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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512 vote 1 2016.06.29 (17:48:31)

     

    완전성의 문제


    ◎ 인간은 완전성을 찾는다.
    ◎ 시작의 완전과 결말의 완전이 있다.
    ◎ ‘왜 사는가’의 시작은 나의 의사결정영역을 찾는다.
    ◎ ‘어떻게 살것인가’ 결말은 나의 의사결정영역을 확대한다.
    ◎ 시작은 철학의 인仁, 과정은 과학의 의義, 결말은 미학의 예禮다.


    ◎ 맹자는 하늘의 천명으로 시작하고 순자는 땅의 민의를 따라 결말짓는다.
    ◎ 주자와 퇴계의 이원론은 둘을 이항대립적으로 바라보니 천명을 높이고 민의를 낮추어 차별하는 방법으로 사회의 질서를 잡는다.
    ◎ 율곡과 화담의 일원론은 천명과 민의를 사건의 기승전결구조 안에서 기능하는 각자의 포지션으로 통합시켜 진보의 에너지를 도출한다.
    ◎ 일원과 이원, 절대와 상대, 합리와 실용, 대승과 소승, 진보와 보수는 이를 사건으로 통합시켜 거기서 에너지를 도출하는가 아니면 사물로 대립시켜 사회의 질서를 꾀하는가로 갈라진다.


    진리는 자연에 있으니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 자연은 자연히 그렇게 된다.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에너지를 도출하는 방법은 율곡의 일원론이다. 하나로 합쳐야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청춘남녀라도 합쳐야 에너지가 나오는 법이다. 칸을 나누어 분리하고 차별하고 담장을 세우면 에너지의 운행이 막혀 자빠진다. 등산객이 배낭을 버리면 속도를 낼 수 있지만 결국 도중에 주저앉게 된다. 그 배낭에 음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퇴계의 이원론은 인위적으로 사회의 질서를 잡으려는 의도를 앞세운 것이다. 인간의 억지일 뿐 자연의 순리가 아니다. 있는 에너지를 소비하되 새로 에너지를 도출하지 못하니 일시적으로 먹히지만 등산객이 배낭을 버리는 것과 같아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부자는 돈으로 질서를 세우고, 권력은 힘으로 질서를 잡으니 에너지 낭비를 막아 효율을 얻지만 적이 침략해오면 망한다. 칸에 막히고 담장에 막히고 차별에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니 싸워보지도 못한다.


    언어의 문제


    ◎ 답은 언어에 있다.
    ◎ 언어는 주어≫목적어≫동사다.
    ◎ 인간은 동사 위주로 귀납하여 인식한다.
    ◎ 창의할 때는 주어 위주로 연역하여 표현한다.
    ◎ 목적어를 바꾸면 역설, 주어를 바꾸면 이중의 역설이다.
    ◎ 목적어는 대체되니 상대성이고 주어는 불변이니 절대성이다.
    ◎ 주어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대신 그 의미를 확대할 수 있다.
    ◎ 깨달음은 주어를 나에서 집단으로, 인류로 확대시키는 이중의 역설이다.


    ◎ 깨달음은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다.
    ◎ 사건으로 보면 완전성 개념이 제기된다.
    ◎ 완전성은 황금이나 보석 따위 고착된 사물에 없다.
    ◎ 명성이든 성공이든 행복이든 목적어로 쓰이는 대상은 불완전하다.
    ◎ 참된 완전성은 사건의 주체인 나를 진리와 역사와 자연과 문명과 진보로 확대함으로써 얻어진다.


    언어의 문제는 곧 관점의 문제이다. 사건 안에서는 전모를 볼 수 없고 사건 바깥에서 봐야 전모가 보인다. 에너지는 반드시 바깥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건은 먼저 에너지를 결집하고 다음 의사결정을 거치며 그 에너지를 소비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실행과정만 보고, 그 전에 에너지를 결집하는 동기부여 과정을 보지 못한다. 에너지의 입력부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 배경≫주체≫움직임≫방향성≫소실점


    먼저 어떤 그것의 배경을 보고 다음 바로 그것을 보고, 다시 배경과 그것 사이에서 움직임을 보고, 그 움직임의 앞과 뒤를 살펴 방향성을 보고, 거기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소실점을 봐야 한다. 그럴 때 완전하다. 디자인이든 패션이든 유행이든 총의 방아쇠와 같고 식물의 생장점과 같은 소실점이 있으니 그 한 지점을 건드려 계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타자성의 문제


    ◎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며 존엄하고자 한다.
    ◎ 인간이 비참한 이유는 타자성의 문제 때문이다.
    ◎ 타자성은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 인간은 세상과 분리되어 겉도는 존재로 여겨질 때 비참하다.
    ◎ 주체의 의사결정영역을 확대할 때 비참을 극복하고 존엄을 얻는다.
    ◎ 인간은 진리와 자연과 문명과 진보와 신神의 편에 섬으로써 완전해진다.


    ◎ 맹자의 성선설은 동기부여에서의 사회성을 지적하고, 순자의 성악설은 집단적 의사결정구조에서의 타자성 문제를 지적한다.
    ◎ 인간의 윤리 도덕은 올바름의 논리인 사회성 논리에 근거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승부의 논리인 타자성 논리에 근거하므로 모순과 충돌이 일어난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유리한가? 무엇이 이기는가? 순서대로 정설≫역설≫이중의 역설이다. 정설은 매사에 긍정적인 교과서적 판단이고 역설은 부정부패가 판치는 현장에서 교과서적 지식이 죄다 뒤집어지는 것이다.


    이중의 역설은 그 역설이 사실은 국내용에 불과하고 외국과의 경쟁에서는 죄다 깨져서 그 역설을 다시 역설하여 처음의 정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단 돌아올 때는 개인이 아닌 팀으로 온다. 그렇게 두 번 깨지고 나면 주체인 나가 커져 있다.


    ◎ 정설 – 무엇이 옳은가?
    ◎ 역설 – 무엇이 유리한가?
    ◎ 이중의 역설 – 무엇이 이기는가?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도덕의 논리로 무장하고 사회에 나서지만 현장에 썩을 대로 썩어 있다. 공자의 바른 말씀보다 노자의 얕은 꾀가 먹히는 판이다. 그렇다고 속임수로 가다가는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군에게 밟힌다.


    효율의 논리로 내부의 중소기업을 짓밟을 수 있으나 그걸로 외부의 애플이나 구글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진정한 강자는 다시 올바름으로 돌아오는데 이 때는 팀이 되어 있다. 이익이 도덕을 이기고 전쟁은 다시 그 이익을 이긴다.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은 세 가지가 있다. 가족끼리 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외부인과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가족끼리는 도덕성 논리를 쓴다. 남남이라면 효율성 논리를 쓴다. 궁극적으로는 승리자 논리로 갈아타야 한다. 큰 일이 벌어져서 인류 전체가 다시 한 가족이 된다. 열린계냐 닫힌계냐다. 가족은 닫혀있고 사회는 열려있다. 그런데 지구촌 인류는 다시 닫혀있다. 인류단위의 사건이 벌어지면 다시 가족의 논리로 돌아온다. 단 그 가족은 인류를 다 포용하는 큰 가족이다.


    ◎ 가족의 도덕성 논리 – (사회성) 형이 시키면 동생이 한다.
    ◎ 타자의 효율성 논리 – (타자성) 남이면 댓가를 지불해야 움직인다.
    ◎ 대집단 승리자 논리 – (완전성) 이기려면 타인도 가족이 되어야 한다.


    형은 많이 먹고 동생은 적게 먹으면 불화하므로 나눠먹어야 한다는 논리가 도덕성 논리다. 그런데 사람은 많이 먹고 개와 고양이에게는 조금 준다면 불공평한가? 개와 고양이는 가족이 아니다. 주인은 많이 먹고 노예는 적게 주는 이유는 노예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바름에 기초하는 도덕성 논리는 가족에만 적용된다. 현대사회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가족이 아니고 남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타자성의 논리로 작동한다. 남이라면 올바른 길 보다는 이익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하니 효율성 논리다. 그래야 일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면 형이 시키면 동생이 하는데 남이라면 시켜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댓가를 준다. 임금을 지불하려면 이익을 만들어야 하니 결국 사회는 효율성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그런데 모두가 이명박 수법으로 이익만 추구하면 그 집단은 외부와의 경쟁에 진다. 사회주의 방법으로 결속한 집단이 대군을 몰고와서 짓밟아버린다.


    서로 차별하는 농경민집단은 보다 평등한 유족민집단을 이길 수 없다. 효율성 논리가 사회를 작동시키는 근간이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한다. 이기는 방법은 인류를 죄다 동원하는 것이다. 최후에는 타인도 가족으로 대접하는 승리자 논리로 갈아타야 한다. 승리자는 다시 올바름으로 돌아오는데 그냥 오지 않고 경쟁을 거쳐 대집단을 만들어 온다.


    가족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니 대집단을 이루지 못한다. 효율성 논리를 쓰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경쟁을 통해 대집단이 만들어진다. 원래 부족은 있어도 국가는 없었는데 대집단이 거듭 전쟁에 이겨서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국가는 다시 가족의 도덕성 논리로 작동하니 승리자 논리다.


    언제나 그렇듯이 획기적인 생산력 향상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 전기, 자동차, 컴퓨터와 같은 신기술에 인류의 진정한 희망이 있다. 그러한 생산력 향상은 그 경쟁의 승리자들에게서 나온다. 패배자는 의사결정권이 없으니 인류에게 기여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이기는 길로 가야 한다. 집단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도덕성 논리로 출발하여 경쟁을 중시하는 효율성 논리로 갔다가 최후에는 대집단을 만들어 싸움에 이기는 승리자 논리로 갈아타서 의사결정권을 획득한다. 이기는 길로 가지 않으면 의사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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