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構造)라면 딱딱한 틀을 연상한다. 그러나 구조는 딱딱하지 않다. 구조는 부드럽다 못해 투명하다. 구조는 무형의 것이다. 만질 수도 없고 쥘 수도 없다.
집은 벽돌로 지어진다. 그러나 목수는 딱딱한 벽돌이 아니라 부드러운 자와 콤파스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다. 이를 규구(規矩)라 한다.
구조론은 목수의 자와 같고 콤파스와 같다. 목수는 자와 콤파스와 추와 수평과 먹줄을 사용하여 공간을 조직한다.
먹으로 점을, 자로 선을, 콤파스로 각을, 추로 입체를 조직하고 수평으로 공간을 조직한다. 목수는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다 지어진 집에서 자와 콤파스를 찾을 수 없다. 목수는 자와 콤파스로 집을 짓는데 그 지어진 집에 자도 없고 콤파스도 없다. 그러나 공간의 질서가 있다.
구조론은
● 존재의 질서를 규명한다.
● 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이론이다.
● 과학의 이론을 조직하기 위한 통제원리다.
● 구조주의적 세계관과 철학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 인과율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구조론의 유도과정
*** 유도한다는 것은 불러온다는 뜻이다. 메모리가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를 불러오듯이 작업공간으로 불러오는 과정의 절차가 있어야 한다.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에 진입하듯이,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듯이, 조리될 생선이 도마위에 올려지듯이 유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무지(無知)와 지(知)
처음 인간은 그냥 있었다. 가만있으려 하는 인간을 가만있지 못하게 한 것은 변화다. 비와 바람과 햇볕의 부단한 변화가 인간을 성가시게 했다.
인간은 본래 백지와도 같이 순수한 존재였다. 지(知)도 없었고 무지(無知)도 없었다. 그런데 변화가 끼어들어 그 백지를 얼룩지게 하고 변색하게 한다.
변화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벽을 쌓아 변화무쌍한 비바람을 막았고 변질하지 않도록 곡식을 저장하여 굶주림을 막았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무지(無知)에서 지(知)로 나아가야 했다. 변화가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훼손하고 인간 그 자체를 변질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를 막을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다. 변하지 않는 진리로 변화하는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존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존재의 질서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를 극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다. 진리를 성립시키는 것은 존재의 질서다.
존재는 질서를 가진다. 질서를 파악하게 하는 것은 자연의 패턴이다. 패턴을 성립시키는 것은 계의 평형이다. 평형은 닫힌계 내에서 구조의 평형이다.
구조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추상과 연역의 방법으로 구조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추상과 연역에 성공하는 것이 곧 구조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 세상은 변한다.
●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다.
● 진리를 성립시키는 것은 존재의 질서다.
● 존재의 질서가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자연의 패턴이다.
● 자연의 패턴을 성립시키는 것은 계의 평형이다.
● 평형은 구조의 평형이다.
● 추상과 연역으로 구조에 접근할 수 있다.
● 추상은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고 핵심을 간추린다.
● 연역은 간추려진 구조에 다시 살을 입혀서 구체화 한다.
● 추상과 연역을 할 줄 아는 것이 구조를 아는 것이다.
구조는 안정되려고 한다. 안정되지 못할 경우 안정에 도달할 때 까지 구조의 붕괴를 지속한다. 그것이 변화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것은 안정된 구조다. 그것이 계의 평형이다. 모든 평형은 내적인 구조의 안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것이 패턴이다.
모든 변화는 평형계 안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구조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간추리기와 풀어내기의 방법론으로 구조에 도달할 수 있다.
● 추상 - 간추리기
● 연역 - 풀어내기
세상은 복잡하고 방대하지만 추상으로 간추릴 수 있고 연역으로 풀어낼 수 있다. 이에 지식이 만들어지고, 지식의 계통이 이어져서 학문의 세계가 펼쳐진다.
패턴과 평형과 구조
존재는 질서를 가진다. 질서는 자연의 패턴을 살펴 알 수 있다. 패턴은 계의 평형으로 성립한다. 하나의 평형계가 있으면 반드시 하나의 패턴이 있다.
밤과 낮의 평형에 하루가 있고 추위와 더위의 평형에 계절이 있다. 여자와 남자의 평형에 사람의 존재가 있고, 하늘과 땅의 평형에 지구의 존재가 있다.
여기서 하루, 계절, 사람, 지구는 각기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 패턴들은 서로 닮아 있다. 무엇이 닮았는가? 내부에 구조적 평형계를 가진다는 점이 닮았다.
사과와 배는 닮았다. 사과와 배는 둥글어서 위아래가 평형을 이룬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는 닮았다. 산은 세모꼴로 뾰족해서 좌우의 평형을 이룬다.
스포츠는 공격과 수비 사이에 평형을 이루고, 정치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평형을 이루고, 인생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 평형을 이룬다.
모든 사물은 계의 평형에 의해 존재를 유지한다. 관찰하여 알 수 있다. 들판에 버려진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도 내적인 평형을 이루어 패턴을 만든다.
존재가 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정되어 있는 것은 내적인 평형을 이루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처 안정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평형에 도달할 때 까지 변화를 지속한다. 불안정한 것은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곧 붕괴된다.
천둥과 번개와 비바람과 지진과 홍수와 태풍의 변화는 자연이 변화의 에너지를 감소시켜 스스로 평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천둥이 천둥을 막고 지진이 지진을 막고 변화가 변화를 막는다. 자연이 스스로 내부적인 구조적 불안정성을 제거하여 가는 것이다.
인간이 무지를 극복하고 인식을 시작하는 첫 걸음은 패턴의 관찰에 있다. 사물들이 서로 닮아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지(知)의 시작이다.
사물의 외형이 닮았을 뿐 아니라 내적인 평형이 존재하며 그 평형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닮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智慧), 곧 깨달음의 출발이다.
추상과 연역의 방법
우리는 사물을 관창하여 패턴을 알 수 있다. 패턴은 닮음이다. 빨간 사과와 빨간 토마토는 빨강이 닮았다. 그것이 하나의 패턴이다.
사과와 토마토에 공통된 빨강을 추려낼 수 있다. 그렇게 추려내는 것이 추상이다. 추상의 추(抽)는 뽑을 추다. 핵심을 뽑아내고 본질을 추려낸다.
추려내기로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면 밑바닥의 본질이 남는다. 껍데기와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핵심이 되는 진짜만 뽑아낸 것이 구조다.
뽑아내기를 진행하면 더 이상 뽑아낼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도달한다. 이때 최종적으로 다섯 갈피가 남는다. 그것이 구조다.
더 이상 뽑아낼 수 없는 이유는 그 지점에서 계의 평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평형이 무너질 때 존재는 형(形)을 잃는다.
남자가 전부 죽으면 여자도 죽는다. 남자가 죽고 여자가 죽으면 결국 인간이 죽는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남자만 쏙 빼갈 수는 없다.
자전거의 짐받이를 빼낸다 해도 자전거의 본질은 유지된다. 그러나 앞바퀴를 빼내면 뒷바퀴도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 지점에서 자전거는 죽는다.
큰 건물에서 벽돌 하나를 제거해도 집의 형태와 기능은 유지된다. 이렇듯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을 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이 있다.
어느 지점에서 특정한 것을 제거하면 건물 전체가 완전히 무너지는 수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건물의 대들보와 기둥이 만나는 접점이다.
수평으로 진행하는 보와 수직으로 진행하는 기둥이 만나 각도가 ┓자로 꺾이는 지점이 있다. 이 지점은 절대로 제거될 수 없다. 곧 건물의 구조다.
사람의 팔 하나를 잘라내도 사람은 사람이다. 심장을 기계로 대체하고 내장 일부를 잘라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구조다.
줄이고 줄여서 더 줄일 수 없는 극한의 지점이 있다. 생략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 그것이 구조다. 왜 줄일 수 없는가? 평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 추상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
● 절대로 제거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면 그것이 구조다.
● 구조를 제거하면 평형이 무너져서 계가 해체된다.
● 계가 해체되면 본질이 훼손되어 존재가 부정된다.
● 추상으로 구조와 평형과 패턴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절대로 제거되어서 안 되는 핵심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구조가 본질이고 구조의 평형이 본질이다.
건물은 중력에 의존하고 자동차는 가솔린에 의존한다. 건물이 중력을 잃을 때 죽고 자동차는 가솔린을 잃을 때 죽고 사람은 생명을 잃을 때 죽는다.
이렇듯 존재의 본질은 서로 닮아있다. 무엇이 닮았는가? 그것은 순서와 방향의 질서다. 그 질서가 평형에 도달하여 패턴을 이룬다. 그 패턴이 닮아있다.
추상적 사고 훈련
사람이 무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특히 추상적 사고에 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상(抽象)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모른다.
추상이라고 하면 피카소의 추상화 그림을 연상한다. 막연하고 모호한 것, 뜬구름 잡는 것, 알쏭달쏭한 것, 비효율적인 것으로 짐작한다. 천만에!
추상능력이 필요하다. 추상은 핵심을 간추리는 능력이다. 상자에 담긴 16개의 사과를 낱낱이 세어보지 않고 4 곱하기 4로 바로 아는 것이다.
● 추상은 존재에서 질서를 찾는다.
● 추상은 질서에서 자연의 패턴을 찾는다.
● 추상은 패턴에서 내적인 계의 평형을 찾는다.
● 추상은 평형계에서 맞물려 있는 구조를 찾는다.
● 추상은 중복과 혼잡의 제거로 핵심을 빼낸다.
추상적 사유능력이 필요하다. 본질과 무관한 부분을 제거하고 핵심만 간추리는 능력이다. 추상을 위해서는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고장난 기계를 수리하는 것과 같다. 모든 고장은 기계장치의 운동부분에서 일어난다. 즉 마찰이 일어날 수 있는 관절 부분에서 고장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기계라도 엔진에서 바퀴까지 힘이 전달되는 경로를 추적하면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추상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쫓아가는 것이다.
추상은 관절에서 관절로, 대들보에서 기둥으로, 엔진에서 바퀴로 힘이 전달되는 경로를 쫓아가는 것이다. 추상은 과학적이고 매커니즘적인 것이다.
● 힘의전달 매커니즘 - 동력원≫동력발생≫동력제어≫동력전달≫동력효과
● 자동차의 동력전달 - 가솔린≫엔진≫기어≫바퀴축≫바퀴
● 컴퓨터의 정보전달 -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자동차의 힘의 전달 매커니즘과 컴퓨터의 정보전달 매커니즘은 닮았다. 모든 존재에 이와 같은 힘의 전달 매커니즘이 있으며 그 본질은 닮아있다.
여기서 예외는 없다. 칼이나 망치와 같은 간단한 도구에서 부터 복잡한 기계장치에 이르기까지 본질은 같다. 생물이나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부에 매커니즘을 감추고 있으며 그 매커니즘은 서로 닮았다.
본질을 꿰뚤어볼 줄 아는 사람은 이를 바로 알아챈다. 정치의 구조나 예술의 원리나 사회의 시스템이나 생물의 진화나 기계의 작동원리는 같다.
원자론과 구조론
구조론은 원자론(原子論)과 다르지만 아이디어가 닮았다. 그러나 원자론은 본질에서 오류다. 구조론은 원자론의 오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여기서 쪼갠다는 개념은 모호하다. 왜 쪼갤 수 없다는 말인가? 원자론은 이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다.
구조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분해할 수 없는가? 거기서 더 해체했을 때 계의 평형이 무너져서 본질이 훼손되기 때문에 분해할 수 없다.
● 원자론 - 절대로 쪼갤 수 없다.(이건 억지다.)
● 구조론 - 구조를 쪼개면 평형이 깨지고 본질이 훼손된다.
원자론의 기본 개념인 불가분(不可分),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가분체(不可分體)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의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
원자도 소립자로 쪼개진다. 소립자는 더 작은 어떤 것으로 또 쪼개진다. 최종적인 입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의 바탕은 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는 건물을 구성하는 낱낱의 벽돌과 같다. 벽돌을 쌓아 건물을 만든다. 그런데 벽돌도 깨질 수 있다. 벽돌이 아닌 흙이나 나무로도 건축은 가능하다.
세상에 깨질 수 없는 것은 없다. 단지 원자론의 창안자가 깨질 수 없다고 임의로 상상했을 뿐이다. 그 상상은 과학의 검증에 의해 오류임이 확인되었다.
구조는 수평의 보와 수직의 기둥이 만나는 접점이다. 힘을 전달하는 관절부분이다. 이 부분이 해체되면 건물이 무너지고 기계는 망가진다.
건물의 구조는 본질에서 중력이다. 지구상의 모든 건물은 지구의 중력에 맞서는 형태로 디자인 되어 있다. 중력이 무너지면 건물은 무너진다.
추상은 간추리기다. 간추렸을 때 남는 것이 구조와 수학이다. 수학은 비(比)다. 비(比)는 구조를 이루는 수평의 보와 수직의 기둥 사이의 비례다.
4/8를 2/4로 간추릴 수 있다. 2/4를 1/2로 간추릴 수 있다. 여기서 더 간추릴 수는 없다. 생략할 수 없고 약분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비(比)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구조적 안정성을 쫓아 서로 닮았다. 구조적 안정을 이루는 것은 질서다. 그 질서만 추상한 것이 수(數)다. 세상은 수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구조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힘이다. 모든 존재는 힘을 배설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진다.
건물의 힘은 보에서 기둥을 거쳐 지축으로 전달된다. 자동차의 힘은 엔진에서 기어를 거쳐 바퀴로 전달된다. 칼의 힘은 손잡이에서 칼날로 전달된다.
힘의 배출하는 일정한 순서와 방향이 정해져 있다. 그것이 존재의 질서다. 그것이 곧 구조다. 세상은 원자(原子)가 아니라 구조(構造)로 이루어져 있다.
연역적 사고 훈련
패턴이 겉으로 드러나고 내부에 구조를 가지며 그 사이에 평형계가 존재하면 그것이 하나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모든 존재는 외력이 작용했을 때 내부로 전달된 힘을 다시 외부로 배출하는 방법으로 자체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돌멩이가 있다고 치자. 그 돌멩이가 산길에 굴러다닌다면 그 돌멩이를 산의 일부로 볼 수도 있고 독립된 개체로 볼 수도 있다.
존재의 판별기준은 평형계의 성립여부다. 평형계는 외력의 작용에 대응한다. 외력이 작용하여 그 대상의 평형계를 깨뜨리면 존재가 무너져서 없어진다.
접시에 고인 물이 햇볕과 바람의 작용에 의해 말라버리면 그 물은 사라진 것이다. 그때 물의 존재는 없어진다. 외력에 저항하지 못하면 죽는다.
사람이 죽어 버리면 외력의 작용이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과는 만날 수 없고 대화할 수도 없다. 즉 그 지점에서 존재는 부정된다.
산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산의 일부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독립된 개체로의 존재냐는 외력이 어디에 작용하는가에 달려있다.
내가 그 돌을 손에 쥐면 돌멩이가 되고 아무도 그 돌에 손대지 않으면 그 돌은 그냥 산의 일부다. 그렇게 존재는 내적으로 통합하고 외력에 맞선다.
내적으로 구조의 평형을 이루어 자체의 안정을 유지하고 외계에서의 작용에 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존재다. 거기에서 일의 일 단위가 성립한다.
내부에 가해진 힘은 어떻게든 다시 외부로 배출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일의 일 사이클이다. 여기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갈피가 성립한다.
원자(原子)가 붕괴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듯이 구조는 제거될 수 없다. 물질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갈피는 최종적으로 제거될 수 없다.
이러한 원리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 공통된다. 이렇듯 개별적인 존재자들에서 보편적 속성을 뽑아내는 것이 추상이다.
역으로 이 원리의 보편성을 응용하여 새 지식을 찾아내는 것이 연역이다. 연역은 추상의 하부구조로 추상에 의존하며 추상의 뼈대에 살을 보탠다.
돌멩이의 구조가 그렇다면 나무의 구조도 그렇고 바람도, 물도, 집도, 연필도, 지우개도 그렇다. 구조를 파악하면 낱낱이 실험해보지 않고 알 수 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하나를 배우는 것이 추상이면 이를 확장하여 가르쳐 주지 않은 열을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 연역이다.
추상과 연역과 귀납
인식에 도달하는 데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 추상과 연역과 귀납이다. 추상은 보편질서를 찾고 연역은 보편진리를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여 응용한다.
인간의 지식은 90프로 이상 추상과 추상을 통한 연역에 의해 얻어진다. 귀납은 과학자의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보조수단이다.
● 수학의 추상 - 본질과 무관한 사항을 제거한다.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여 계의 평형과 구조에 도달함으로서 사물의 이면에 숨은 질서를 포착한다.
● 학문의 연역 - 추상으로 얻어낸 보편적 원리를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여 지식의 영역을 크게 확장한다. 연역은 추상의 하부구조로 추상에 의존한다.
● 과학의 귀납 - 추측에 기초하여 가정을 만들어 놓고 우연적 확률에 의존하여 추측이 맞아질 때 까지 실험을 반복한다.
귀납은 근대과학의 방법론이다. 과학적 실험을 통한 지식의 확보에 많이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데가 있다.
근대과학의 대상이 대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극미시세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귀납이 과학의 방법론으로서는 크게 기여한다.
미생물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원자나 소립자 역시 인간의 맨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독극물이나 대부분의 광물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귀납의 방법을 쓴다. 그러나 귀납에는 가정이라는 전제 필요하고 가정은 연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귀납 역시 추상과 연역의 하부구조다.
추상과 연역은 옳게 진행되었을 때 오류가 없다. 그러나 귀납은 전제가 틀렸을 경우를 포함하고 이를 확률에 맡기므로 오류가능성이 있다.
특히 발명가들이 귀납적 방법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발명의 아이디어는 연역에 의해 얻어진다. 순수한 귀납만으로의 과학은 불가능하다.
지식은 추상과 연역을 통해 얻는 것이 맞다. 단 한의사가 풀과 열매를 맛보고 약효를 찾듯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지 않는 부분에는 귀납법을 쓸 수 있다.
일상적인 인간의 지적활동은 90프로 이상 추상과 연역에 의존한다. 귀납은 물리적 한계로 인하여 논리적 추론이 닿지 않는 관찰과 경험의 세계에 위치한다.
에디슨과 테슬라
“헛간에서 바늘을 잃어버렸다면 헛간의 지푸라기를 손으로 하나하나 헤쳐가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바늘을 찾아내는 사람이 에디슨이다.”
에디슨의 경쟁자였던 테슬라가 한 말이다. 직류전기를 사업화한 에디슨과 교류전기를 발명한 테슬라의 경쟁에서는 결국 테슬라가 승리했다.
귀납이 지고 연역이 이겼다. 테슬라의 말대로 에디슨의 방법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귀납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과학자로서의 경쟁에서는 테슬라가 이겼지만 사업가로서는 에디슨이 성공했다. 에디슨이 창업한 제너럴 일렉트릭은 오늘날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그 이유는? 에디슨이 많은 부하직원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에디슨의 발명과 사업적 성공은 에디슨 혼자 이룩한 것이 아니다. 그의 발명회사가 한 것이다.
테슬라가 헛간에서 바늘을 찾는 방법은? 연역추론을 전개하여 거기에 알맞은 공식을 세우고 바늘을 찾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조달한다.
테슬라의 방법은 합리적이지만 자본주의 경쟁에서는 패배한다. 에디슨이 3천명의 부하직원에게 명령하면 3분 만에 지푸라기를 헤쳐서 바늘을 찾을 수 있다.
연역은 단 1회의 합리적인 추론을 필요로 한다. 반면 귀납은 무수히 많은 반복 실험을 필요로 한다. 이 방법으로 에디슨이 승리할 수 있지만 공정하지 않다.
근대과학의 대상인 극미시세계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으므로 어차피 반복실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많은 인력과 장비의 투자가 필요하다.
“천재는 1프로의 영감과 99프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은 과학지식의 부족으로 비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에디슨이 테슬라의 조롱을 전해듣고 반격하여 한 말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테슬라가 옳다.
에디슨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에디슨이 말한 1프로의 영감도 패턴인식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연역추론에 해당된다. 귀납은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 바른 인식 - 추상≫연역.(보조수단으로 귀납의 사용.)
● 틀린 인식 - 귀납만을 사용.(운이 좋을 때만 성공한다.)
동전 하나를 땅에 떨어뜨렸다고 치자. 동전이 떨어진 그곳에 반드시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추상이다. 동전이 굴러간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연역이다.
그냥 무턱대고 바닥을 수색하는 것이 귀납이다. 추상과 연역을 거친 귀납은 성공한다. 추상과 연역없는 귀납은 제자리에서 맴을 돌아 동전을 찾지 못한다.
지식은 추상과 연역을 통해 90프로 이상 얻어진다. 귀납은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물리적 장벽을 만났을 때 보조수단으로 활용된다.
컴퓨터와 연필
컴퓨터의 기능은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이다. 연필의 기능 역시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이다. 그러므로 컴퓨터와 연필은 같다.
이렇게 바로 가는 것이 연역이다. 이로부터 연역하여 컴퓨터와 볼펜도 같고, 컴퓨터와 붓도 같고, 컴퓨터와 펜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지식은 이렇게 무제한으로 연역된다. 인간이 행하는 지적활동의 90프로는 보편적인 이론적 지식을 이런 식으로 연역하여 확장한 것이다.
연필을 쥐는 것은 입력이다. 자모를 쓰는 것은 저장이다. 자모를 종횡으로 조합함은 제어다. 자모를 연이어 읽는 것은 연산이다. 최종적으로는 출력이다.
● 연필의 쓰기
“정성들여 정식으로 정확하게 쓰자.”
● 컴퓨터의 쓰기
(정+ 성들여)
(= 식으로)
(= 확하게 쓰자.)
컴퓨터는 예의 한 문장에 세 번 반복되는 ‘정’을 생략한다. 이는 덧셈과 곱셈의 차이와 같다. 곱셈은 중첩의 원리를 이용하여 겹치는 부분을 생략한다.
겹치는 ‘정’을 생략하기 위해서는 미리 써서 저장해놓고 반복적으로 불러내는 방법을 쓸 수 있다. 그것이 곧 컴퓨터의 원리다.
이때 미리 써서 저장해둔 것을 소프트웨어라 한다. 컴퓨터는 소프트웨어에 저장된 것을 불러와서 메모리에 띄어놓고 제어와 연산으로 풀어낸다.
연역(演繹)은 잇달아 풀어내는 것이다. 도마에서 무를 썰듯이 작업영역을 정해놓고 재료를 투입하는 족족 연속적으로 풀어낸다.
그런 점에서 연역의 방법론은 컴퓨터의 원리와 같다. 연역의 패턴이 컴퓨터의 패턴이 되고 연필의 패턴이 되고 볼펜의 패턴이 된다. 이들은 서로 닮았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도구는 미리 예비해놓고 현장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불러낸다. 자동차는 바퀴의 회전을 불러내고 칼은 날의 예리함을 불러낸다.
세상의 이치도 이와 같다. 사전에 어떤 기본형을 정해놓고 그것을 저장해 두었다가 현장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불러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나뭇잎이나 풀잎이나 동물의 세포나 남산의 바위나 다 마찬가지다. 씨앗의 배아에 저장된 원형을 불러낸다. 그것을 유전인자라고 한다.
이로서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되어야 한다. 원자론과 구조론의 발상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원자론은 원자를 쌓고 구조론은 구조를 풀어낸다.
세상은 작고 단단한 것이 많이 쌓여서 큰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근본이 되는 소스를 CPU에 감춰놓고 모니터 상으로 연속하여 불러내는 것이다.
컴퓨터는 하드디스크에 든 것을 메모리로 불러낸다. 영화는 필름에 든 것을 스크린으로 불러낸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한 불러내기로 이루어졌다.
우주는 연역이다. 존재는 연역이다. 컴퓨터는 연역이다. 도구는 연역이다. 지식은 연역이다. 세상은 연역이다. 저장된 원형을 현장에서 풀어낸 것이다.
씨앗에 배아가 있고 그곳에 원형의 모습이 있다. 물을 주어 길을 만들고 햇볕을 주어 동력을 제공하면 씨앗 밖으로 불려 나온다.
물이 도로면 햇볕이 가솔린이고 배아가 자동차다. 나무가 생장하는 원리와 자동차가 달리는 원리는 같다. 구조로 보면 세상 모두가 닮았다.
인간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밖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끌어낸다. 곧 깨달음이다. 밖에서의 작용은 끌어내는데 필요한 도로와 가솔린 역할이다.
추상과 연역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교실에서의 학습은 인간 내부에 있는 깨달음의 자동차를 끌어내는데 필요한 가솔린 역할에 한정된다.
물과 햇볕을 주지 않으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밖에서 물과 햇볕의 공급이 곧 교육이다. 그러나 근본 학문은 내부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풀어내기식 교육이다. 내부에서 인식의 고리를 풀고, 깨달음의 빗장을 열고, 지식의 방아쇠를 격발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