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저서 '나의 투쟁' 143p~ 144p '세 가지 신문 독자 그룹'
신문의 독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읽은 것을 모두 믿는 사람들,
둘째는 어떤 것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
셋째는 읽은 것을 비판적으로 음미하고 그 뒤에 판단하는 사람들
첫째 그룹이 수적으로 보아 최대의 그룹이다.
그들은 대중으로 이루어져 있고 국민 중에서는 정신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만한 능력도 없으며 다소 무능하고 무지해서 인쇄된 모든 것을 믿는다.
그들의 일반적 태도는 거의 예외 없이 다른데로부터의 외적 영향에 환원된다.
둘째 그룹은 수적으로 매우 적다.
그들 중 일부는 처음에는 첫째 그룹에 속했으나, 오랫동안의 환멸을 겪은 후 인쇄되어 눈에 비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신문을 싫어하여 읽지 않든지, 그 내용이 다 허위라고 굳게 믿는다.
그들은 진실에 대해서도 늘 의심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힘들다
그들은 모든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일에 대해서 무익한 인간들이다.
셋째 그룹은 그 숫자가 가장 적다.
그들은 타고난 소질과 교육에 의해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이 판단을 가지려 한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두뇌를 활동시키면서 신문을 읽는다.
그러므로 편집자의 입장에서 보면 쉽지 않은 상대이며, 실제로 저널리스트들은 그런 독자를 조건부로만 좋아한다.
네이버에 '부정적인 사람' 이렇게만 검색해도 무슨 인종차별하듯이 긍정적인 사람은 좋고 부정적은 사람은 나쁘다 이런 식으로 몰고 나가는 경향이 강하네요.
우선 우리는 생명체로서 질문을 해볼 때
너 살아갈 거야? Yes!라고 외치는 사람을 좋아하지 No!는 원치 않거든요.
생명체로서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스트레스이니 당연 덜 받는 걸 좋아하죠.
그러니 주변에만 있어도 내가 지금까지 Yes!라고 외치던걸 No라고 하니깐 일단 ㅈㄴ 기분 나쁜 거예요.
그리고 No라고 하는 사람들에 이야기를 들어보려니 권력전에서 지고 들어가야 하니깐 죽어라 사정은 듣지는 않고 차별하는 것이죠.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것이죠.
게다가 의심 자체를 안 하니깐 이용해먹기가 쉽겠죠.
물론 국가 입장에서도 그렇겠으나 상사와 하사 부모와 자식 선후배 친구 이런 식으로도 편한 거지요.
친구에게 부탁을 하더라도 Yes 하는 사람이랑 No 하는 사람이랑 있음 Yes를 택하는 거지요. 그렇게 Yes랑 친구 먹는 거예요.
그렇게 Yes끼리 친구 먹다 보니 No 하는 사람은 소외자로 몰리는 거죠.
저는 트라우마 때문에 부정적인 사람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긍정하는 사람이랑 부정하는 사람이랑 별다를 거도 없는데 사람들이 긍정하는 사람만 취급하는 게 꾀나 의아해했죠.
그래서 생각한 게 긍정적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사람들이란 깨우침에 이르기 위해서 꾀나 필요한 존재인데 부정적인 사람들의 세력이 너무 약하다 보니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완전한 무균 상태로서의 동물처럼 말이죠. 그러니 긍정적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사람을 소개하는 건 절대 안 먹히니깐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이죠. 이제는 부정적인 사람도 긍정적인 사람도 아닌 아는 사람을요. 이중의 역설을 거친 가짜 아는 사람 말고 진짜 아는 사람이요.
히틀러가 세 가지 신문 독자를 이야기하면서 셋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도 아니고 부정적인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죠. 아는 사람은 사실 긍정하는 사람인데 첫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과 구별을 해야 하니 아는 사람이죠. 결과적으로는 Yes에 속하지만 Yes를 Yes 하지 않고 No 하며 No를 Yes 하지 않고 No 하는 No No를 통해 Yse인 아는 사람이죠.
두 길이 있는데 한 길을 택해보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좋다고 판단하여 나머지 길을 보류해둔다면 경험과 첫째 길이 대칭이 되고 둘째 길도 가본다면 첫째 길과 둘째 길이라는 대칭이 하나 더 생기죠. 둘째 길이 첫째 길보다 좋으면 아싸리 좋은 거고 안 좋다고 한다면 과거의 잣대가 아닌 현재의 잣대로 첫째 길을 평가할 실질적인 기준이 생기는 거니깐요. 혹시 첫째 길이 자연재해로 인해 막혀버리거나 그러면 둘째 길을 상대적으로 나쁘다 해도 아는 길이니 가치가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둘째 길에 안 가려고 하는 것은 귀찮거나 무섭거나 스트레스가 걸려 있는 거지요.
대신에 첫째 길부터 좋지 않다고 판단되면 남아 있는 길을 생각해볼 텐데 그건 동물들도 다 하는 거고요.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게 사람이 과연 문명인이냐 동물이냐인 거 같네요. 정말 사람이 스트레스의 의해 좌우되는 동물이라고 한다면 스승이 제자에게 길을 알려줄 때 바른길은 좋은 길이 아니고 나쁜 길을 알려줘서 회의하게 만드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만화 나루토에 보면은 사스케가 나중에 정점이 되는데 그런 연유로는 친형인 이타치가 사랑을 증오로 돌려 말해서 '내가 증오스러우면 강해져서 복수하라고' 동기를 극으로 끌어올린 게 진짜 신의 한수이긴 했죠. 아 물론 사스케가 괴롭다는게 문제...
저의 기준
초딩=긍정 / 중딩=부정 / 어른=아는 사람
혹은 이렇게 바꿔봐도 될거 같네요.
초딩=모르는 사람 / 중딩=부정 / 어른=긍정
검색에는 제가 원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대체로 안나오는데 조금은 닮은 꼴이 있으니 양해좀 해주세요.
구조론에서 세력전락과 생존전략은 2의 규칙이고
초딩 중딩 어른은 3의 규칙이니 이 둘을 엮어 보기에는
초딩에서 중딩이 되는 과정을 생존전략
중딩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세력전략으로 보면 되겠군요
제가 사회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초딩→중딩→어른의 시간순서가 자연스러운 것인데
사회는 초딩→중딩→초딩이죠.
일단 중학생이 되면 중2병이 걸려서 말을 안들으니 부모(국가)도 친구(사회)도 싫어하니깐 다시 초딩되라 이거죠.
중2병이 정체성 확립의 의해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사회는 그걸 당장의 스트레스 때문에 막아버리는거 같네요.
검색에 나오는 부정적인 태도는
세력전략이 아니라 생존전략을 쓰는 즉 보수꼴통을 말합니다.
자기논리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말하길 기다렸다가 반대하는 방법으로 말하는 거지요.
구조론의 긍정/부정과 다른 맥락일 수도 있습니다.
몰라서 의사결정을 위임하거나
조금 아는데 자신이 없어서 뒤에서 토만 달거나
잘 알기에 주도하는 것인데
즉 검색에 나오는 부정적 태도는 의존적 태도인 거죠.
빈정거리기 잘 하는 인간들 있죠.
1) 초딩은 의사결정을 강자에게 위임한다.
2) 중딩은 의사결정하고자 하나 할줄 모르므로 남이 설계한 판에 의존하여 결정한다.
3) 아는 사람은 스스로 판을 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