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역사학 한국사
1) 한국의 의사결정구조는 무엇인가?
2) 한국식 의사결정구조의 보편성은 무엇인가?
3) 의사결정구조로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관이다.
4) 국사 이해의 핵심은 식민사관과 싸우는 데 있다.
5) 식민사관은 다윈주의에 오염된 인종주의 역사관이다.
6) 한국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환빠사관이 식민사관이다.
7) 우월성과 열등함을 비교하는 행태가 바로 식민사관이다.
8) 식민사관을 벗어나서 객관적인 관점을 제시한 사람은 없다.
9) 민족주의는 한국사의 역동성과 활력을 부정하는 식물사관이다.
10) 역사를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관점이 인종주의적 식민사관이다.
11) 식민사관은 한국사를 실패한 역사로 규정하고 실패원인을 찾는다.
12) 노론때문이라거나 누구 때문이라며 때문타령하는게 식민사관이다.
13) 역사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며 그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4) 한국인은 빙하후퇴로 일어난 유목민 대이동 때 들어온 수렵민이다.
15) 유목민은 고조선 변경 초원지역까지 진출하여 수렵민과 교류했다.
16) 민족을 유전자적 혈연으로 본다면 잘못이며 문화교류가 중요하다.
17) 흉노를 비롯 고대 유목민족은 여러 인종이 섞여 단일민족 아니다.
18) 혈연위주 민족개념을 배척하고 문화권개념으로 보는 것이 바르다.
19) 유목민은 탁월한 이동능력 때문에 동맹이 아니면 반드시 전쟁한다.
20) 유목민이 대제국을 만들기는 하지만 사실은 느슨한 부족연맹체다.
21) 흉노, 돌궐 부족연맹을 제국주의식 유목제국으로 보는건 코미디다.
22) 문화권으로 봐야 바르며 한국도 북방 유목부족연맹의 일원이었다.
23) 고대국가는 도시 중심이며 성 안에 살고 야인은 국인이 아니었다.
24) 고대국가는 무역에 의해 유지되며 고조선의 영역은 모피생산지다.
25) 모피가 생산되는 산악지역이 고조선 세력권이며 그 바깥은 논외다.
26) 한漢의 한반도 진출은 고대 무역국가 시스템으로 보면 자연스럽다.
27) 수레로 유목민이 강해졌으며 한반도사는 유목제국사에서 출발한다.
28) 고조선 중심 사고는 중국측 기록에 의존하며 한반도사를 축소한다.
29) 유목제국 영토인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고조선 영토가 시작된다.
30) 초원 유목민족과 산악 수렵민족은 예로부터 긴밀하게 교류해왔다.
31) 수레를 이용한 유목민 대이동이 시작된 시점에 한국사가 시작된다.
32) 당시 상나라는 정글지역에 고립된 소도시이며 중국은 실체가 없다.
33) 마야문명처럼 상나라는 정글에서 수시로 도읍을 옮기며 떠돌았다.
34) 중국 대 한국의 대결구도로 보는 관점은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이다.
35) 유목민문화 대 농경민문화의 대결구도로 보는 관점이 바른 태도다.
37) 어원을 규명하면 한국어는 투르크계 문법과 인도유럽어계 어휘다.
38) 한국인의 발성법과 비슷한 것은 인도일부, 영어, 독일어 정도이다.
39) 한글이 표기 못하는 소리가 없는게 아니라 발성하는 나라가 없다.
40) 인도, 영국, 독일 외에 유럽 대부분도 한글자모를 발음하지 못한다.
41) 중국과 일본, 여진 등 가까운 지역도 모음과 받침들을 발성 못한다.
42) 인도유럽어에 드는 나라들도 어휘만 같고 발성법과 문법이 다르다.
43) 중국어의 사성처럼 대부분 적은 발성을 비틀어 다양하게 표현한다.
44) 신라 발음이 인도발음 및 중국 진나라와 가깝다는 옛 기록이 있다.
45) 어휘는 교류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어휘를 상당히 빌려 쓴다.
46) 물새 diving이 비둘기dove로 닭duck으로 일본에서 새とり가 된다.
47) 어휘가 국경을 넘으면 의미가 변질되는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진다.
48) 유전자로 보면 한국인은 남한의 몽골인과 북한의 여진족이 섞였다.
49) 고조선 부족 연맹체는 무역거점에 성읍을 이루고 세력권을 가졌다.
50) 성읍국가는 성 밖에 사는 야인과 교류할 뿐 직접 지배하지 않는다.
51) 스페인도 남미 몇몇 도시에 진출한 것을 지배한 것으로 사기친다.
52) 한사군의 한반도 진출을 중국과 한국의 대립으로 본다면 편협하다.
53) 고조선은 우크라이나까지 이어지는 초원지대 유목연맹체 일원이다.
54) 초원지역 유목민연맹체와 황토지역 농경민집단의 상호작용이 맞다.
55) 유목민이 수백년간 한나라를 압박하자 한무제때 대거 반격해 왔다.
56) 한漢의 한반도 진출이 아니라 유목민의 한나라 압박에 맞대응이다.
57) 한무제는 북쪽으로는 바이칼호까지 동으로는 한반도까지 진출했다.
58) 농경민과 유목민의 상호작용 여파로 한반도 고대국가들이 일어났다.
59)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유목민연맹체를 복제한 부족연맹체 국가다.
60) 부족연맹체를 원시적인 단계로 보는 것은 낡은 인종주의 관점이다.
61) 몽골제국, 오스만제국, 일본까지 넓은 의미에서 부족연맹체와 같다.
62) 초기신라 영토를 경주일원으로 보는건 부족연맹체를 오해한 것이다.
63) 신라는 건국직후 낙랑과 충돌한 데서 보듯 대규모 연맹을 만들었다.
64) 유목민은 원래 지리적 한계까지 진출하여 연맹을 맺는 관습이 있다.
65) 고대국가의 국경선은 당시의 이동수단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66) 원삼국시대 개념은 잘못된 것이며 이동기술을 중심으로 봐야 한다.
67) 수레와 말이 이용되면서 단번에 수레와 말의 이동한계까지 커진다.
68) 원삼국시대 개념은 역사가 점진적 발전한다는 선형사고의 오류이다.
69) 이동형태가 역사를 규정하며 이동형태가 같으면 모두 한 묶음이다.
70) 고대사의 핵심은 철제무기와 말의 등자가 사용된 시점의 규명이다.
71) 항해는 연안을 따라가므로 왜가 한반도에 거점을 두는건 당연하다.
72)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해안지역에 거점을 두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73) 이동기술의 측면으로 보면 언제나 유목민이 농경민을 압도해 왔다.
74) 수백년 동안 중국을 제압한 흉노를 얕잡아보는 시각은 사대주의다.
75) 기원전후 철제무기 보급으로 유목민이 일제히 황토지대로 진출했다.
76) 남북조부터 당나라까지 유목민이 농경민을 제압해 가한이 지배했다.
77) 수, 당은 유목민 정복왕조이며 거란, 금, 몽골,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78) 농경민이 유목민을 제압한 예는 없으며 잠시 초원에 진출한 정도다.
79) 농경민 중심의 역사관에 세뇌되어 최초 유목제국 흉노를 비하한다.
80) 유목민 일파가 들어와서 신라의 건국에 관여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81) 알타이지역 흉노가 김씨, 스키타이가 석씨, 박트리아가 박씨 시조다.
82) 신라는 원래 성씨가 없었으며 성씨를 정할 때 찾아서 만든 것이다.
83) 5호가 중국으로 들어가자 서쪽이 비어 고구려가 몽골까지 진출했다.
84) 지도에 금을 긋는 농경민적 사고가 고구려의 서쪽 진출을 부정한다.
85) 유목민은 동맹을 맺으므로 군대가 들어가지 않아도 복속되곤 한다.
86) 청나라도 만주팔기에 이은 몽골팔기를 얻어 동맹한 것이 성공했다.
87) 몽골의 정복이 아니라 혼인동맹이며 몽골의 만주지배도 비슷하다.
88) 고려와 몽골도 결혼관계에 의한 동맹개념으로 제국에 들어간 거다.
89) 토지를 지켜야 한다는 농경민의 관점은 유목민에게 희미한 것이다.
90) 당나라의 고구려 공략은 유목민 특유의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이다.
91)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립은 유목민 대 유목민의 패권대결 성격이다.
92) 중국 대 한국의 전쟁이 아니라 같은 유목민 간의 내전성격이 있다.
93) 중국 한족과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정면대결하지는 않았다.
94) 신라는 도시중심 국가체제라 고려시대보다 오히려 인구가 많았다.
95) 야금기술 발달로 농민이 철기를 입수하자 상호작용 형태가 변했다.
96) 상호작용형태 변화에 따른 의사결정구조 변화로 신라가 붕괴했다.
97) 고대농업은 단순해서 농민이 철제 농기구를 사유화 하지 못하였다.
98) 야금기술, 농업기술 발달로 철제 농기구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99) 농업발달로 농민이 농토에 붙어있자 도시의 해체로 신라가 망했다.
100) 고려는 한족과 유목민의 대결에서 솥발구도로 큰 이득을 얻었다.
101)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명과 북원의 대결에 따른 외교행동이다.
102) 편전이라는 신무기를 가진 조선군이 명을 이기는건 어렵지 않다.
103) 함경도의 유목민이 호응해와야 보급이 해결되는 문제가 핵심이다.
104) 대규모 동맹을 이루는 유목민 습성에 따라 북원이 지면 이탈한다
105) 이성계의 명성을 따르는 유목민이 이탈해 명에 붙자 전쟁불가다.
106) 유목민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가 북원과 손잡고 명을 조이는 거다.
106) 북원의 이탈로 외교전략이 다 깨져서 이성계가 회군을 한 것이다.
107) 최영정권의 보급이 의문이므로 현지조달이 가능해야 정복이 된다.
108) 이성계의 회군은 외교상황의 급변으로 인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109) 북원이 다시 일어나 주변 유목민이 호응하면 정도전은 북벌했다.
110) 북원이 일어날 가망이 없자 몽골잔당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였다.
111) 이성계는 몽골출신이므로 명에 확실한 외교 신호를 보내야 했다.
112) 고려는 귀족연맹체이며 신라와 고려의 왕은 종교적 숭배대상이다.
113) 신라가 천년씩 가고 고려가 500년 간 것은 왕실숭배 덕택이었다.
114) 이성계의 찬탈로 왕실숭배가 사라져서 국가시스템이 문제되었다.
115) 이방원 귀족중심 존왕전략과 정도전 선비중심 이념전략이 맞섰다.
116) 승려출신 주원장의 선비혐오가 이방원의 존왕전략을 편든 것이다.
117) 종교적 정통성 없는 조선왕실은 이념전략을 건국이념으로 정했다.
118) 이념전략에 따라 왕은 선비의 지지를 얻고 선비는 특권을 얻었다.
119) 선비를 키우면 왕의 인기는 높아지나 대신 권력기반은 무너진다.
120) 민중은 특권 선비를 혐오했으며 왕실은 불교로 선비를 견제했다.
121) 선비는 불교탄압으로 맞불을 놓아 존왕과 이념은 균형을 얻었다.
122) 선비의 지지를 받은 임금은 세종, 선조 정도고 훈구파가 쥐었다.
123)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대부분 조작된 환상이며 왕이 거의 먹었다.
124) 존왕과 이념의 균형이 조선 특유의 내세울만한 의사결정구조이다.
125) 선비집단의 공론을 통한 의사결정구조가 조선왕조의 국가이념이다.
126) 연산군, 광해군, 정조는 공론시스템을 파괴하여 조선을 무너뜨렸다.
127) 독재정치를 위해 성리학을 없앤 명은 조선의 선비정치와 마찰했다.
128) 양명학과 고증학은 유교로 볼 수 없으며 황제의 반유교 때문이다.
129) 명나라 중반부터 그리고 청의 후대에도 도교에 오염되어 몰락했다.
130) 선비가 뭉치면 황제 지위가 위태롭고 만주족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131) 조선 성리학의 발달은 독재국가 명과 대결하려는 야망에서 나왔다.
132) 명은 남왜북로와 농민반란으로 혼란했으므로 조선은 세게 나갔다.
133) 왜구와 내전으로 일본이 혼란해서 조선의 중개무역이 이득이었다.
134) 조선이 무역로를 차단한 데 따른 보복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135) 명에 입조하여 무역권을 얻는 것이 토요토미의 원래 목적이었다.
136)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 조선군으로 명을 치는 것이 일본 계획이다.
137) 가토와 고니시도 뒤늦게 풍신수길에 항복하여 군대를 털린 것이다.
138) 임진년의 삼국전쟁은 지루한 조선사에 커다란 활력을 불러 넣었다.
139) 중국의 대포와 조선의 편전과 왜의 조총이 대등하게 겨룬 것이다.
140) 병력의 숫자와 전쟁경험의 차이가 있을 뿐 전투력은 막상막하였다.
141) 대포와 편전과 조총을 동시에 갖추었으므로 세계정복도 가능했다.
142) 척계광의 원앙진을 습득하여 보병전투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143) 전쟁으로 왕실의 인기가 추락했으므로 왕조의 교체가 있어야 했다.
144) 왕실지지 추락으로 수세에 몰린 광해군의 독재가 몰락의 원인이다.
145) 광해군은 조선왕조 특유의 공론을 통한 의사결정구조를 부정했다.
146) 군대가 크면 반란이 일어나므로 인기없는 왕은 군대를 약화시킨다.
147) 사르후 전투 때 조선군의 배신행위 때문에 누르하치가 강력해졌다.
148) 화살촉 없는 활을 쏘게한 광해군의 이적행위는 찢어죽일 만행이다.
149) 여진족 내에 여러 세력이 경쟁했으므로 외교력으로 제압해야 했다.
150) 광해군의 굴복이 유목민 특유의 결집하는 특성을 자극하여 망했다.
151) 유목민은 계기를 주면 뭉치므로 외교로 막는데 반대로 키워주었다.
152) 2천명으로 출발한 누르하치는 실력이 아니라 명성으로 큰 것이다.
153) 유목민에게 명성을 만들어주는 얼빠진 짓을 광해군이 했던 것이다.
154) 홍이포와 조총과 편전이면 누르하치를 치고 세계정복도 가능했다.
155) 일본과 적극 외교하여 유황을 수입해야 조총부대를 키울 수 있다.
156) 소극적 외교로 유황의 조달문제에 홍이포와 조총을 써먹지 못했다.
157) 중세의 특징인 발달한 계급제도로 무역의존을 줄여서 가난해졌다.
158) 명의 해금령으로 무역을 하지 않자 외교를 할 이유가 줄어들었다.
159) 열심히 일해 잘사는 것도 좋으나 그냥 즐겁게 사는 것도 방법이다.
160) 조선은 명과 왜와 여진과 동시에 틀어져 외교몰락으로 퇴행했다.
161) 대신 중간계급 선비를 키워 내부 상호작용을 높이는 길을 찾았다.
162) 조선은 독자적인 길을 갔으나 성공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었다.
163) 예송논쟁은 전 국민이 가담하여 의사결정한 세계사의 특이사례다.
164) 전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쏟고 토론에 가담하는 것은 한국 뿐이다.
165) 예송논쟁 본질은 전쟁과 반정으로 왕실의 지지가 추락한 데 있다.
166) 왕의 존재의미가 사라졌으므로 존왕전략이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167) 청과 틀어졌으므로 중국의 인정을 받는 외교가 무의미해진 거다.
168) 몽골 부마인 고려왕이 귀족에 밀리듯 청에 항복한 왕은 쓸데없다.
169) 왕은 송시열을 이용한 이념전략으로 왕실 지지를 올리려고 했다.
170) 왕의 인기가 회복되나 송시열이 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171) 송시열을 이용해 지지를 회복하고 송시열을 죽여서 토사구팽했다.
172) 예송의 본질은 외교전략이며 이는 곧 국가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173) 지방호족 남인은 지방의 왕이므로 당연히 존왕전략을 추구한다.
174) 남인은 고산 윤선도와 같이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토호세력이다.
175) 송시열 중심의 이념노선은 청나라 입장에서 불편하므로 죽인다.
176) 청은 일부러 조선의 사신을 불교사찰로 불러서 선비를 압박했다.
177) 조선의 선비는 명나라 잔당의 반청운동과 연결되니 없애야 한다.
178)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유황을 수입하고 조총을 제작했다.
179) 청에 저항한 베트남, 대만, 준가르 및 일본과 연계 맞서려 했다.
180) 강희제의 활약으로 청이 안정되자 조선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181) 국가를 일본과 같은 귀족연합으로 보면 남인의 존왕노선이 맞다.
182) 노론은 이념집단이며 왕은 선비 대표자고 세계 선비는 연대한다.
183) 만국의 선비가 연대하고 왕이 대표하면 왕의 지지율이 올라간다.
184) 노론을 따르면 왕의 인기가 올라가고 대신 권력기반이 무너진다.
185) 유럽에서 기독교의 종교권력과 왕권이 이와 비슷하게 대립한다.
186) 왕은 초반에 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지만 결국 교회를 압박한다.
187) 조선 역시 왕은 선비의 대표자를 자처하나 결국 선비를 죽인다.
188) 예송논쟁을 공리공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189) 정확하게는 청에 반청세력이 사라져 외교의 의미가 사라진 거다.
190) 소중화 개념은 반청외교를 위해 유교의 본산지로 자처한 것이다.
191) 명나라 잔당은 대거 바다로 빠져나가 싱가포르 등지에 정착했다.
192) 탈청한 한족은 한동안 바다를 주름잡고 일본과 연결해 성공했다.
193) 동남아 화교세력은 모두 그 시기 반청세력의 맥을 이은 것이다.
194) 명의 해금령으로 원양항해 능력을 잃어 해양세력과 연결 못했다.
195) 남중국해는 반청세력이 지배했고 이에 남중국해 분쟁이 생겼다.
196) 소중화를 선언한 베트남은 일본과 무역하며 조선에 손을 벌렸다.
197) 조선은 베트남과의 연대를 거절하고 해양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198) 베트남은 원래 북쪽에 있었으나 청나라에 밀려 더 내려간 것이다.
199) 중국의 묘족이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베트남전쟁 원인이 되었다.
200) 일본은 왜란후 남아도는 일본도를 베트남에 팔며 바다에 눈떴다.
201) 정조가 청에 굴복하여 이후 외교를 포기하는 바람에 망한 거다.
202) 실학은 실체가 없으며 외교대상의 소멸로 유교가 몰락한 것이다.
203) 유교의 본질은 임금의 명을 받아 적국에 가서 외교하는 것이다.
204) 강희제의 활약으로 외교대상이 사라지자 통신사도 끊겨 망했다.
205) 성리학은 중화파와 만이파로 갈라 같은 중화파로 외교하는 거다.
206) 몽골의 지배에 시달렸으므로 중화파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7) 중국은 언제나 유목민에 밀렸으므로 중국의 편에 드는 것이 맞다.
208) 약한 편에 붙어서 강자를 견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올바르다.
209) 남왜북로에 시달리는 약한 명나라와의 연대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210) 조선초 왜와 명의 사이를 가르고 중간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었다.
211) 지금은 일단 약한 중국을 편들어 강한 미국을 견제하는 것이 맞다.
212) 광해군은 귀신이 무서워 궁궐짓기에 열심이니 암살을 겁낸 것이다.
213) 광해군의 두려움은 임진왜란으로 왕실의 인기가 떨어진 때문이다.
214) 약한 명을 갖고 놀던 조선이 이후 공론정치가 깨지고 쇠퇴해졌다.
215) 중국빠인 정조의 사대주의로 조선의 독립외교가 망해서 무너졌다.
216) 이후 이양선이 와도 중국에다 떠넘길 뿐 독자외교를 하지 않았다.
217) 어떻든 맞서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없고 곧바로 무너지는 것이다.
218) 상업세력인 장사성과 대결한 주원장은 해금령으로 상업을 막았다.
219) 명나라의 해금령으로 조선에서도 상업을 기피해 이후 가난해졌다.
220) 승려출신 주원장은 선비혐오로 8고문으로 과거답안를 제한시켰다.
221) 선비 5만명을 학살한 주원장 영향에 조선에서도 사화가 일어났다.
222) 조선의 몰락은 도교에 오염된 명과 청의 몰락과정과 정확히 같다.
223) 중국은 원래 벼슬을 사고팔았는데 조선말에 매관매직이 들어왔다.
224) 모든 것은 외교로 시작되며 내치도 외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다.
225) 외교로 의사결정모형을 보여주면 내부에서도 이를 복제하는 거다.
226) 대륙과 해양의 대결에서 조선은 눈치보다 마지막에 대륙에 붙었다.
227) 조선이 청에 굴복하여 대륙에 붙자 곧바로 멸망의 길로 직행했다.
228) 외교하지 않는 왕은 왕이 아니고 왕이 우스우면 모든 것이 망한다.
229) 존재하지 않는 명에 대한 사대가 아니며 반청세력 결집운동이다.
230) 오삼계를 비롯하여 반청세력이 많았으므로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231) 청나라는 준가르 대학살을 비롯 도성屠城으로 대학살을 일으켰다.
232) 몽골과 청은 혼인관계고 청은 다시 몽골과 혼인관계를 회복했다.
233) 몽골과 청은 원래부터 같은 집단이고 몽골의 부활은 막아야 했다.
234) 변발과 전족이 없이 한복을 입고 김치를 먹는건 반청저항 결과다.
235) 실리를 주장하며 굴종했다면 조선은 사라져서 중국 일부가 되었다.
236) 고려는 40년간 저항해서 중국과 달리 혼인동맹관계로 살아남았다.
237) 청은 몽골의 예로 혼인동맹관계를 주장하며 여성을 잡아간 것이다.
238) 광해군은 한국인을 중국인 만들려고 한 반역자이며 정조도 같다.
239) 정조가 조선의 공론정치 시스템을 해체한건 청의 압박 때문이다.
240) 청은 조선왕의 수명이 짧은 것을 거론하며 독재정치를 강요했다.
241) 청나라를 본받아서 벼슬을 사고팔자 조선은 확실하게 망해버렸다.
242) 명에 대한 사대 운운은 조선을 청에서 떼놓기 위한 일본협잡이다.
243) 광해군 찬양은 실리외교로 일본편에다 붙어라는 일본의 선전이다.
244) 실학은 허학이며 유교 본질은 외교이고 외교 망하면 유교는 없다.
245) 양명학과 고증학은 유교탄압의 결과이며 유교로는 볼 수가 없다.
246) 유교 본질은 외교, 외교관 마음으로 가족과 친구를 대하면 흥한다.
247) 약자가 연대하여 강자에 맞서 상호작용 높이는게 외교 근본이다.
248) 외교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라곤 없다.
249) 한국인의 이 전통 덕분에 의사결정능력이 발달해서 오늘이 있다.
250) 중국인은 체념하여 나서지 않고 일본은 안으로만 쥐어짜고 있다.
251) 안과 밖을 두루 살피며 균형을 찾아 끝없이 움직이는게 정답이다.
역사를 입에 답는 자들은 이넘이나 저넘이다 다 개새끼라고 보면 됩니다. 나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인간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