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디폴트로 정해져 있다. 반면 개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되어 있으니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훈련된 지도자는 죽음을 극복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럽다.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탄생을 경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자궁 속에서 어떻게 살그머니 빠져나왔지를 설명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탄생과 죽음은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다. 어차피 있지도 않은 것을 신경쓴다면 터무니없다. 차라리 외계인의 침략이나 걱정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간은 복제본이며 반드시 원본이 있다. 당신의 클론을 복제하여 당신 옆에 두었다고 치자. 클론이 죽는다면 당신은 죽은 것인가? 아니다. 당신은 클론의 죽음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클론 역시 자신의 죽음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원본이 살아있으므로 자신이 살아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클론은 자신의 죽음을 걱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걱정이 많은 동물이니까. 개미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것은 훈련으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당신은 복제된 클론이며 당신의 죽음은 걱정할 이유가 없으며 죽음이란 파견을 나갔다가 본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낙엽은 때가 되면 스스로 죽는다. 원본을 살리고 복제본은 죽는다. 죽어서 거름이 되고 거름이 나무를 살린다. 인간도 같다. 세포들은 수년 안에 전부 죽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교체된다. 뼈도 파골세포에 의해 해체되고 골수에서 조골세포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다. 당신은 무수히 죽고 또 새로 태어났다. 본질은 계획이다. 말기암 환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말기암 환자의 걱정은 이웃에게 빌린 돈 5천원을 갚아야 하는데 뭐 이런 거다. 결말짓지 못한 계획 때문에 당신은 죽음이 두렵다. 그런데 당신의 계획은 정확히 무엇이었나? 바로 그것을 모른다. 계획의 중단 때문에 인간은 고통받지만 정작 그 계획의 실체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뭔가 더 해봐야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을 뿐이다. 그 계획을 정확히 아는 순간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복제본의 계획은 원본에 있다. 당신의 진짜 계획은 인류의 계획에 있다. 재미있는건 탄생 이전에 대해서는 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느냐이다. 죽음 이후가 두렵다면 탄생 이전도 두려워야 한다. 탄생하기 이전에 137억년 동안 당신 없이도 잘 굴러왔다. 그 긴 세월 동안의 깊은 허무는 왜 두렵지 않은가? 아니 두렵다. 탄생이전이 매우 두렵다. 5억년 버튼을 누르고 왔기 때문이다. 탄생 이전의 긴 세월에 대한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5억년 버튼을 연타로 때려버리고 온 사람이라면, 길어야 80년 정도로 끝나는 드라마에 안도할 것이다. 게임은 계속되는 것이며 거기에 누구의 이름이 붙든 상관없는 것이다. 옛날에는 영화를 3시간씩 길게 해서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랬던 거다. 90분 정도로 끊어주는게 좋다. 오줌 참을 걱정 없이 콜라를 마실 수 있다. 내 인생이 조만간 끝난다는 압박은 내라는 자기소개형 언어습관에 잡혀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 버릇을 고치면 죽음의 압박에서 자유로롭다. 게임이 제대로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나의 출연여부와 상관없이 드라마는 계속 가는 거다.
죽음 정도는 극복해줘야 리더의 자격이 있는 거지요. 반대로 죽음이 두렵다면 그것은 자신을 리더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