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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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741 vote 0 2008.12.30 (10:33:04)

[최종이론은 가능한가?]

‘앞으로 25년 안에 종교와 미신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엣지(edge.org)’가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낙관하는 것은?’이라고 물은 데 대한 답변들 중 하나다. 엣지는 150여명의 과학자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매년 ‘올해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같은 전망에 대해 ‘TV나 인터넷을 통한 정보획득이 더 손쉽게 이뤄지고 있고 과학자들이 모든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최종이론 발견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기사발췌)

인터넷시대이다. 흩어진 인간의 지혜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바야흐로 최종이론이 나와야 할 때이다.

최종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기준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자는 것이다. 개별적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은 많다. 모든 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은 없다.

무엇인가? 부분을 설명하되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전체와 부분 사이, 부분과 전체 사이에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둘 사이를 연결하는데 따른 문제이다.

‘부분과 부분을 어떻게 연결하여 전체에 도달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할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이 21세기에 과학계가 도전해야 할 최종이론이다.

그것은 관절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링크다. 그것은 사이다. 그것은 구조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둘이 만나서 하나로 통합되는 데 있어서의 밸런스와 평형과 소통에 관한 이론이다.

지금껏 인류가 고안해낸 모든 이론들은 해체되어 있는 낱낱의 부분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치이론이든 종교이론든 과학이론이든 경제이론이든 예술이론이든 다 그러하다.

이쪽을 맞추면 저쪽이 어긋난다. 정치를 맞추면 경제가 어긋나고 경제를 맞추면 문화가 어긋나고 문화를 맞추면 과학이 어긋난다.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가지를 동시에 해결하는 이론은 없다.

정치가와 예술가는 같은 별에 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고한다. 정치가의 방식과 예술가의 문제해결방식의 차이는 금성과 화성의 거리만큼 멀다. 그들은 행성처럼 병렬하여 제각기 운행할 뿐 통합되지 않는다.

빛의 이중성과도 같다.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 입자부분을 해명하면 파동부분이 어긋나고 파동의 성질을 정확히 설명하면 입자로 보이는 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

정치부분을 해명하면 종교부분이 설명되지 않고 종교부분이 설명되면 경제부분이 설명되지 않는다. 경제부분을 잘 설명하는 이론이 문화분야나 예술 분야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학자들은 이중적으로 행동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에서 빠져나간다. 휴일날 교회에서는 충실한 종교의 신도가 되지만 다음날 강의실에서는 자신이 하루 전에 했던 말과 행동을 180도로 뒤집는 내용의 강의를 한다.

그 결과는 끔찍한 재앙으로 나타난다. 모든 과학자와 지식인들이 부시 원숭이의 잘못된 행동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부시의 막무가내 행동을 제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자신도 이중적인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다른 분야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좌절한다. 차단된 벽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최종이론은 어디에 있는가?

최종이론은 하나와 둘 사이 그리고 둘과 하나 사이에 있다. 어떻게 하나가 나눠져 둘이 되고 또 둘이 합쳐져 하나가 되는가? 어떻게 부분이 자라나 전체가 되고 전체는 부분으로 나눠지는가?

인류는 아직 이 부분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다리를 제각각 해명하는 이론은 만들었으되 머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이론, 몸통과 팔다리를 연결하는 이론은 창안되지 않았다.

집은 지었는데 대문이 없고 자동차는 있는데 도로가 없다. 퍼스널 컴퓨터는 보급되었는데 그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인터넷 망은 가설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컴퓨터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이나 초끈이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 해서 그것이 최종이론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현미경의 배율을 높이는 일에 불과하다.

뉴튼이 낮은 배율의 현미경을 발명하여 인체의 기관 단위를 규명했다면 아인시타인은 더 높은 배율의 현미경을 발명하여 세포 단위의 구조를 파악했고 양자역학은 한 단계 더 높은 배율로 세포핵 내부를 관찰하고 있다.

더 높은 배율의 현미경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물리학 분야에서 최종이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최종이론은 종교를 해체하고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과학과 정치와 종교와 예술 사이를 연결하고 통합하는 이론이어야 한다. 학문은 논리학과 수학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최종이론은 논리학과 수학에서 나와야 한다.

종교는 종교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산업은 산업대로 각자 따로 놀고 있다.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먹히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종이론이다.

그것은 현미경의 배율을 높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자와 원자와 소립자를 더 잘게 쪼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패턴이다. 점점 더 잘게 쪼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규명하는 것이다.

최종이론은 하나와 둘 사이에 있다. 최종이론은 사이에 관한 이론이고 관절에 관한 이론이고, 구조에 관한 이론이고, 연결에 관한 이론이고, 변화에 관한 이론이고 소통에 관한 이론이다. 그래야만 한다.

하나와 둘 사이에 패턴이 있다. 현미경의 배율을 높이는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고 소립자를 잘게 쪼개는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고 오직 패턴을 관찰하는 방법으로만이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이론은 인과율의 확대적용에 불과하다

역사이래 인류가 고안한 모든 이론의 출발점은 인과율이다. 모든 학문의 기반은 수학이고 수학의 기반은 논리학이고 논리학의 핵심은 인과율이다.

인과율이 전개하여 논리학을 낳았고 논리학이 적용되어 수학을 낳았고 수학이 응용되어 과학을 낳았다. 논리학의 토대와 수학의 기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인류문명은 결국 인과율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인과율은 이론적으로 부실하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논리적 당위에 대한 선언의 형식을 띠고 있을 뿐이다.

원인과 결과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 그 매커니즘에 대한 규명은 아니다. 인과율은 부분에서 부분으로, 전체에서 전체로 가는 이론일 뿐이다.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세포 하나와 인체 전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부품 하나와 자동차 전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 지점이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변화가 있다. 변화는 어떤 매커니즘으로 일어나는가?  

인과율은 변화하기 전과 변화한 후를 비교한다. 하나의 상자가 있다. 상자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상자에는 입력과 출력이라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입력의 구멍에 A를 넣으면 출력의 구멍에서 B가 나온다.

그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그 상자 속을 들춰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인과율은 다만 그 상자 속에 들어가기 전의 A와 상자 속에서 나온 뒤의 B 사이의 관계를 추론할 뿐이다.

인과율은 원인의 A와 결과의 B를 논할 뿐 그 사이에 있는 상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원인 A가 입력이면 결과 B는 출력이다. 입력과 출력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저장과 제어와 연산이 있다.

● 인과율 - 입력 ≫ 출력

● 구조론 -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인과율은 다만 입력과 출력을 논할 뿐 그 사이에 있는 저장과 제어와 연산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이론이다. 그런 점에서 구조론은 인과율의 결함을 보완한다.

씨앗을 심으면 새싹이 자라난다. 씨앗이 원인이면 새싹은 결과다. 씨앗이 입력이면 새싹은 출력이다. 씨앗이 심어진 그 땅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이다.

인과율은 불완전하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과정이 있다. 변화가 있다. 변화와 과정을 규명해야 한다. 인과율은 결과와 원인을 논할 뿐 변화의 현재진행과정을 논하지 않는다.

씨앗이 땅 속에서 수분을 만나는 저장, 수분을 만난 씨앗이 발아의 방아쇠를 촉발하는 제어, 발아를 시작한 씨앗이 새싹으로의 전개를 조절하는 연산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패턴추적의 열쇠는 생태계의 진화

변화는 항상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일어난다. 부분에서 부분으로 혹은 전체에서 전체로의 변화는 절대로 없다. 개가 고양이로 둔갑하는 일이 없듯이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능이다.

어떤 존재 A가 외부에서의 개입이 없이 돌연 B로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열역학 제 2법칙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외부에서의 개입이 있어야 하며 본래의 A와 외부의 영향 사이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된다.

나무가 죽어서 거름이 되거나 혹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듯이 모든 변화는 전체가 부분으로 해체되거나 혹은 부분과 부분이 전체로 통합되거나 뿐이다.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이 열역학 제 2법칙을 충족시킨다.

감기의 전염은 인체의 한 부분에서 일어나지만 그 감기로 인한 발병은 인체 전체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곧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개인 것이다. 최종이론은 바로 그 점을 해명해야 한다.

나비효과는 부분과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북경에서 일어난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은 부분의 변화이지만 플로리다에서 일어난 허리케인은 전체의 변화다. 부분에서 전체로 비약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 역시 부분과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테제와 안티테제는 부분이지만 진테제는 전체다. 그러나 헤겔은 그 진테제를 본래의 테제와 구분하지 못한데서 퇴행하고 있다.

부분과 전체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변화가 있다. 변화는 패턴으로 나타난다. 헤겔의 정반합은 하나의 패턴을 이루고 있다. 변화의 패턴을 관찰했다는 점에서 헤결의 변증법은 유의미한 진일보다.

부분과 전체 사이에 변화가 있다. 변화는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의 패턴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닫힌계 안에서 성립한다. 닫힌계 안에서 1사이클의 순환구조의 패턴을 해명해야 한다.

이 점에 근접하고 있는 발상이 진화론이다. 변화의 패턴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분명 오류가 있지만 생태계의 진화는 명백히 일정한 패턴의 반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최종이론을 찾아내는 단서가 된다.

다윈은 변이설을 주장하고 있다. 다윈에 의하면 변이는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다윈의 진화론은 돌연변이설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패턴분석의 관점이 아니다. 잘못된 관점이다.

실제로 생태계의 변화를 관찰하면 모든 변이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일정한 수학적 패턴에 따라 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화는 변화다. 변화는 패턴에 지배된다. 변화가 패턴에 지배되는 이유는 부분과 부분 사이에 집합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변이는 다른 변이에 연동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변이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전인자다. 유전인자는 섹트별로 세트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섹트 안에는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가 세트를 이루어 동시에 전개한다.

사슴의 뿔이 길어지는 현상과 일각고래의 어금니가 길어지는 현상과 코끼리의 어금니가 길어지는 현상은 동일한 패턴을 이룬다. 인체의 한 부분이 진화할 때 관련이 있는 여러 부위가 연동되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진화는 돌연변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질서있게 하나의 방향으로 시스템의 안정화에 도달할 때 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일정한 안정상태에 도달한 다음에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다.

생태계의 진화야 말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규명하는 매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맞물리기와 맞서기를 통해 연동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섹트별로 세트를 이루는 것이다.

최초의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였고 그 세포가 수십조개나 결집하여 거대한 포유류 생명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매커니즘이 있고 매커니즘은 맞물리기와 맞서기를 통한 섹트별 연동성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진화과정 역시 생태계의 진화를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패턴분석을 통한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추론이 가능하다. 생명체가 세포라는 부분과 생명이라는 전체의 상호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면 컴퓨터 역시 1바이트의 정보라는 부분과 운영체제(OS)라는 전체의 상호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생명체의 진화에 있어서 패턴분석의 핵심은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가 가지는 머리와 몸통과 가슴과 팔다리의 세트가 하나의 세포 안에도 닮은 꼴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의 세포 - 세포핵, 미토콘트리아, 소포체, 세포막, 세포간 정보전달구조

● 하나의 생명체 - 머리, 가슴, 배, 팔다리, 감각기관의 세트

아무리 원시적인 동물이라 해도 제어기관(머리)와 감각기관(눈)과 동력기관(가슴)과 소화기관(배) 운동기관(팔다리)은 갖추어 있다. 이 중 하나라도 결핍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세포 안에 두뇌 역할의 세포핵과 가슴 역할의 미토콘트리아와 배 역할의 소포체와 팔다리 역할의 세포막이 있다.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세포간 정보전달 구조도 갖추어 있다.

컴퓨터 역시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이 각각 감각기관, 동력기관, 제어기관, 소화기간, 운동기관 역할을 한다. 1바이트 단위로 이루어진 하나의 반도체 안에도 이같은 구조가 있고 이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드웨어 전체 혹은 소프트웨어 전체에도 이와 같은 패턴의 구조가 있다.

그러므로 최종이론을 찾는 물리학 영역에 있어서의 진일보도 이와 같은 패턴인식과 그 적용의 방법을 통한 추론이어야 한다. 분자와 원자와 소립자 사이에 어떤 패턴의 변화가 있는지를 규명해야만 소립자 보다 더 작은 세계를 규명할 수 있다.

소립자의 세계에도 만나기와 맞물리기와 맞서기와 하나되기와 열어가기가 있다. 입력과 출력이 있고 저장과 제어와 연산이 있다. 분자단위와 원자단위와 소립자단위의 각단위에 제각각 세팅되어 있다.  

부분과 전체 사이에 패턴이 있다

인간은 현미경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정교한 메스를 가하여 조각조각 해체하는 방법으로 부분을 규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조직하여 전체를 구성하여 보일 수도 있다.

이때 빠뜨리는 부분이 있다. 부분들의 집합과 전체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질서라는 플러스 알파가 존재한다. 조립된 승용차와 조립되지 않은 자동차 부품의 무더기 사이에는 질서의 유무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원인과 결과는 부분과 부분, 개체와 개체 사이가 아니라 부분과 전체 사이에 존재하며 그 사이에는 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원인 A에 대한 결과 B가 아니라 A와 B를 한꺼번에 통일하는 C 대 이에 맞서는 A와 B에 대한 이론이다. C는 계다. 계는 닫힌계다. 닫힌계는 질서의 단위다.

기존의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를 통일하는 C(닫힌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중간과정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 질서의 고도화 곧 진화과정에서의 패턴에 대한 인식이 없다.

소립자와 원자의 관계도 진화의 구조 곧 질서의 고도화 단계를 가진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 생태계에는 진화가 존재한다.

● 닫힌계에는 질서의 고도화 과정이 존재한다.

양자역학이니 초끈이론이니 하는 접근들은 단순히 현미경의 배율을 높여가는 것에 불과하다. 최종이론은 단지 높은 배율의 현미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낮은배율과 높은배율 사이에 어떤 패턴의 변화가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사이에는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라는 질서의 고도화 단계들이 존재하고 있다.

최종이론은 질서의 고도화 단계에 의하여 추론된다. 뉴튼의 A, 아인시타인의 B, 그리고 양자역학의 C 다음에 막연히 미지의 D를 찾는 것이 아니라 A와 B 그리고 C 사이에 어떤 패턴의 변화가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D의 위치를 추론할 수 있다.  

A와 B 사이, 그리고 B와 C 사이에 일정한 패턴의 반복성이 존재한다면 D의 포지션을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은 ‘공간의 밀도’에 관한 것이다.

연금술사들이 물질(만나기)을 규명했고 뉴튼이 운동(맞물리기)을 규명했고 아인시타인이 힘(맞서기)을 규명했고 양자역학이 입자 단위(하나되기)를 규명했으므로 이러한 변화의 패턴을 적용할 때 그 다음에 올 고도화된 질서의 단위는 ‘공간 그 자체 밀도차’ 곧 ‘장(場)의 밀도’에 대한 규명이 된다.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기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낱낱의 개체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포지션을 할당받아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 존재는 일이다.

● 일은 포지션들의 집합이다.

만약 한 켤레의 신발이 존재한다면 그 신발을 신는 사람과의 관계를 떼놓고는 신발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의 집합인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를 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신발 한짝 만으로는 신발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왼발이 있으면 오른발도 있어야 한다. 신발이 짝을 가지듯이 사람도 짝이 있다. 남자 혹은 여자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와 그 둘 사이에서 난 어린이까지 설명해야 한다. 가족을 설명하는 것이 남자와 여자를 설명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설명하는 것이 가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전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그루 나무를 온전히 설명하려면 결국 생태계 전체를 전부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생태계 전체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나무 전문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다. 인과율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 최종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기준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 최종이론은 정치와 경제와 종교와 과학과 문화와 예술을 통일한다.

● 기존이론은 해체된 낱낱의 부분을 설명할 뿐이다.

● 최종이론은 부분과 전체 사이를 설명한다.

● 부분과 전체 사이에는 변화가 있다.

● 부분과 전체 사이의 변화는 패턴분석으로 추적할 수 있다.

● 부분과 전체 사이의 변화는 관절, 연결, 사이, 관계, 구조의 형태로 존재한다.

● 기존의 모든 이론은 인과율의 확대적용에 불과하다.

● 모든 학문의 기반은 수학이고 수학은 논리학, 논리학은 인과율에 의존한다.

●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 사이 과정의 매커니즘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 원인 A와 결과 B 사이에는 양자를 통일하는 C가 있어야 한다.

● 부분과 전체 사이에는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가 있다.

● 원인인 입력과 결과인 출력 사이에는 저장과 제어와 연산이 있다.

●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는 진화론으로 추적할 수 있다.

● 종의 진화는 변이가 아니라 유전정보의 섹트, 패턴, 지향성으로 전개된다.

● 물리학 역시 진화의 패턴분석으로 양자역학 다음 단계가 찾아진다.

● 존재는 일이다. 일은 포지션의 집합이다. 포지션은 질서를 가진다.  

단순히 최종이론이 ‘나온다/안나온다’ ‘된다/안된다’는 식의 선언적인 주장이라면 논할 가치가 없다. 최종이론의 의미와 논의의 맥락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이론이란 무엇인가? 비유하자면 언어의 문법과 같다. 새들의 지저귐이나 광인의 고함소리나 아기의 울음소리나 늑대의 울부짖음에도 문법이 있다.

문법이 없는 언어는 없다. 단지 세련된 문법과 어설픈 문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단순한 문법과 고도화된 문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어설픈 문법 - 자기감정 표현
● 세련된 문법 - 타인과의 소통

반투어처럼 단어인지 문장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문법도 있고 부시맨의 경우처럼 발성과 동작(보디랭귀지)이 뒤섞여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귀로 듣기만 해서는 의미를 알 수 없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봐야 이해가 된다.

문법은 진화하는 것이며 미학적 완성도의 수준에 따라 최종적인 문법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에는 반드시 이론이 있으며 최종이론도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론(理論, theory) 사물에 관한 지식을 논리적인 연관에 의하여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 놓은 것. 따라서 학문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론이 있다.(하략)’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학문이라면 반드시 이론이 있다’는 전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론이 없는 학문은 없다. 왜인가? 이론이 없으면 그 학문에 다른 사람이 연구실적을 보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나 교주 혼자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지만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기존의 학문에 보태어 가지를 치게 하려면 이론이 있어야 한다.

뒤에온 사람이 앞서간 사람의 성과에 추가하여 연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체계다. 즉 이론은 체계를 위한 이론인 것이다. 학문은 공동작업이므로 체계가 있어야 하고 체계가 있어야 하므로 이론이 있어야 한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언어는 공용이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듣고 말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문법이 없다면 전파되지 않는다. 소통하지 못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다. 언어는 무한정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단계에서 진화를 멈춘다. 한국어의 문법은 이미 언어의 최종적인 진화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서 일사이클의 주기를 완결시킨다. 동물 역시 생로병사의 한살이를 가진다. 완결된다. 언어는 의사소통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도달할 때 언어의 진화는 끝난다.  

마찬가지다. 최종이론이 필요한 이유는 기존의 학문이 소통의 단계까지 도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체계가 부실한 것이다. 종교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과 문화가 제각기 따로 노는데서 최종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이론은 완전한 체계, 완전한 시스템이며 완전한 시스템은 선구자가 와서 이룩해놓은 베이스 위에 후학들이 얼마든지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시스템구조의 완성인 것이다.

뉴튼이 고전역학을 이룩했을 때 이는 단순히 하나의 개별적인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보태어 심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동양에는 이것이 없었다.

뉴튼의 역학은 정치에도 경제에도 문화에도 두루 적용된다. 뉴튼은 하나의 비례식을 만들었다. 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비례식이 숨어 있다. 그것이 없는 학문은 없다.

뉴튼에 의해 인류는 통합적인 시야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연금술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뉴튼이 최종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인시타인이 뉴튼을 깨버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성리학의 주희가 형이상학을 열어 형이하학의 정통 유교를 깨버렸다고 볼 수 있지만 반면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성리학은 유교가 아니라 이단이라는 설이 있었다.)

즉 뉴튼이 이미 일차적인 의미에서 최종이론을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점차 발전하고 인지가 개발되어 뉴튼의 수준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복잡한 현안이 대두됨에 따라 한차원 높은 수준의 재통합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지금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사상은 접점이 없다. 완전히 별개의 시스템에 의해 별도로 작동한다. 이것이 이론의 한계이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뉴튼이 크고 느린 세계를 규명했다면 아인시타인은 크고 빠른 세계를 분석하고 있다. 양자역학이 작고 느린 세계를 연구하고 있다면 양자전기역학은 작고 빠른 세계다. 이처럼 서로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포메이션 안에서 포지션들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맞물려 있는 한 벌에서 한 짝이 결정되면 다른 짝도 이에 연동되어 자동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마찬가지로 맞물려 있는 기존 이론들의 포지션들을 분석하여 새로운 이론의 포메이션을 찾아낼 수 있다.

● 뉴튼 - 크고 느린 세계
● 아인시타인 - 크고 빠른 세계
● 양자역학 - 작고 느린 세계
● 양자전기역학 - 작고 빠른 세계
● ( ? ) - 공간의 밀도

이렇게 포지션이 정립되면 다음 포지션은 어디쯤일지 추론할 수 있다.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김이 없다.

이러한 맞물림의 구조는 무한정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메이션 안에서 정해져 있는 자기 포지션을 하나씩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턴분석을 적용하면 뉴튼과 아인시타인의 상호관계를 보고 양자역학과 양자전기역학의 상호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양자전기역학은 양자역학에 상대성이론을 적용하여 놓은 것이다.

뉴튼에서 아인시타인으로의 전개에서 양자역학에서 양자전기역학으로의 전개를 자동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패턴을 적용할 때 최종이론의 위치 또한 분명해진다.

원시인들은 명사만으로 의사소통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기들은 엄마 찌찌 맘마 응가 쉬야 등 명사만을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사만으로는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당연히 동사가 따른다.

명사와 동사가 결합하여 주어와 술어, 체언과 용언의 구조로 문장이 만들어진다. 명사를 발음할 때 동사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허기를 느끼는 것이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 욕구불만이 있다. 왜인가? 둘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맞물려 쌍의 한 짝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아서 채워넣으려는 본능의 끌림이 작동하는 것이다.

뉴튼과 아인시타인이 느린세계와 빠른세계로 맞물리듯 뉴튼-아인시타인 대 양자-양자전기역학도 큰 세계와 작은 세계로 맞물린다.

● 1과 2의 맞물림
● 1/2 과 3/4의 맞물림
● 1-≫3과 2-≫4의 맞물림

천칭저울은 두 접시가 맞물려 있다. 수평의 두 접시의 맞물림에 연동되어 수평의 두 팔도 맞물려 있다. 두 팔에서 두 접시로 가는 수직적인 맞물림에서 천칭저울의 중심추가 찾아진다.

두 개의 수평적인 맞물림이 하나의 수직적인 맞물림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그렇다면 양자전기역학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하는지가 자명해진다.

● 양과 운동의 맞물림
● 힘과 입자의 맞물림
● 운동≫힘 대 양≫입자의 맞물림에서 질의 유도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위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이는 건물의 구조에서 두 개의 수평으로 가로지른 보가 그 맞물림으로 하여 하나의 수직으로 곧추 선 기둥과의 맞물림을 끌어내는 것과 같다.

나라마다 품사가 다르지만 주어와 술어, 체언과 용언의 기본구조는 다르지 않다. 단어들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완결시키지 않는다. 뒤에 어떤 용언이 따르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단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맞물림이 의미를 2차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도와 대응의 구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의미는 단어 자체에 고유하게 내재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유도되는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다. 일상적인 생활의 소소한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발명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완전한 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둘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종이론을 논한다는 것은 지금 무엇이 불편한가를 논하는 것이다. 어디가 불편한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조사가 없고 전치사가 없다. 관절이 없고 소통이 없고 연결이 없고 사이가 없고 링크가 없고 닫힌계가 없다. 필요가 드러났으니 이론 또한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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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이론은 가능한가? 김동렬 2008-12-30 2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