이다. 집합은 원소를 일일이 세느라 골치아프다. 구조는 대량복제하므로 나이스하다. 어부가 그물을 당기듯이 줄줄이 딸려온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반가운 마음으로 이 세계를 탐험해보자. 누구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그렇다. 우리는 거대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신대륙을 탐험한 콜럼버스처럼 남들이 오른쪽을 갈 때 우리는 왼쪽을 가보는 거다. 남들이 물질에 집착할 때 우리는 에너지로 가보는 거다. 어렵지 않으니 생각하는 방법을 180도로 뒤집으면 된다. 결과 대신 원인 보고, 존재 대신 관계 보고, 사물 대신 사건 보고, 귀납 대신 연역 보고, 의미 대신 맥락을 보면 된다.
간단합니다. 에너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에너지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의사결정구조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결정된 결과입니다. 결정하는 과정을 추적해 보면 됩니다. 가정에 통보된 성적표를 보면 속을 수가 있지만 시험 치는 과정을 지켜보면 속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