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중의 역설을 아는 감독입니다.
뭐 흔한 레퍼토리라 딱히 감독이 발견했다고 말하기도 거시기하지만,
감독이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외국에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잘 느낄 수 있는 소재. 코펜하겐이라는 영화도 비슷한듯.
인간의 이중성 혹은 삼중성은 결국 갇힌 공간 속에서만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들이 홀라당 도망가버리면 엮이지 않으니깐. 대개 괜찮은 영화들은 거의 비슷하네요.
인간은 대개 역설의 끝에서 뒤돌아보며 순간, 이중의 역설을 발견하는데,
이때 언어를 뛰어넘는 복제가 일어납니다.
감독은 그 순간에 음악을 깔아줍니다. 자연스럽게 당신의 마음속에서 고개든 그 꽃이
홀로 피어남에 부끄럽지 않도록, 로맨스, 네, 로맨스는 그 로맨스가 아닙니다.
역설의 제목으로 이목을 끌고, 영화는 엎치락 뒤치락 막장으로 흘러가고, 결국 모든 것을 소진,
그 순간 당신은 이중의 역설을 발견하고, 또 복제하고,
이제부터 이야기는 진짜로 시작됩니다.
하, 사랑합시다.
감독이 배역 찾는 재주가 있는듯. 역시 영화 배우와 모델은 얼굴이 밋밋해야 몸으로 연기를 시작하는듯.
한국인하고는 대화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문득 대화가 안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외국인하고 대화를 하면 당연히 말이 안통하는데,
같이 놀다보면 대화가 별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특정한 분위기를 가진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같은 상황을 겪은 경우가 많고 말이 잘 통하고, 그래서 우연처럼 보이는데,
외국인과 가식적인 모습을 주고 받고
한국인과 솔직한 대화를 할 것 같지만, 그렇게 못하고,
외국인과 말이 아닌 언어로 소통에 성공하는 모습이 영화에 나옵니다.
외국에서 외국인과 자국인을 번갈아 만나다보면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일종의 체험담 같은겁니다.
말 안통하는 외국인에 답답해하다가
말 통하는 한국인을 만나서 기뻤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오히려 더 외국인 취급을 받고
길거리 노숙자 흑인 할배, 프랑스의 아랍인, 영국의 초딩 담배피는 소년과
한 번의 눈빛으로 신뢰를 보여주는 완벽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된 거죠.
이방인끼리는 말이 잘 안 통하니깐 사건으로만 친해질 수 있는데,
이게 좀 귀찮은 거 같아도, 말통한다고 무턱대고 친하다는 전제를 깔았던 한국인보다는 낫더라고요.
한 번은 런던에서 한국인 관광객 학생들을 만나서 좋다고 담배도 얻어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거지 취급 받았을 때의 허무함.
반대의 예도 있는데, 외국인의 따뜻한 도움에 감동 먹었다가,
막판에 사진 콜렉션 용도였다는 걸 알았을 때 허무함.
최악의 하루라고 제목을 지었으니
영화내내 최악의 하루를 보여주다가 막판에 최상의 마무리를 보여주는데,
이렇게 다 말하면 나중에 보는 사람이 재미가 없을듯.
그래서 이중의 역설은?
알고보니 여주가 컬렉션 용도로 일본인을 대접했다는 말은 아닐테고.
영화 보고 재미타령 하는 넘은 발로 궁뎅이를 차주십시오.
이런 건 이중의 역설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 같은데,
정설 : 좋은 하루
역설 : 안 좋은 하루
이중의 역설 : 알고보니 좋은 하루
정설 : 사실을 말한다. > 실패
역설 : 거짓을 말한다. > 실패
이중의 역설 : 사실을 말한다. > 성공
진짜라고 생각했던 한국인과의 만남은 가식이고,
가식이라고 생각했던 외국인과의 만남 속에서 말이 잘 안 통하니깐
오히려 소통하는 모습이 영화에 나옵니다.
여주의 가식이 들통나는 모습이 드러나는 모습도 나오는데,
약하긴 했죠.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하실 말씀이 뭔가요?
직설적으로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궁금합니다. 그냥 얘기를 해주세요.
언어(문화)가 통하지만 소통이 안된다. (설)
-> 언어(문화)가 통하지않자 오히려 진정한 교감이 오간다. (역설)
-> 그런데 언어가 안통하는 놈하고 살다보니 공통의 언어(문화)가 생기고야말고 결국 또 소통이 안되더라
원래 인간끼리 소통은 잘 안되는거다 (이중의 역설)
여기까지 가줘야 이중의 역설 아니던가요?
우디알렌 영화들이 맨날 여기까지 가던디....
영화평마다 결말을 이야기 안해놔서 궁금한거 뿐입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날은 운수나쁜날이었죠. 이건 역설입니다.
마누라가 죽어서 잘됐다고 휘파람을 불렀다면 이중의 역설이 되겠으나 그건 아니고.
최악의 하루가 알고보니 최선의 하루였다면 역설이죠. 이중의 역설은?
정설.. 남녀는 순수한 사랑을 한다.
역설.. 남녀는 저마다 야심을 숨기고 상대가 배려해주기를 원한다.
이중의 역설.. 남녀의 만남 그 자체가 숭고할 뿐 사랑같은 소리 하는 넘은 오백방 맞아라.
뭐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데 과연 그런지는 영화를 본 사람이 알겠고.
이런 식의 홍상수 아류들은 뻔한 레파토리가 있잖아요.
이 영화도 남녀가 저마다 의도를 숨기고
이 여자는 천사야. 천사니까 나를 배려해줄꺼야 따위 찌질한 망상이나 하고
자신은 상대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이기적인 보통 한국남자와
역시 이기적인 보통 한국여자를 전시하여 보여주는 걸로 가지 않을까
전남자와 현남자가 맞닥들인건 여자 입장에서 최악이긴 하죠.
그래서 둘을 순식간에 정리했으므로 최선의 하루라는 건지가 제가 궁금한 거죠.
그니까 궁금한건 감독이 연애에 대한 판타지를 깼는지
아니면 반대로 연애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었는지 그걸 묻는 겁니다.
제대로 된 감독이라면 연애에 대한 환상을 깨려고 했겠지요.
홍상수는 그저 판타지를 깰 뿐 그런데 영화는 왜 찍었는지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홍상수의 한계를 극복했느냐가 중요한 거지요.
영화평으로는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서울이라는 공간 그 자체에 카메라를 맞추고
서울이라는 공간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설레고 정겨운 공간이며
누군가를 스쳐가듯이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
연애한다며 커플티 입고 다녀서 솔로 괴롭히는 넘은
전부 벼락맞아 죽어버려라 일케 가야죠.
홍상수는 그런게 없고 일단 공간이 너저분함.
하여간 연애도 안해봤는지 홍상수는 지저분한 포장마차 같은델 돌아다님.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고 연애질 하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냐고?
홍상수보다 한 발짝만 더 가면 됨.
우디알렌은 뉴욕을 사랑함. 그게 중요함. LA는 개나 줘버려. 이게 이중의 역설.
정설.. 뉴욕에서는 사랑을 한다네
역설.. 알고보면 저마다 꿍꿍이가 있고 거짓말이 난무하지. 사랑 좋아하네.
이중의 역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뉴욕의 활력이자 매력이라네. 부럽지? LA 개새끼 해바.
홍상수 영화가 한국영화 발전에서 일견 의미가 있다고 하길래,
지난 영화를 쭈욱 봤지만, 제 아이큐로는 이해가 불가능해서 홍상수와 비교는 못하겠고,
다만 한가지 느낌은, 홍상수 영화는 늘 "평범한 관계지만 사실은 다 좆같은 거야"라고만 말하고 끝냈다면,
이 영화는 그 거짓의 끝에서 발견하는 건조한 만남을 보여줍니다.
(아직도 난 왜 홍상수 영화가 평단에서 좋은 평가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음.)
서촌에서 둘의 첫만남은 길안내하는 외국인이라 뻔한 가식으로 실패,(주인공은 한국 여자와 일본작가)
"어머나 작가세요?, 전 연기자에요(사실은 배역이 없음)",
"출판 기념회 하러 왔어요.(출판 기념회에 팬이 없음)"
작가랑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현 남친을 보러 남산으로 온 여자는 미친놈이 실수로 전여친 이름을 불러서 실패,
만나던 전돌싱남친은 여자 트윗을 보고 여자를 보러 남산으로 왔고, 현남친하고 헤어진 여자는 똥차라도 탈 생각이었지만, 미친 놈이 재결합한다고 고백해서 실패,
이 미친 전돌싱남친은 스토커마냥 줄줄 따라다녀서 전돌싱남친과 현남친, 그리고 여자 셋이
남산에서 우연히 같이 만나는 바람에 여자는 "아 ㅅㅂ"하는데,
왠걸 남자 둘이서 소주 먹으러 가서 여자만 바보되고 실패,
잘나가는 줄 알았던 일본 작가는 한국 출간회에 팬이 한 명도 없다가 그나마 팬이라는 기자를 만나는데, 기자는 작가님 소설은 왜 해패엔딩이 아니냐고 징징대서 실패,
시작은 흥인줄 알았으나 망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두 주인공이 마지막에 만나는데,
자신들의 거짓담을 나누면서 바보같이 웃다가,
극중 작가가 자신의 소설 중 한 장면을 이야기 하는데,
영어 실력이 안되는데 말하려니깐 실패,
그래서 그냥 여자도 못알아 듣는 일본어로 그걸 묘사하는데,
이게 어디서 본 장면 같기도 한데, 묘하게 잘 어울려서 성공.
끝까지 언어로는 소통 불능, 서로 뭔 소리 하는지 파악도 불능.
결론적으로 서로 딴소리, 근데 분위기로 소통 성공.
하루종일 실패했는데, 이제야 서로의 삶을 어설픈 영어로 이해하기 시작,
여자 : 전 거짓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쪽이랑은 거짓말 하기도 어렵네요.(영어로 해야 하니깐. 극중 설정이 영어실력 최하로 나옴. 둘다 자국어만 할 수 있음.)
아래 이미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와 남자의 거리
어색한 두 남녀를 어두적적으로 겨우 감싸안음.
아무래도 제 언어로는 표현 불가. 아무리 써도 맘에 안드네요. 괜히 감독한테 미안.
딱 이런 느낌인데,
마지막에 일본작가가 여자한테 일본어로 자신이 만드는 소설은 비극이지만 사실은 희극이에요라는 말을 하는데,
당연히 여자는 못 알아 들음. 근데 여자 표정이 알아듣는 표정. 이건 가식이 아님.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만 알아듣는 여자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근데 분명히 알아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앞만 보며 걷습니다.
이중의 역설은 아니죠.
이 영화는 그냥 한국인이랑은 말은 안 통하지만 소통은 안돼. 하지만 외국인이랑 말은 안 통해도 소통은 된다는 '보통 상식'에 의한 영화인데. 거기다 남자감독의 판타지 플러스.
마지막에 여자가 알아들었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까요? 말이 통하는데 알아들었다고요? 정말? 그냥 알아들은 척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알아들었다면 왜 서로가 아닌 앞만 보며 걸었을까요?
이 영화는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보통 상식을 말하고 있죠. 그 언어를 뛰어넘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근데 정말그게 진짜 소통이라고? 언어가 안 통하는데? 언어가 불완전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제대로 말할 줄 모른다는 게 구조론의 주장인데.
정말로, 소통이 될까요? 소통이 되어봤자 일회용에 불과한 것을, 그게 진짜 소통입니까?
그곳에 살게 되면 소통이 안됩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의 마음일 때만 소통이 된다는 착각일뿐.
홍상수 영화랑 비슷한 건 역시나 남자 감독이 찍은 영화라는 거. 여자가 아닌 남자가 보는 여자를 찍는다는 거. 그러나 이 영화는 홍상수보다 못한 게 홍상수는 솔직하기라도 했습니다.
여자가 거짓말을 안한다고 말하니 정말 거짓말을 안하는 걸까요? 여자나 남자나 쭉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모르는 것일뿐.
이 영화는 이중의 역설이 아니라 역설도 못 간 영화입니다.
가식과 거짓말이 난무하더라도 사랑이거든? 란 거짓을 포장하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하면 꺼지라고 해야죠.
소통했다는 착각, 근데 마지막 장면에서야 그걸 깨닫고 서로를 외면한 채 걷죠. 그러다 그 진실을 외면하고 또 거짓을 꾸미겠지만.
소통은 한 순간만 가능합니다.
영원한 소통이 있다는 전제가 보통 사람들의 판타지고 억지죠.
어차피 불완전한 언어교환으로는 소통이 불가능. 언어가 불완전하다는게 상식인가요?
언어로 소통이 가능할까요? 성공하셨나요?
제가 여기 있는 누군가를 말로 설득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전 한 번도 말로 사람을 설득해 성공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원래 불가능. 말이란 하면 할 수록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어로 상대를 설득하려 합니다.
모두다 실패. 일부 성공으로 보이는 것도 이리저리 하다보니 상황이 연출되어 할 수 없이 본질이 드러나,
각자 눈치껏 상황을 살피고 겨우 성공.
제가 본 대부분의 연인들은 헤어질 때 서로를 이해하더군요. 물론 욕은 하지만.
손잡고 랄랄라를 해서 굳이 확인하는건 소통이 아닙니다. 그건 거짓.
둘이 뭔가를 주고 받으면 교환입니다.
각자가 마음 속에 품어야 소통입니다.
인간이 서로에게 기대고 영원히 만나는게 소통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이미지를 던져 놓고 헤어져야 진짜 소통이 아닐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는 소통할 의도가 없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졌어요.
근데 소통이 '됩니다.'
우연은 그 우연이 아닙니다. 가보진 않았지만, 어둠이 내리는 남산의 산책로에 어떤 사람들이 모일까요?
발 아래 어둠으로 불빛이 깜빡이는데, 한 숨 쉬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그곳에 모였을까요?
한순간만 가능하단 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죠. 정말로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긴밀한 소통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여행자가 있을까요?
그 소통이 인생에 흉터처럼 영원히 남아있어야 진짜겠죠. 정치에 관심 없었지만 친구의 죽음을 맞게 된 문재인처럼 말이죠. 그 흉터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복제되어야 진짜겠죠. 이 영화는 흉터는커녕 할퀴지도 못했죠.
손잡고 랄랄라 하는 것도 이 영화에서처럼 입 다물고 표정 연기만 하는 것도 소통이 아니죠. 사랑이 아니죠.
두 남녀가 만나서 무슨 의사결정을 했습니까? 아련한 이미지를 던져놓아봤자 자기 위안용에 지나지 않겠죠.
진짜는 에너지죠. 둘의 마지막 모습이 에너지 한톨이라도 느껴지던가요. 그들이 무슨 의사결정을 했던가요?
전 그들과 전화로 혹은 SNS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가끔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방해됩니다.
잠깐의 여행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한달동안 씻지 않은 냄비에 소세지와 케쳡을 버무려, 숫가락으로 냄비의 벽면을 긁으면 이전의 요리로 눌러퍼진 검은색 케쳡이 숫가락에 묻을것 같은데, 아저씨는 알콜과 담배로 찌들고 면도도 하지 않았으며 온 방구석을 쓰레기로 채웠고, 손톱에는 때가 끼어 더러워진 손으로 튀긴 생선을 북북 찢어 저에게 건내며, 맛있게 먹으라며 한 숫갈 떠 주시는 그걸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먹었던 경험입니다.
그 독일의 불체자, 흑인 할배와는 서로 전화가 없어 이후로도 어떤 연락도 주고받을 수 없지만, 전 아직도 그 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케냐출신인 그 분은 고향에서 친구가 상어에 먹혔다는데, 또 자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완성할 수 있다며 방한구석 가득한 책을 보여주는데, 전처와의 자식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떠날 수도 없다는데, 서로의 그 어설픈 영어로는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노숙으로 길거리 벤치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책을 읽던 저에게 다가와 한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제 손을 이끌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전 그 순간 그 분의 눈빛에서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아직도 인간에 대한 실낱같은 신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요. 저도 여행을 다녀본지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그래서요? 라는 겁니다. 그 다음 단계는요? 신뢰요? 좋지요. 하지만 그것뿐이지 않습니까? 이 영화에서 보셨던 게 그런 거라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정설입니다. 이중의 역설이 아니지요.
좋은 밤 되십시오.
좋은 밤이란 게 뭔가요? 더이상 할말이 없으시다면 그렇게 말씀하셔야죠. 잠자리에 들면 좋은 밤인가요? 답글을 그만 달면 좋은 밤인가요? 제가 챠우님에게 무슨 유감이 있어 답글을 달겠습니까. 제 이야기를 한 것뿐입니다.
저도 제 이야기를 다해서 더 이상은 할 얘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밤 되시라고 한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거든요. 이제부턴 각자의 몫이죠.
각자의 몫이라고 선을 처음부터 그으셨다면 그걸로 된 거겠죠. 챠우님도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슈에님과는 상관없고,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연인 혹은 친구의 말을 다 이해합니까?
상대의 말을 다 이해해서, 지금 함께 웃고, 싸우고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게 정상입니다.
이해하려들면 오히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함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표현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굳이 상대의 입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지고 볶던 함께 있다. > 확인 끝.
누군가가 당신에게 사기를 쳤습니까?
당신이 동의한 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습니까?
당신이 동의한 겁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데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게 사건의 법칙입니다.
이 영화는 순수에서 거짓의 흐름을 그리고 다시 거짓을 아는 순수를 보여줍니다.
물론 처음의 순수와 나중의 순수는 다르겠죠. 다만 인간의 언어가 길어질뿐.
그래서 뭐가 이중의 역설이라는 건지?
뭐 스포일러면 어떻습니까? 천만영화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