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상
사상의 이해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생각해보고 혹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혹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온 답들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의 근거를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근거는 없다. 어떠한 답변들도 문제의 테두리 안에서의 사실일 뿐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답은 아닌 것이다. 설사 그러한 답변들이 옳다고 인정을 하더래도 그것을 받아들이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바른생활을 잘 가르치면 악동들은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수긍을 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악동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지도에 무언가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는 반증이 된다.
말로만 옳아서는 부족하다. 실제의 행동으로 연결시키려면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선생님의 그 올바른 결론이 구체적으로 나의 행동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양자 사이에 매개가 되는 도구로서 기능할 무언가 하나가 더 필요한 것이다.
학문과 사상은 여기에서 차이가 있다. 학문이 [사실이지 옳다]는 점을 드러낸다면 사상은 [그러므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학문적 인식을 행동과 실천으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의 매개가 사상이다.
옳으니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이 나 바깥에 있지 않고 나 안에 있으니까 실천하는 것이다. 사상은 그 옳음이 나 안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어 확인시켜 준다.
[정리 : 학문은 인식하게 하고 사상은 행동하게 한다]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 '이것이 선이다.' 하고 말할수 있겠지만 단지 그렇게 말할수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이 막무가내로 '난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고 나오면 대책이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이 옳다는 점이 곧 인간이 실천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까지를 보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옳다면 곧 행동해야 한다. 그 옳음들이 인간을 떠나서 인간 바깥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나 안에서 나를 흔들어 일떠서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이다.
사상과 학문
학문이 존재의 사실을 위주로 해서 인간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밝혀내는 것이라면 사상은 인간을 위주로 해서 인간이 그 학문의 성과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이다.
학문이 왜곡되는 것은 학문과 사상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학문이 1차적이라면 사상은 2차적이다. 학문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면 사상은 인간의 관점에서 학문을 받아들여 거기에 용도를 부여하는 것이다.
학문은 대상을 인간과 완전히 분리해 인간의 바깥에 두고 객관의 자세로 관찰하기이며 사상은 그리하여 얻은 인식의 성과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장악하여 인간의 영향의 미치는 범위 안에 가두어 두고 주관의 자세로 그 학문적 성과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이냐의 인간중심적 논의이다.
[정리 : 학문은 객관이고 사상은 주관이다]
그러므로 학문이 시선을 출발점에 두고 그 근원이 어딘가 시원을 찾는다면 사상은 시선을 귀결점에 두고 그 성과가 무엇인지 실익을 모색한다. 인간이 세상과 만남에 있어서 학문은 세상을 앞에두고 인간을 뒤에둠이며 사상은 인간을 앞에 두고 세상을 뒤에 둠이다.
학문과 사상을 댄다면 학문이 먼저고 사상은 나중이다. 먼저 올곧게 인식하고 다음 방법을 강구하여 실천한다. 학문은 절대적이고 근원적이며 완전을 지향한다. 사상은 상대적이고 결과적이며 융통성을 발휘한다.
학문의 기본적인 테마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이고 사상의 기본적인 설정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이냐?' 이다.
학문이 왜곡되는 것은 학문과 사상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뒤섞어 생각하므로 인위적인 목적이 앞세워져서 학문의 순수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2차적인 것이며 실천적인 것이다, 먼저 학문하여 인식을 완성시켜 놓지 않으면 안된다.
주의와 이념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이러한 근거의 문제, 답이 안나오는 문제, 답이 있어도 해결이 안되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두가지의 방법이 제시된다.
하나의 방법은 그 해당문제 안의 내부논리에 기초한 근거찾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해당문제 바깥에서의 외부논리에 기초한 근거찾기이다. 여기서 내부논리가 곧 주의이고 외부논리가 곧 이념이다.
주의는 하부구조에서 자본주의, 민주주의 할 때의 주의이고, 이념은 상부구조에서 그 전체를 통일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기업이념, 건국이념(국시), 인류의 이념(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 이런 식의 이념이다.
이념은 크게 나아갈 방향을 지정하고 사상은 작게 구체적인 방편을 제시한다. 사상은 이념과 주의 양자를 가운데서 통일한다.
[정리 : 사상은 크게 통일하여 이념이 되고 작게 추구하여 주의가 된다]
주의를 정당화하는 내부논리의 근거는 합리성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논의이든 반드시 어떤 내재한 시스템이 있고 그 일의 성과가 그 시스템의 기능에 충분히 봉사한다는 말이다.
합리성에 기초해서 살펴볼 때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하면 그 옳고 그름의 판단 근거는 그 삶 안에서의 시스템구조가 원활하게 기능하는가의 여부에서 찾아진다.
이념을 정당화하는 외부논리의 근거는 필연성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그래야만 존재자체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필연성을 부정하는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어떤 것이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위, 한 차원 높은 곳에 자기존재를 보장하는 힘이 있고 그 필연성을 부정하면 자기존재가 부정된다.
필연성에 근거해서 살펴볼 때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 하면 그 옳고 그름의 판단근거는 자기존재의 성립 그 자체이다. 그 옳음을 배반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정리 : 주의는 이익을 가져다 주고 이념은 존립을 보장해준다]
주의의 합리성은 인간에게 이익을 주고 이념의 필연성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장해준다. 주의를 배반하면 손해가 막심하고 이념을 배반하면 인간이 부정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이것이 옳다]라고 가르쳤을 때 악동들은 겉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수긍하나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는다. 플러스 알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사상이다.
주의에서 사상은 그 선생님이 말한 옳음이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다줌을 악동들에게 납득시켜서 옳은 실천으로 이어지게 하며, 이념에서 사상은 그 선생님이 말한 옳음이 그 어린이의 자기존립을 보장함을 납득시켜 옳은 실천으로 이어지게 한다.
주의...질서를 잘 지키면 모든 사람이 불편없이 버스에 오를수 있다.
이념...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이는 우리와 같은 편의 사람이 아니다.
사상의 문제는 [비록 그것이 옳다고 하나 내가 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사상은 위 두가지 방법 곧 주의와 이념으로 그들을 설득한다.
[난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하는 거부자들에게 주의는 그 강조되는 [옳음]들이 현실적으로 당신에게도 이익이 되니까 당신이 그 [옳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이념은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의 존재는 무의미해지니까 거부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우쳐준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여 실천하게 한다. 주의는 현실적 이익을 제공하고 이념은 거부할수 없는 지상명령으로서 자기존립을 담보한다.
기업주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기업은 손해를 보고 기업이념을 지키지 않으면 기업은 망한다. 국가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국가는 분열되고 국가(건국)이념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는 망한다. 고로 실천할 수 밖에 없다.
[정리 : 주의는 현실적 이득이며 이념은 자기존립을 담보하는 지상명령이다]
모든 사람이 [난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하다가는 정말 다죽게 된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는 인간임을 포기한 발언이지만 그러한 발언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자기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발언으로 자기를 정당화 하려는 그 자체로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죽기 전에는 이념의 지상명령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주의에서 시스템기능
권력에는 권력의 생리가 있고, 조직에는 조직의 생리가 있다. 그 생리가 곧 합리성이다.자동차라면 최저연비로 최장거리를 운행하는 것이 합리성이고 인생이라면 최저노력으로 최대행복을 얻는 것이 합리성이다.
뭐든 둘 이상이 통합되어 기능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합리성으로서의 생리가 있다. 조직이면 애시당초 그 조직을 결성할 때의 목적(이념)을 떠나서 현재 그 조직자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쪽으로 조직의 역동성이 움직여나가는 현상이 생리이다. 조직의 존재목적이 해소되려 할 때 조직의 유지를 위해 최초의 목적을 배반하는 경우이다.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보고 그 시스템 기능에 최적접근을 꾀하며 그 기능에서 성능을 이끌어내는 즉, 최고의 성능에 최적접근 하려는 것, 다른 말로 잘사는 것이 인생에서의 합리성의 추구이며 그 합리성이 곧 옳은 것이다.
[정리 : 잘사는 것이 합리적인 삶이며 잘 살려는 것이 합리주의적 인생관이다]
내적 시스템구조의 기능적 최적접근을 꾀하는 합리성 판단은 일정정도의 유효함을 가지지만 더 근원적 질문에서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즉 그 시스템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이다.
'나는 행복할 생각이 없다'거나 '나는 이 자동차를 자동차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근원적 부정의 단계에서 합리성에 기초하는 주의는 효력을 상실한다.
도무지 인생을 살아갈 생각이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이 옳은 삶이다' 하고 설득할수 있는 것이지 아예 삶을 포기한 이에게는 그러한 설득이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사상은 이념을 제시한다.
이념은 외적 필연성을 찾아내므로서 근원에서 부터 증명해 들어가는 것이다. 내적 합리성이란 어떤 대상이 [그 기능을 발휘하는가?]의 질문이라면 외적 필연성이란 [그 존립자체가 성립하는가?]의 질문이다.
※ 의제 : 자동차는 잘 달려야 한다.
주의에서 합리성 판단 --> [그 자동차는 최고연비의 최고속도로, 최적상태로 주행할수 있 다. 고로 그것(못 달리지 않고 잘 달리는 것)이 옳다]
이념에서 필연성 판단 --> [그 자동차는 분명히 자동차이다. 수레나 배가 아닌 자동차이 다. 고로 그것(잘 날지 않고 잘 달리는 것)이 옳다]
흔히 합리주의를 실용주의와 대립시켜 좀 더 이념적인 측면을 합리주의라 부르고 좀 더 결과적인 측면을 실용주의라 부르나 이러한 구분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모든 주의는 합리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다만 그 실용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보이지 않는 잠재적 성과에 만족하는 자를 더 합리주의로 보고 가시적으로 나타나야만 만족하는 자를 더 실용주의로 보지만 이건 심리성격과 연관된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이론이 옳다면 합리적인 것은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한다. 실용적이지 않은데 합리적이라면 무언가 이론에서 잘못된 것이다.
[정리 : 이론이 옳다면 합리적인 것이 곧 실용적인 것이다]
틀린 이론을 추종하는 이들이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실용을 부인하고, 이론에 자신이 없는 이들이 실용을 내세우고 합리를 부인한다. 이론이 옳다면 합리적인 것이 곧 실용적인 것이다.
주의에서 이념으로
행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리인 법이다. 그러나 대신으로 그 행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의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 그 자체의 근거는?]하는 질문이 던져진다.
행복한 삶의 주의는 올바른 삶을 살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올바른 삶을 주문하는 올바름의 근거이다. 행복할수 있으므로 올바른 것이다. 행복할 생각이 없다면 이 근거는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할 생각이 없는 이에게 그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의 근거를 되물을수 있다.
행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올바른 삶은 설득력이 없지만 그 사람의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 자체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판단자체를 유효하게 하는 2차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어떻게 판단했든 판단의 결과라면 그는 적어도 사람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판단은 사람의 자격으로 한 판단이며 그 판단이 유효하기 위해서 그는 그 사람의 자격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사람의 자격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자격을 근거삼아 [사람이기 휘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외부논리의 시스템을 판단의 유효한 근거로 제시할수 있다. 이 외부논리의 시스템까지 부인한다면 그는 사람임을 부인했으므로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 또한 부정되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정리 : 내부논리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외부논리를 인정해야 한다]
[이 자동차는 나쁜 자동차이다]라고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동차는 자동차이다는 판단을 전제하는 것이다. 고로 [잘 살 생각이 없다]라는 판단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적어도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는 [인간은 행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곧 부정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긍정한 셈이 된다. 행복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분을 부정할수 있을 뿐 전반적인 부정은 불가능하다.
내적 합리성이 [시스템이 기능하는가?] 의 판단이라면 외적 필연성은 [시스템은 성립하는가?]의 판단이다.
이념은 주의에 대해 사상이다. 주의는 시스템의 기능을 근거로 하며 이념은 시스템의 성립을 근거로 한다.
[정리 : 주의는 하부구조에서 기능을 실현시키고 이념은 상부구조에서 기능을 부여한다]
정치사상을 예로 든다면 [이렇게 해야 좋은 정치다] 하는 판단이 주의판단이라면 [이것이 정치라는 것이다]하는 판단이 이념판단이다.
주의가 정치와 정치를 비교한다면 이념은 정치와 비정치를 비교한다.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하고 말할수 있는 것은 첫째 주의차원에서 그것이 합리적인 삶, 곧 시간을 절약하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현명한 판단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념차원에서 바로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리 : 이념은 주의에 선행한다]
올바른 삶이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스스로 불행을 향하여 나아갔다. 즉 주의에서 합리성판단을 부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중근의사에게 되물을 수 있다. [행복을 부인하는 근거는?]
안중근의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 행복이 인간의 존립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제는 이땅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우리는 안중근의사의 그러한 판단을 이념이라 부를수 있다.
시스템에서 주의와 이념의 통일
주의와 이념의 판단은 학문의 집적도 2에서 시간변수 중요성, 필연성, 가능성, 합리성, 현실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것이든 [옳다 혹은 그르다]하고 판단할수 있는 것은 첫째 거기에 현실성(효과있음)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거기에 합리성(효율적임)이 있기 때문이고, 셋째 거기에 가능성(목적부여)이 있기 때문이고, 네째 거기에 거기에 필연성(자기존립)이 있기 때문이고 다섯째 거기에 중요성(영향을 미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변수 5에서 주의는 가능성 이하 현실성, 합리성을 부여하며 이념은 그에 앞서 중요성 필연성을 부여한다.
[ 사상체계의 시스템 전개도 ]
이념 <---------> 주의
+------------+-------------+------------+-------------+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1, 중요성 2, 필연성 3, 가능성 4, 합리성 5, 현실성
(상부구조) <---------> (하부구조)
사상은 기업이념, 건국이념, 하는 식으로 근본적인 실천근거를 지정하는 상부구조에서의 이념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하는 식으로 새부전략으로 기능하는 하부구조로서의 주의들을 하나의 시스템구조로 통일한다.
사상은 이념과 주의들을 통합하여 유기적인 생명성을 발휘하는 하나의 체계로 성립시키므로서, 인간에게 인식된 학문의 방법적 실천과정에서 구체적인 그 실천의 순서와 방향을 특정하여 하나의 연속적인 전개과정으로 조율해낸다.
사상의 중요성
1. 근거의 중요성이란 영향을 미침을 말한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한다. 인간은 결코 그 실천을 거부할수 없다. 거부하려 해도 이미 영향권 안에 갖혀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그 실천을 거부할수 없는가? 이미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변수들은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피하려 해도 피할수 없음을 말한다. 우리가 이미 그 영향력 안에 갖혀 있기 때문에 사람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사람으로서의 실천을 벗어날 수 없다. 곧 지상명령이 되는 것이다.
기업을 문닫지 않는 한 기업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국가를 만닫지 않는 한 건국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류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기업이념은 기업의 지상명령이다. 국가이념은 국가의 지상명령이다. 삶의 이념은 인간에게 지상명령이다. 선택의 권한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
인간은 결코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 이미 조상으로 물려받은 역사와 전통과 유산을 한짐 짊어지고 태어난다.
인간은 누구든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최소한의 생존보장을 얻어서 태어난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쟁취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 구속은 작게는 성년이 되기까지 크게는 죽을 때가지 인간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려 해도 결코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리 : 근거의 중요성은 사상의 실천주체인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한다]
인간이 이념을 배반하고 거역하려 해도 죽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죽는다해도 그 죽음의 결정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사상에서 인간은 이념의 지상명령에 복종하던가 아니면 무지와 무능에 의해 잘못된 판단을 하던가 둘 중 하나이며 현명하고 옳은 판단을 하고서도 이념의 지상명령에 거역할 수는 없다.
이념에서 근거의 판단이 올바른 것은 결코 거역할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올바른 판단은 늘 백프로 이념과 일치하며 여기에서 어긋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이념과 일치하지 않으면 백프로 잘못된 판단이다.
사상의 필연성
2. 동기의 필연성이란 자기의 존립을 말한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한다. 우리가 그것을 부인할수 없는 것은 부인했을 경우 자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사상은 인간에게 삶의 동기를 제공한다. 동기를 잃었을 때 방황하게 되며 무너지게 된다.
기업에는 기업의 존립동기를 제공하고, 국가에는 국가의 존립동기를, 인간에게는 인간의 삶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사상의 필연성이다. 그 성과나 이익은 나중의 문제이고 우선으로 자기존립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상하여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념에서 그 동기의 판단이 올바른 것은 최소한 자기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사상하지 아니하고서는 자기존재가 깨어지므로 우리는 그 사상의 판단을 옳다고 수긍하고 받아들여 실천하게 된다.
[정리 : 동기적 필연성은 사상의 실천주체를 실재적으로 존립시킨다]
거짓사상과 참사상의 차이는 그 사상하는 동기가 자기존립에 영향을 미치는가의 차이이다. 자기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동기제시는 결단코 허구이다.
마르크스 사상..혁명해야 한다.
왜? 동기는? 혁명하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죽는가?
자기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동기, 실천하지 않아도 죽게 되지 않는 동기는 사상의 동기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사상이라면 실천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죽는다.
인간이 사상하는 것은 사상이 삶의 동기, 기업의 동기, 국가의 동기, 인류문명의 동기를 제공하고 그 동기가 인간의 현존재를 자기존립 차원에서 담보하기 때문이다.
사상의 가능성
3. 목적의 가능성이란 구체적인 실천의 대상이 특정됨을 특정한다. 기업이면 기업의 이윤, 국가이면 국민의 평화, 개인이면 개인의 삶에서 가능한 성취요소들을 공간 상에서 특정하여 낸다. 사상에서 실천하므로서 가능하다.
공간상에서 특정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간이 사태에 개입하여 상황을 변화시킬 대상을 명백하게 드러내보인다는 것이다.
이상한 사이비종교라면 그 실천대상이 명목으로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면 기업사상은 그 기업의 경영실체가 공간상에 존재해야 한다. 곧 자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라면 국가사상은 그 국가의 정치행위가 실제 공간상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즉 영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이비종교의 경우 영토없는 국가에서 가상의 전쟁을 하고 전쟁비용을 지불받는다. 사상은 이런 사이비들과 진정한 것을 구분할수 있게 한다.
[정리 : 목적적 가능성은 사상의 실천대상을 공간상에서 특정하여 노출한다]
국가가 전쟁하는 것은 영토를 두고 하는 것이다. 기업이 경영하는 것은 자본을 두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주술하는 것은 없는 영토와 없는 자본을 있다치고 거짓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법사의 주술은 사상이 못된다.
진정한 사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할수 있는 공간적 영역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사상의 실천영역은 개인적 권리와 사회적권력의 함수관계이다. 우리는 개인적 권리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실천하므로서 정당한 사회적 권력을 성공적으로 도출해낸다.
사상의 합리성
4. 방법의 합리성이란 시간상의 현재적 실천과정에서 시간이 더 적게 걸림을 말한다. 사상은 인간에게 가장 빠른 길을 제시하고, 그 사상을 실천함에 있어서 인간은 누구보다 더 빠른 길로 나아가므로서 더 쉽게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인간은 때로 무지로 하여 사상을 배반하게 되지마는 한 개인이 사상을 배반한다고 해서 역사가 되물려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차피 가게되어 있는 길을 더디가게 될 뿐이다.
인간이 나아가게 되는 경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과 필요성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 인간이 사상을 배반한다는 것은 다만 어차피 갈 것을 좀 천천히 가게하는 정도의 영향이 있을 뿐이다. 근본에서 가는 방향을 뒤집을 수는 없다.
[정리 : 방법적 합리성은 사상의 설친과정에서 시간을 절약한다]
자유주의사상은 개인적 의사결정에서 시간을 덜 걸리게 하고, 민주주의 사상은 사회적 권력행사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없이하여 시간을 단축시키며, 자본주의 사상은 경제적 실천행위에서 시간을 절약하게 해준다. 실제로 시간을 단축시키면 그것이 합리적이며 사상은 그 합리성을 보장한다.
혹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더 시간을 덜 걸리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경우 범위를 축소시켜 놓고 본 것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라는 이념적 목표]에서 보자면 민주주의야 말로 시간을 절약해준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념은 기업경영에서 경제적 성과, 혹은 전장에서의 전투적 승리처럼 좁지 않고, 전체인류의 행복으로서 매우 범위가 크기 때문이다.
독재가 경영에서, 전투에서 단기적 성과를 보장한다해도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부작용을 낳아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만큼 결국은 시간이 더 걸리게 되는 것이다.
사상은 옳다. 민주주의를 할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인정이 되지만 할줄 알면서도 시간이 더 걸리므로 안하는 경우란 있을수 없다.
투표행위라던가 집단적 회의라던가 하는 민주절차를 곧 민주주의 자체로 보는 착오를 범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개인적 권리를 결집해서 사회적 권력을 성립시킨다]는 민주주의 본래의 의미로 본다면 언제나 개인적 권리의 충분한 결집이라는 민주주의가 시간을 절약하여 준다.
사상의 현실성
5. 결실의 현실성이란 그 사상 실천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증명됨을 말한다. 비현실적이란 나타나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 사상이 옳다면 그 성과는 반드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실현되어 나타난다.
저승에 가서 보답받는다는 식의 변명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허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체될 수는 있어도 그 올바른 사상의 성과는 명백히 현실에서 보장된다.
인간이 사상하는 것은 결국 그 성과를 현실에서 확보하자는 것이다. 혹 고상하니 무욕하고 무심하여 마음을 비운 뜻이 [아무 성과도 없어도 좋다]는 식으로 말해지지만 이 경우 대개 거짓이다.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틀린 사상이기 때문이다.
[정리 : 결실의 현실성은 사상의 실천효과를 현실에서 나타낸다]
사상의 성과는 현실에서 나타나야 한다. 혹 저승에서, 혹 내세에서, 혹 심리적 보상 하는 식으로 숨는 것은 반드시 허구이다. 잘못된 사상이다.
자유주의 사상은 개인에게 권리확보의 이익을 가져다 준다, 민주주의 사상은 사회에 합리적 권력행사절차를 가져다 준다, 자본주의 사상은 경제적 효율성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이익이 되고 우리는 그 현실성을 확인할수 있다.
사이비종교의 외계인 숭배사상은 현실 대신 내세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상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현실에서 증거할수 없는 모든 사상은 백프로 거짓사상이다.
사상의 의미는 [그것이 옳다 해서 내가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다면 거짓이므로 사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지 않아도 좋다. 옳은 사상이 신비속으로 숨는 경우는 결단코 없다.
사상체계와 인간
사상체계는 이념에서 출발하고 주의로 귀결되는 하나의 연속된 시간과정이다. 잘못된 사상은 잘못 인식된 학문에 기초하고, 잘못 설정된 이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사상체계는 그 전개과정을 드러내는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의 주인인 인간과의 관계를 내밀히 파악하므로서 올바른 사상을 가지게 된다.
[사상체계의 전개도]
이념 <---- ----> 주의
사상체계 :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공간변수 : 전체인류 개인 (개인 : 사회) 사회화 문명
시간변수 : 중요성 필연성 가능성 합리성 현실성
공간영역 : 세계영역 개인영역 지배영역 영역이동 새로운 영역
시간영역 : 시간통일 공간->시간 과거,현재, 미래현재 ->미래 현재시점
학문의 영역에서 인간은 종속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존재는 원래 있는 것이고 인간은 인식의 방법으로 그 존재에 접근해 간다. 이 과정에서 결코 인간이 그 존재를 훼손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창작품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가 되어 사상체계의 전개과정을 이끌어간다. 인간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사상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긴이 사상을 위해 복종할 이유는 없다.
[정리 : 사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사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어떤 한 특정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고 또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임질수 없다. 책임질수 없으므로 주인이 아니다.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다. 그러나 한 개인일수는 없다. 사상의 주인됨은 한 개인 차원이 아닌 전체인류 차원에서 성립한다. 공간역역에서 한 지역 차원이 아닌 전체 세계영역에서 설정된다. 시간영역에서 특정시점이 아닌 모든 시간대를 통일한다.
즉 사상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간이 주인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작품이지만 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역사과정을 통일하여 전체세계영역을 통일하여 전체인류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사상은 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통일한 전체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사상체계의 전개
사상의 주인은 인간이지만 전체인류가 주인이 되지 한 개인이 임의로 사상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념은 전체인류를 위해 봉사하지 한 개인을 위해 봉사하지는 않는다. 모든 이념적 판단은 한 개인이 아닌 전체인류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이념이 인간을 이롭게 하지만 전체인류를 이롭게 하지 한 개인을 이롭게 하지는 않는다.
사상의 주인이 전체인류라 해서 한 개인이 전체인류를 위해 희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인류 또한 개인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이념의 주인되는 전체인류란 개인들에서 공통분모, 곧 공유되는 성질들만 취합한 것이다. 개인들은 서로 다르지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 공유되는 부분만을 통일하여 놓고 말하는 것이다.
사상의 전개란 어떻게 그 전체인류의 다수에서 한 개인을 이끌어내고 또 그 개인들의 실천을 사회적으로 통합할 것인가이다. 사상체계의 전개는 시간상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낸다. 다수가 개인을 보장하고 개인의 실천이 다시 다수로 회귀되는 과정이다.
[정리 : 이념의 판단기준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체인류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이념적 추구는 한 개인의 차원에서는 결코 달성될수 없는 것이다. 이념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자기정당화이며 개인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할수 있는 모든 실천활동의 기초는 조상으로부터 배달받고 이웃으로부터 도움받은 협력의 덕택이다. 이념은 이러한 세계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세계로부터, 역사로부터, 전체인류로부터,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한아름씩 부여받아 태어나는 것이며 그 받음들에 의해여 나의 현존재가 규정되는 것이다.
[정리 : 인간은 빈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한아름씩 받아서 태어난다]
사상체계의 전개는 이 받음들의 공간변수에 인간의 일생이라는 시간변수를 대응시켜 그 받음들을 자기복제하여 양을 늘려놓은 만큼 이 사회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다. 사상의 옳고 그름 판단은 순전히 이러한 측면에서의 판단이다.
사상의 문제는 학문이 찾아낸 인식의 성과들을 인간이 왜 받아들여 실천해야야만 하는가이다. 이념은 우리의 현존재가 무수한 배달받음에 의지하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리이며 주의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 성과들을 되돌려줄까에 대한 생각이다.
[정리 : 이념은 받은것을 돌려주라 하고 주의는 어디로 어떻게 돌려주라 한다]
우리는 이미 받았으므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한 커다란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 이념이
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돌려줄 것인가?
이미 받았으므로 돌려주어야 하고(근거의 중요성) 돌려주려면 먼저 그 돌려줌의 주체가 되는 자기자신을 확보해야 하며(동기의 필연성) 또 대상과 접촉해야 하고(목적의 가능성) 상당시간이 걸리고서야(방법의 합리성)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난다(결실의 현실성).
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이며 곧 사상체계의 전개이다.
사상체계에서 자기복제
사상에서 이념과 주의를 연결하는 것은 시스템구조이며 그 시스템구조는 자기복제이론에 기초한다. 그 자기복제 이론을 증명하는 것은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A=B)이고 (B=C)이다. 고로 (A=C)이다]의 형태를 가진 하나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하나의 진술과 두 개의 논거로 구성된다. (A=C)가 진술이 되고, (A=B) (B=C)가 논거가 된다.
삼단논법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논법을 성립시키는 이론이 필요하다. 이에 제시되는 것이 집적도 이론에 근거한 자기복제이론이다. 먼저 이론이 있고 그 이론이 사실에 접목되어 현상을 실현한다.
논법(논리)은 이론을 거꾸로 되짚어 그 결과적 현상에서 거꾸로 이론을 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론이 없으면 논법도 없는 것이다. 논리는 이론으로서의 자기복제를 발견해내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삼단논법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의 정당성은 자기복제 시스템이 담보한다. 삼단논법의 논리적 추론순서는 자기복제이론의 전개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되짚어 간다. 자기복제가 근거에서 진술로 하향해가면서 스스로를 해체한다면 삼단논법은 거꾸로 진술에서 근거로 역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정리 : 자기복제는 전개하고 삼단논법은 추적한다]
삼단논법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하나의 진술과 두 개의 논거로 성립하고 두 개의 논거는 두 개의 =로 구성된다. 곧 자기복제이다.
진술은 진위판단 대상으로서의 진술이다. 진위판단은 같음(=)과 다름(≠)의 판단이고 같을 때 참이고 다를 때 거짓이다. 여기서 판단의 근거는 (=)의 2회 반복이다.
논거 ( A=B, B=C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근거.
진술 (A=C) ..판단대상
명제가 되려면 하나의 문장 안에 위 [ (A=B, B=C), (A=C) ]가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명제란 논리적 진위판단이 가능한 진술형태이다.
[사과는 빨갛다] --> 판단할 수 없다. 명제가 아니다. 서술, 내지 묘사이다.
[사과의 색깔은 빨갛다] --> 판단할 수 있다. 명제이다. 진술이다.
여기서 [ (사과A=색깔B)이고 (색깔B=빨강C)이다. 고로 (사과A=빨강C)이다. ]의 논리적 진술형태가 성립한다.
여기서 논리의 전개는 진술로서의 (빨강 C)를 의제로 하고 그 근거를 어디에서 이끌어오는가이다. 논거가 과연 자기복제로 하여 성립하였느냐의 판단이다.
이론은 진술의 진위판단에서 (=)를 판단하게 하며 (=)가 참이기 위해서는 논거로 제시된 두 개의 (=)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동일하다는 것은 곧 자기복제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일성을 어디에서 확보하는가가 이론이 된다.
그 이론적 근거가 자기복제 이론이며 자기복제는 집적도의 증가경로를 따라 제 스스로를 복제하면서 양적확장을 이끌어내어 이 세상의 방대함을 담보해 왔다.
즉 위 진술에서 논거 ( A=B, B=C )의 두 (=)는 진술 (A=C)에 있는 하나의 (=)로부터 자기복제 된 것이다. 그 자기복제가 이론적 시스템이 되고 그 자기복제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논리가 되며 진술은 그 자기복제의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고 논리적 판단은 그 자기복제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최초에 하나의 (빨강C)가 있었고 그 (빨강C)이 자기복제하여 두 개의 (사과A),(색깔B)를 낳은 것이다. 이 자기복제의 경로를 추적하여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사실에 접목하여 우리는 논리를 확보한다.
삼단논법을 성립시키는 이론이 자기복제 이론이다. 자기복제 이론이야 말로 우주존재의 기본적 원리이다.
사상의 유도
사상은 (A=C)라는 하나의 진술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 A=B, B=C )라는 두 개의 전제를 연결시켜 하나의 명제를 만들어놓은 인식의 형태이다. 곧 내부구조를 갖춘 시스템인식이다.
인식들에서 어떠한 주장이든, 견해든, 의사이든 그 내부에 시스템구조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상일 수 없다. 사상이기 위해선 그 내부에 적어도 두 개의 (=)를 포함시켜야 한다. 즉 자기복제의 과정이 담겨있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개의 (=)를 담지 않으면 단순히 서술 내지 묘사가 된다. 서술이나 묘사는 진위의 판단을 할수없고 따라서 문학, 예술의 영역이 될 수 있으나 과학 철학의 영역은 되지 않는다.
과학이란 곧 그 자기복제 과정의 추적이며 과정이 추적될 수 있기 위해서 자기복제 과정이 노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리 : 세계는 곧 자기복제의 현재진행이며 사상은 그 모사이다]
세계존재는 그 자기복제 과정의 현재적 진행이며 학문은 그 자기복제의 추적이며 사상은 그 자기복제를 모사한 인식형태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은 어떻게 최초의 하나로부터 이 모든 방대함이 복제될수 있었느냐의 인식이자 또는 앞으로 어떻게 복제되어 갈 것이냐의 판단이다.
사상의 유도는 근거로부터 동기가 복제되고, 동기로부터 목적이 복제되고, 목적으로부터 방법이 복제 되고, 방법으로부터 결실이 복제되어 왔다는 자기복제과정의 노출이다. 삼단논법은 드러난 진술로부터 자기복제과정을 검증하여 내는 것이다.
사상은 그 내부에 자기복제 과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 삼단논법으로 자기복제를 검증할수 있는 시스템구조를 담보해야 한다. 곧 이념과 주의이다. 사상이 상부조로서의 이념과 하부구조로서의 주의를 내포하는 것은 자기복제 되었기 때문이다. 이념이 복제하여 주의를 낳는 것이다.
자기복제와 삼단논법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동일한 시간대와 동일한 공간대를 동시에 점유하는 두 개의 점은 없다.
무언가 똑같다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대의 둘이 서로 같은 공간적 위치를 점하고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서로 다른 공간적 위치의 둘이 서로 동일한 시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다름들은 전체적으로 같고 부분적으로 다르다. 같은 것만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시,공간적 위치를 점유하는두개의 점은 없으므로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삼단논법에서 ( A = B )의 [ = ]들은 같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존재란 기본적으로 똑같은 것이 절대로 없으므로 모든 같다는 것은 일부분이 같다는 것이며 그것은 존재를 이끌어낸 대응요소의 두 변수 중 하나가 같다는 것이다.
즉 모든 같음들은 아버지가 같은데 어머니가 다르거나 어머니가 같은데 아버진만 다른 것이다. 서로 다르게 생긴 이복형제들간의 일면만의 같음들이다. 완전히 같은 것은 결닫코 세상에 없다. 삼단논법에서의 [ = ]도 예외가 아니다.
삼단논법 ....논거 ( A=B, B=C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근거.
진술 ( A=C ) ..판단대상
위에서 사실이지 ( A=B )의 경우는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사실은 ( AA=AB, AB=AC ), ( AA=AC )인 것이다. 같다는 것은 위에서 공통분모가 되는 A가 같다는 것이다. 공간변수와 시가변수 중 하나가 같은 것이다.
자기복제는 공간과 시간의 만남이다. 공간이 같으면 시간이 다른 것이다.
★(공간변수) ≪-- ♤(시간변수)
복제 1... ★♤ ★♤
≪-- ♧(시간변수 제 2)
복제 2... ★♤♧ ★♤♧ ★♤♧ ★♤♧
≪-- ◎(시간변수 제 3)
복제 3.... ★♤♧◎ ★♤♧◎ ★♤♧◎ ★♤♧◎
★♤♧◎ ★♤♧◎ ★♤♧◎ ★♤♧◎
≪--◇(시간변수 제 4)
복제 4.... ★♤♧◎◇ ★♤♧◎◇ ★♤♧◎◇ ★♤♧◎◇
˚˚˚˚˚˚˚˚˚˚˚˚˚˚˚˚˚˚˚˚˚˚˚
★♤♧◎◇ ★♤♧◎◇ ★♤♧◎◇ ★♤♧◎◇
≪--○(시간변수 제 5)
복제 5.... ★♤♧◎◇○ ★♤♧◎◇○ ★♤♧◎◇○ ★♤♧◎◇○
˚˚˚˚˚˚˚˚˚˚˚˚˚˚˚˚˚˚˚˚˚˚˚
★♤♧◎◇○ ★♤♧◎◇○ ★♤♧◎◇○ ★♤♧◎◇○
위 그림에서 개체들은 자기복제가 거듭될수록 서로 달라지지만 최초의 원형은 그대로 보존된다. 삼단논법은 같다와 다르다의 진위판단을 통해 복제가 거듭되어도 보존되는 원형을 추적해낸다.
삼단논법이 추적하는 같음들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같은 집적도에서 양적인 차이이고 하나는 다른 집적도에서 질적인 차이이다.
[삼단논법의 자기복제 추적]
1. 양적인 차이
--≫ 같은 집적도에서 순서가 다르다.
※ 예 -- (복제 5... A[★♤♧◎◇○] B[★♤♧◎◇○]˚˚˚)
그림에서 A와 B는 질이 같고 양이 다르다. 즉 방향이 같고 순서가 다른 것 이다. 삼단논법은 여기서 순서를 배제하고 방향의 같음을 추적한다.
※...[한개의 사과 (A)와 두 개의 사과 (B), 그리고 양자를 통일한 사과(C) ]
--≫ A는 C다. B는 C다. 고로 A는 B다.
<풀이> ..공간변수가 동일하고 시간변수가 다를 때이다. 동일한 사과나무에 열린 사 과이지만 8월에 수확한 사과와 9월에 수확한 사과는 크기다 다르다. 그러나 둘은 같은 사과이다.
2. 질적인 차이
--≫다른 집적도에서 순서가 같다.
※ 예 -- (복제 2... A[★♤♧] 복제 3...B[★♤♧◎]˚˚˚)
그림에서 A와 B는 양이 같고 질이 다르다. 즉 방향이 다르고 순서는 같다. 삼단 논법은 여기서 방향을 배제하고 순서의 같음을 추적한다.
※...[한상자의 사과(A)와 10개의 사과(B), 그리고 10㎏의 사과(C)]
--≫ A는 C다. B는 C다. 고로 A는 B다.
<풀이> ..시간변수가 동일하고 공간변수가 다를 때이다. 서로 다른 사과나무에서 수 확한 사과이지만 그 수량은 같다. 고로 둘은 같은 사과이다.
모든 변화는 공간변수와 시간변수의 상호대응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므로 동일한 공간적 위치와 동일한 시간적 위치를 동시에 점하는 두 개의 점은 없다. 즉 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은 절대로 없다. 우리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시간적 위치에 다른 공간적 위치이거나 같은 공간적 위체에 다른 시간적 위치임을 의미한다.
삼단논법은 이 두 변수 곧 방향(공간)과 순서(시간) 중 하나를 배제하고 나머지 하나를 추적하는 것이다.
[정리 : 같은 것은 다르고 다른 것은 같다]
1키로그램의 석유는 1다발의 화목과 열량이 같다. 3개의 사과는 두 개의 복숭아와 가격이 같다. 모양이 똑같은 두 개의 볼펜은 놓여있는 순서가 다르다. 같은 것은 반드시 다르다.
다른 것은 반드시 같다. 이러한 원리에 어긋나는 경우는 없다. 최초에 동일한 하나가 자기복제하여 이 우주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모든 것들에 같음을 발견하여 삼단논법으로 그 자기복제과정을 추적할수 있는 것이다.
사상의 전개
인식은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의 순서로 그 정보의 집적정도를 더해간다. 3단논법은 그 상부구조에서 기능하고 하부구조를 통일한다.
배경 --- 언제 어디서 5차정보 (근거) 이념 -- 중요성 복제 1 응용
실체 --- 누가 무엇을 4차정보 (동기) ↑ -- 필연성 복제 2 종합
연관 --- 왜 어떤 3차정보 (목적) -- 가능성 복제 3 분석
이행 --- 어떻게 하여지게 2차정보 (방법) ↓ -- 합리성 복제 4 수용
귀결 --- 하였나 되었나 1차정보 (결실) 주의 -- 현실성 복제 5 지각
귀결의 1차정보는 논리적 진위판단이 불가능하다. 단지 다른 정보에 의속되어 보조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다. 즉 불완전한 정보인 것이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가 기능하려면 접근경로가 설정되어야 한다. 1차정보는 경로지정이 안된 말초단계로서 독립된 정보로 기능하지 않는다.
논리적 판단은 3차정보로부터 가능하다. 이 단계에서 3단논법이 성립한다. 진위판단이 가능하다. 즉 인식의 집적과정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에서 분석가능한 것이다.
3차정보에서 3단논법을 통한 논리적 진위판단이 가능하지만 곧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진위판단을 해줄 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보는 충분히 집적되어야 한다. 4차정보의 종합에서 독립하고 5차정보에서 응용되어 완전히 기능된다.
[정리 : 사상은 주의에서 기능하지 못하고 5차정보인 이념에서 자기복제로 기능한다.]
사상의 전개는 1차정보나 2차정보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는 주의들에 5차정보인 이념의 집을 제공하므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기능한다는 것은 정보가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다. 곧 정보의 자기복제이다.
[정리 : 이념의 기능은 정보의 자기복제가 창의의 근거이다]
5차정보의 인식은 곧 응용이다. 응용된다는 것은 정보가 자기복제하여 또다른 정보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곧 인간에 있어 창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창의할수 있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창조할수 있다. 5차정보에서 자기복제의 기능 때문이다.
사상의 형식
소설가 장정일씨가 음란성이 있는 소설작품을 발표했다면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므로 진위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심하다. 심하지 않다]의 사적인 소감을 발표할수 있을 뿐이다.
마광수씨가 텔레비젼에 출연하거나 신문의 칼럼을 통해 발표한 글들은 문학의 범주가 아니다. 그는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그 신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문학이 아닌 과학, 내지 철학의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마광수는 대학교수의 학자적 신분을 강조하였다.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객관적 평가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판단할수 없다.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상의 형식은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수 있는 객관적 형식이며 거기엔 반드시 차별화된 두 개의 (=)를 필요로 한다. 문학, 예술의 범주가 아닌 과학, 철학의 담론이려면 반드시 사상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주관을 객관화시켜 타인으로 하여금 진위판단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기술하여 주장해야 한다.
사상의 형식은 [옳다, 그르다]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형식이다. 마광수의 주장은 사상이 아니다. 사적인 의견개진일 뿐이다. 그 내부에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적 주장들이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채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주장되고 있다. 정치는 혼자만의 놀이가 아니다. 사회공간에서 공유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주관적 소신의 고집이 아니라 객관적 검증가능한 원칙이다.
서구 선진국 정당들의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 혹은 우파 이데올로기의 복잡하고 짜임새있는 사상체계로부터 유도된 전술이므로 객관적인 비평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불쑥 던지는 정치적 화두들은 도무지 비평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하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문학과 철학의 경계점에서 모호한 화법으로 양자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주관을 마치 이념적 사상토대에 기초한 발언처럼 포장하므로서 다중들에게 잘못된 고정관념을 유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불쑥 던져지는 [화두]들은 비판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이 되는 것은 비판과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언어들은 이미지, 느낌, 연상, 뉘앙스, 유추의 무기로 함부로 편견을 유포하면서 결코 책임지지 아니한다.
이문열의 주장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들은 철학이 아니고 사상이 아니고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대가 빈곤하기 때문에 비판할수 없다. 이문열이 그른 것은 그의 주장이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그저 느낌들과 이미지들과 기분들을, 정치적인 양념으로 반죽하여, 문학의 방식으로 포장하여 불쑥 던져버린다. 즉 그 내부에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문열의 주장을 하나의 화두로 받아들여 논란하다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해버린다. 남는 것은 기분나쁨 뿐이다.
사상의 체계
사상은 생각 思, 생각할 想이다. 생각 하나는 논거(思)가 되고, 생각 둘은 진술(想)이 된다. 진술은 논거로부터 자기복제된 것이다. 사상은 논거와 진술의 형식을 갖춘 생각의 형태라는 점에서 망상, 느낌, 이미지, 연상, 유추, 감상, 이미지, 소감따위와 구분된다.
사상은 적어도 기능과 체계를 가진 생각들의 집합형태이며 적절하게 상대를 찾아 그 기능을 발휘하는 시간적 과정이다.
사상의 기능은 최초 근거로부터 유도하여 동기에 의해 유발되고 목적에서 주어지며 방버에서 마련되고 결실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실현과정이다.
<사상의 기능>
1. 근거 - 유도되는가?
2. 동기 - 유발되는가?
3. 목적 - 찾아지는가?
4. 방법 - 마련되는가?
5. 결실 - 얻어지는가?
사상의 기능은 예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에서 유도되고 유발되고 찾아지고 마련되고 얻어져서 실익을 제공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기능적 실익이 없다면 그건 사상이 아니다.
이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사상의 검증은 이 시스템의 진위에 대한 판단이며 그 판단은 이 사상체계의 전개가 자기복제에 으한 연속성의 획득에 기인하느냐의 여부이다.
먼저 근거가 주어지고 그 근거가 자기복제하여 동기를 낳고, 동기가 자기복제하여 목적을, 목적이 밥법을, 방법이 결실을 낳는 순서대로 자기복제가 진행된다.
우리가 사상으로 하여 얻는 것은 결실에서의 실익이다. 그 실익이 궁극적은 차원에서 어디에서 얻어오는가? 근거에서 얻어온다. 근거로부터 배달하는 수단이 자기복제이다.
사상은 무언가 명백히 얻어오는 것이다. 얻어온다면 이쪽에서 생기는 것 만큼 어딘가에 손실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최초에 근거가 되는 손실은 동력원에서이다. 동력원에서 손실이 일어나는 것만큼 결실에서 실익이 얻어진다. 곧 동력발생이다. 자동차는 그 동력전달의 매개가 된다. 곧 자기복제의 시스템이다.
사상체계 자동차의 동역전달체계
근거 (손실) 동력원
동기 동력발생
목적 동력제어
방법 동력전달
결실 (실익) 동력효과
생각이 사상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근거를 제시하고 실익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실익이 증명되지 않고 근거가 불투명한 편견, 고정관념, 소신, 망상, 허구들과 충분히 구분된다. 실익을 남긴다는 것은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결집하여 명백히 유효한 기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사상의 형성
노자가 무위자연을 주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실익이 주어진단 말인가?] 실효성이 없으면 사상이 아니다.
갈릴레이가 말했다. [지구는 돈다] 그래서 어떠한 이익이 있다는 말인가? 이는 학문적 인식일 뿐 사상은 아니다.
사상은 실익을 제시한다. 그 이익이 어디서 훔쳐온 것이 아니고, 허위가 아니며,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그 명석한 근거를 제시할 때 우리는 사상이라 부른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상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인생에 주어진 시간마큼 살아가면서 그 생에 그만큼 채워넣어야 한다. 어디에선가 얻어와서 얻어온 만큼 채워넣는다. 그 얻어올 데가 있어야 한다. 근거이다.
사상은 그 얻어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사상의 예..기독교 사상
체계 기독교사상 학문
1. 근거는 ? 창조론 존재론
2. 동기는 ? 원죄설 인식론
3. 목적은 ? 구원 정신론
4. 방법론 ? 믿음소망사랑 방법론
5. 결실은 ? 천국행 문명론
기독교사상은 명백히 천국행의 실익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실제적인 이익은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에 기초하고 있다. 원죄설과 구원론과 믿음은 중간단계로서 그 창조로부터 얻어와서 천국으로 배달하는 체계로 되어 있다. 이 사상이 옳은지의 여부는 학문이 증명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어떠한 주장이나 견해는 반드시 이러한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 있어야 한다.
정치가는 정치사상을 가져야 하고 교육가는 교육사상을 가져야 한다. 문학가는 문학사상을 가져야 하고 사업가는 경영사상을 가져야 한다.
정치가의 사상은 정치의 궁극적 근거를 어디에서 얻어오고 어떠한 결실을 제공하며 그 중간단계에서 자기복제로의 배달경로는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상의 이해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생각해보고 혹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혹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온 답들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의 근거를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근거는 없다. 어떠한 답변들도 문제의 테두리 안에서의 사실일 뿐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답은 아닌 것이다. 설사 그러한 답변들이 옳다고 인정을 하더래도 그것을 받아들이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바른생활을 잘 가르치면 악동들은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수긍을 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악동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지도에 무언가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는 반증이 된다.
말로만 옳아서는 부족하다. 실제의 행동으로 연결시키려면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선생님의 그 올바른 결론이 구체적으로 나의 행동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양자 사이에 매개가 되는 도구로서 기능할 무언가 하나가 더 필요한 것이다.
학문과 사상은 여기에서 차이가 있다. 학문이 [사실이지 옳다]는 점을 드러낸다면 사상은 [그러므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학문적 인식을 행동과 실천으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의 매개가 사상이다.
옳으니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이 나 바깥에 있지 않고 나 안에 있으니까 실천하는 것이다. 사상은 그 옳음이 나 안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어 확인시켜 준다.
[정리 : 학문은 인식하게 하고 사상은 행동하게 한다]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 '이것이 선이다.' 하고 말할수 있겠지만 단지 그렇게 말할수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이 막무가내로 '난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고 나오면 대책이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이 옳다는 점이 곧 인간이 실천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까지를 보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옳다면 곧 행동해야 한다. 그 옳음들이 인간을 떠나서 인간 바깥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나 안에서 나를 흔들어 일떠서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이다.
사상과 학문
학문이 존재의 사실을 위주로 해서 인간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밝혀내는 것이라면 사상은 인간을 위주로 해서 인간이 그 학문의 성과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이다.
학문이 왜곡되는 것은 학문과 사상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학문이 1차적이라면 사상은 2차적이다. 학문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면 사상은 인간의 관점에서 학문을 받아들여 거기에 용도를 부여하는 것이다.
학문은 대상을 인간과 완전히 분리해 인간의 바깥에 두고 객관의 자세로 관찰하기이며 사상은 그리하여 얻은 인식의 성과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장악하여 인간의 영향의 미치는 범위 안에 가두어 두고 주관의 자세로 그 학문적 성과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이냐의 인간중심적 논의이다.
[정리 : 학문은 객관이고 사상은 주관이다]
그러므로 학문이 시선을 출발점에 두고 그 근원이 어딘가 시원을 찾는다면 사상은 시선을 귀결점에 두고 그 성과가 무엇인지 실익을 모색한다. 인간이 세상과 만남에 있어서 학문은 세상을 앞에두고 인간을 뒤에둠이며 사상은 인간을 앞에 두고 세상을 뒤에 둠이다.
학문과 사상을 댄다면 학문이 먼저고 사상은 나중이다. 먼저 올곧게 인식하고 다음 방법을 강구하여 실천한다. 학문은 절대적이고 근원적이며 완전을 지향한다. 사상은 상대적이고 결과적이며 융통성을 발휘한다.
학문의 기본적인 테마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이고 사상의 기본적인 설정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이냐?' 이다.
학문이 왜곡되는 것은 학문과 사상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뒤섞어 생각하므로 인위적인 목적이 앞세워져서 학문의 순수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2차적인 것이며 실천적인 것이다, 먼저 학문하여 인식을 완성시켜 놓지 않으면 안된다.
주의와 이념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이러한 근거의 문제, 답이 안나오는 문제, 답이 있어도 해결이 안되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두가지의 방법이 제시된다.
하나의 방법은 그 해당문제 안의 내부논리에 기초한 근거찾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해당문제 바깥에서의 외부논리에 기초한 근거찾기이다. 여기서 내부논리가 곧 주의이고 외부논리가 곧 이념이다.
주의는 하부구조에서 자본주의, 민주주의 할 때의 주의이고, 이념은 상부구조에서 그 전체를 통일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기업이념, 건국이념(국시), 인류의 이념(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 이런 식의 이념이다.
이념은 크게 나아갈 방향을 지정하고 사상은 작게 구체적인 방편을 제시한다. 사상은 이념과 주의 양자를 가운데서 통일한다.
[정리 : 사상은 크게 통일하여 이념이 되고 작게 추구하여 주의가 된다]
주의를 정당화하는 내부논리의 근거는 합리성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논의이든 반드시 어떤 내재한 시스템이 있고 그 일의 성과가 그 시스템의 기능에 충분히 봉사한다는 말이다.
합리성에 기초해서 살펴볼 때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하면 그 옳고 그름의 판단 근거는 그 삶 안에서의 시스템구조가 원활하게 기능하는가의 여부에서 찾아진다.
이념을 정당화하는 외부논리의 근거는 필연성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그래야만 존재자체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필연성을 부정하는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어떤 것이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위, 한 차원 높은 곳에 자기존재를 보장하는 힘이 있고 그 필연성을 부정하면 자기존재가 부정된다.
필연성에 근거해서 살펴볼 때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 하면 그 옳고 그름의 판단근거는 자기존재의 성립 그 자체이다. 그 옳음을 배반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정리 : 주의는 이익을 가져다 주고 이념은 존립을 보장해준다]
주의의 합리성은 인간에게 이익을 주고 이념의 필연성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장해준다. 주의를 배반하면 손해가 막심하고 이념을 배반하면 인간이 부정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이것이 옳다]라고 가르쳤을 때 악동들은 겉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수긍하나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는다. 플러스 알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사상이다.
주의에서 사상은 그 선생님이 말한 옳음이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다줌을 악동들에게 납득시켜서 옳은 실천으로 이어지게 하며, 이념에서 사상은 그 선생님이 말한 옳음이 그 어린이의 자기존립을 보장함을 납득시켜 옳은 실천으로 이어지게 한다.
주의...질서를 잘 지키면 모든 사람이 불편없이 버스에 오를수 있다.
이념...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이는 우리와 같은 편의 사람이 아니다.
사상의 문제는 [비록 그것이 옳다고 하나 내가 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사상은 위 두가지 방법 곧 주의와 이념으로 그들을 설득한다.
[난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하는 거부자들에게 주의는 그 강조되는 [옳음]들이 현실적으로 당신에게도 이익이 되니까 당신이 그 [옳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이념은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의 존재는 무의미해지니까 거부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우쳐준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여 실천하게 한다. 주의는 현실적 이익을 제공하고 이념은 거부할수 없는 지상명령으로서 자기존립을 담보한다.
기업주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기업은 손해를 보고 기업이념을 지키지 않으면 기업은 망한다. 국가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국가는 분열되고 국가(건국)이념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는 망한다. 고로 실천할 수 밖에 없다.
[정리 : 주의는 현실적 이득이며 이념은 자기존립을 담보하는 지상명령이다]
모든 사람이 [난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하다가는 정말 다죽게 된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는 인간임을 포기한 발언이지만 그러한 발언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자기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발언으로 자기를 정당화 하려는 그 자체로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죽기 전에는 이념의 지상명령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주의에서 시스템기능
권력에는 권력의 생리가 있고, 조직에는 조직의 생리가 있다. 그 생리가 곧 합리성이다.자동차라면 최저연비로 최장거리를 운행하는 것이 합리성이고 인생이라면 최저노력으로 최대행복을 얻는 것이 합리성이다.
뭐든 둘 이상이 통합되어 기능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합리성으로서의 생리가 있다. 조직이면 애시당초 그 조직을 결성할 때의 목적(이념)을 떠나서 현재 그 조직자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쪽으로 조직의 역동성이 움직여나가는 현상이 생리이다. 조직의 존재목적이 해소되려 할 때 조직의 유지를 위해 최초의 목적을 배반하는 경우이다.
삶 그 자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보고 그 시스템 기능에 최적접근을 꾀하며 그 기능에서 성능을 이끌어내는 즉, 최고의 성능에 최적접근 하려는 것, 다른 말로 잘사는 것이 인생에서의 합리성의 추구이며 그 합리성이 곧 옳은 것이다.
[정리 : 잘사는 것이 합리적인 삶이며 잘 살려는 것이 합리주의적 인생관이다]
내적 시스템구조의 기능적 최적접근을 꾀하는 합리성 판단은 일정정도의 유효함을 가지지만 더 근원적 질문에서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즉 그 시스템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이다.
'나는 행복할 생각이 없다'거나 '나는 이 자동차를 자동차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근원적 부정의 단계에서 합리성에 기초하는 주의는 효력을 상실한다.
도무지 인생을 살아갈 생각이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이 옳은 삶이다' 하고 설득할수 있는 것이지 아예 삶을 포기한 이에게는 그러한 설득이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사상은 이념을 제시한다.
이념은 외적 필연성을 찾아내므로서 근원에서 부터 증명해 들어가는 것이다. 내적 합리성이란 어떤 대상이 [그 기능을 발휘하는가?]의 질문이라면 외적 필연성이란 [그 존립자체가 성립하는가?]의 질문이다.
※ 의제 : 자동차는 잘 달려야 한다.
주의에서 합리성 판단 --> [그 자동차는 최고연비의 최고속도로, 최적상태로 주행할수 있 다. 고로 그것(못 달리지 않고 잘 달리는 것)이 옳다]
이념에서 필연성 판단 --> [그 자동차는 분명히 자동차이다. 수레나 배가 아닌 자동차이 다. 고로 그것(잘 날지 않고 잘 달리는 것)이 옳다]
흔히 합리주의를 실용주의와 대립시켜 좀 더 이념적인 측면을 합리주의라 부르고 좀 더 결과적인 측면을 실용주의라 부르나 이러한 구분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모든 주의는 합리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다만 그 실용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보이지 않는 잠재적 성과에 만족하는 자를 더 합리주의로 보고 가시적으로 나타나야만 만족하는 자를 더 실용주의로 보지만 이건 심리성격과 연관된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이론이 옳다면 합리적인 것은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한다. 실용적이지 않은데 합리적이라면 무언가 이론에서 잘못된 것이다.
[정리 : 이론이 옳다면 합리적인 것이 곧 실용적인 것이다]
틀린 이론을 추종하는 이들이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실용을 부인하고, 이론에 자신이 없는 이들이 실용을 내세우고 합리를 부인한다. 이론이 옳다면 합리적인 것이 곧 실용적인 것이다.
주의에서 이념으로
행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리인 법이다. 그러나 대신으로 그 행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의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 그 자체의 근거는?]하는 질문이 던져진다.
행복한 삶의 주의는 올바른 삶을 살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올바른 삶을 주문하는 올바름의 근거이다. 행복할수 있으므로 올바른 것이다. 행복할 생각이 없다면 이 근거는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할 생각이 없는 이에게 그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의 근거를 되물을수 있다.
행복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올바른 삶은 설득력이 없지만 그 사람의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 자체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판단자체를 유효하게 하는 2차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어떻게 판단했든 판단의 결과라면 그는 적어도 사람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판단은 사람의 자격으로 한 판단이며 그 판단이 유효하기 위해서 그는 그 사람의 자격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사람의 자격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자격을 근거삼아 [사람이기 휘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외부논리의 시스템을 판단의 유효한 근거로 제시할수 있다. 이 외부논리의 시스템까지 부인한다면 그는 사람임을 부인했으므로 [행복할 생각이 없다]는 판단 또한 부정되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정리 : 내부논리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외부논리를 인정해야 한다]
[이 자동차는 나쁜 자동차이다]라고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동차는 자동차이다는 판단을 전제하는 것이다. 고로 [잘 살 생각이 없다]라는 판단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적어도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는 [인간은 행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곧 부정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긍정한 셈이 된다. 행복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분을 부정할수 있을 뿐 전반적인 부정은 불가능하다.
내적 합리성이 [시스템이 기능하는가?] 의 판단이라면 외적 필연성은 [시스템은 성립하는가?]의 판단이다.
이념은 주의에 대해 사상이다. 주의는 시스템의 기능을 근거로 하며 이념은 시스템의 성립을 근거로 한다.
[정리 : 주의는 하부구조에서 기능을 실현시키고 이념은 상부구조에서 기능을 부여한다]
정치사상을 예로 든다면 [이렇게 해야 좋은 정치다] 하는 판단이 주의판단이라면 [이것이 정치라는 것이다]하는 판단이 이념판단이다.
주의가 정치와 정치를 비교한다면 이념은 정치와 비정치를 비교한다.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하고 말할수 있는 것은 첫째 주의차원에서 그것이 합리적인 삶, 곧 시간을 절약하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현명한 판단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념차원에서 바로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리 : 이념은 주의에 선행한다]
올바른 삶이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스스로 불행을 향하여 나아갔다. 즉 주의에서 합리성판단을 부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중근의사에게 되물을 수 있다. [행복을 부인하는 근거는?]
안중근의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 행복이 인간의 존립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제는 이땅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우리는 안중근의사의 그러한 판단을 이념이라 부를수 있다.
시스템에서 주의와 이념의 통일
주의와 이념의 판단은 학문의 집적도 2에서 시간변수 중요성, 필연성, 가능성, 합리성, 현실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것이든 [옳다 혹은 그르다]하고 판단할수 있는 것은 첫째 거기에 현실성(효과있음)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거기에 합리성(효율적임)이 있기 때문이고, 셋째 거기에 가능성(목적부여)이 있기 때문이고, 네째 거기에 거기에 필연성(자기존립)이 있기 때문이고 다섯째 거기에 중요성(영향을 미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변수 5에서 주의는 가능성 이하 현실성, 합리성을 부여하며 이념은 그에 앞서 중요성 필연성을 부여한다.
[ 사상체계의 시스템 전개도 ]
이념 <---------> 주의
+------------+-------------+------------+-------------+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1, 중요성 2, 필연성 3, 가능성 4, 합리성 5, 현실성
(상부구조) <---------> (하부구조)
사상은 기업이념, 건국이념, 하는 식으로 근본적인 실천근거를 지정하는 상부구조에서의 이념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하는 식으로 새부전략으로 기능하는 하부구조로서의 주의들을 하나의 시스템구조로 통일한다.
사상은 이념과 주의들을 통합하여 유기적인 생명성을 발휘하는 하나의 체계로 성립시키므로서, 인간에게 인식된 학문의 방법적 실천과정에서 구체적인 그 실천의 순서와 방향을 특정하여 하나의 연속적인 전개과정으로 조율해낸다.
사상의 중요성
1. 근거의 중요성이란 영향을 미침을 말한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한다. 인간은 결코 그 실천을 거부할수 없다. 거부하려 해도 이미 영향권 안에 갖혀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그 실천을 거부할수 없는가? 이미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변수들은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피하려 해도 피할수 없음을 말한다. 우리가 이미 그 영향력 안에 갖혀 있기 때문에 사람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사람으로서의 실천을 벗어날 수 없다. 곧 지상명령이 되는 것이다.
기업을 문닫지 않는 한 기업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국가를 만닫지 않는 한 건국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류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기업이념은 기업의 지상명령이다. 국가이념은 국가의 지상명령이다. 삶의 이념은 인간에게 지상명령이다. 선택의 권한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
인간은 결코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 이미 조상으로 물려받은 역사와 전통과 유산을 한짐 짊어지고 태어난다.
인간은 누구든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최소한의 생존보장을 얻어서 태어난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쟁취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 구속은 작게는 성년이 되기까지 크게는 죽을 때가지 인간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려 해도 결코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리 : 근거의 중요성은 사상의 실천주체인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한다]
인간이 이념을 배반하고 거역하려 해도 죽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죽는다해도 그 죽음의 결정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사상에서 인간은 이념의 지상명령에 복종하던가 아니면 무지와 무능에 의해 잘못된 판단을 하던가 둘 중 하나이며 현명하고 옳은 판단을 하고서도 이념의 지상명령에 거역할 수는 없다.
이념에서 근거의 판단이 올바른 것은 결코 거역할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올바른 판단은 늘 백프로 이념과 일치하며 여기에서 어긋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이념과 일치하지 않으면 백프로 잘못된 판단이다.
사상의 필연성
2. 동기의 필연성이란 자기의 존립을 말한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한다. 우리가 그것을 부인할수 없는 것은 부인했을 경우 자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사상은 인간에게 삶의 동기를 제공한다. 동기를 잃었을 때 방황하게 되며 무너지게 된다.
기업에는 기업의 존립동기를 제공하고, 국가에는 국가의 존립동기를, 인간에게는 인간의 삶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사상의 필연성이다. 그 성과나 이익은 나중의 문제이고 우선으로 자기존립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상하여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념에서 그 동기의 판단이 올바른 것은 최소한 자기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사상하지 아니하고서는 자기존재가 깨어지므로 우리는 그 사상의 판단을 옳다고 수긍하고 받아들여 실천하게 된다.
[정리 : 동기적 필연성은 사상의 실천주체를 실재적으로 존립시킨다]
거짓사상과 참사상의 차이는 그 사상하는 동기가 자기존립에 영향을 미치는가의 차이이다. 자기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동기제시는 결단코 허구이다.
마르크스 사상..혁명해야 한다.
왜? 동기는? 혁명하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죽는가?
자기존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동기, 실천하지 않아도 죽게 되지 않는 동기는 사상의 동기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사상이라면 실천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죽는다.
인간이 사상하는 것은 사상이 삶의 동기, 기업의 동기, 국가의 동기, 인류문명의 동기를 제공하고 그 동기가 인간의 현존재를 자기존립 차원에서 담보하기 때문이다.
사상의 가능성
3. 목적의 가능성이란 구체적인 실천의 대상이 특정됨을 특정한다. 기업이면 기업의 이윤, 국가이면 국민의 평화, 개인이면 개인의 삶에서 가능한 성취요소들을 공간 상에서 특정하여 낸다. 사상에서 실천하므로서 가능하다.
공간상에서 특정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간이 사태에 개입하여 상황을 변화시킬 대상을 명백하게 드러내보인다는 것이다.
이상한 사이비종교라면 그 실천대상이 명목으로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면 기업사상은 그 기업의 경영실체가 공간상에 존재해야 한다. 곧 자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라면 국가사상은 그 국가의 정치행위가 실제 공간상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즉 영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이비종교의 경우 영토없는 국가에서 가상의 전쟁을 하고 전쟁비용을 지불받는다. 사상은 이런 사이비들과 진정한 것을 구분할수 있게 한다.
[정리 : 목적적 가능성은 사상의 실천대상을 공간상에서 특정하여 노출한다]
국가가 전쟁하는 것은 영토를 두고 하는 것이다. 기업이 경영하는 것은 자본을 두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주술하는 것은 없는 영토와 없는 자본을 있다치고 거짓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법사의 주술은 사상이 못된다.
진정한 사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할수 있는 공간적 영역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사상의 실천영역은 개인적 권리와 사회적권력의 함수관계이다. 우리는 개인적 권리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실천하므로서 정당한 사회적 권력을 성공적으로 도출해낸다.
사상의 합리성
4. 방법의 합리성이란 시간상의 현재적 실천과정에서 시간이 더 적게 걸림을 말한다. 사상은 인간에게 가장 빠른 길을 제시하고, 그 사상을 실천함에 있어서 인간은 누구보다 더 빠른 길로 나아가므로서 더 쉽게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인간은 때로 무지로 하여 사상을 배반하게 되지마는 한 개인이 사상을 배반한다고 해서 역사가 되물려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차피 가게되어 있는 길을 더디가게 될 뿐이다.
인간이 나아가게 되는 경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과 필요성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 인간이 사상을 배반한다는 것은 다만 어차피 갈 것을 좀 천천히 가게하는 정도의 영향이 있을 뿐이다. 근본에서 가는 방향을 뒤집을 수는 없다.
[정리 : 방법적 합리성은 사상의 설친과정에서 시간을 절약한다]
자유주의사상은 개인적 의사결정에서 시간을 덜 걸리게 하고, 민주주의 사상은 사회적 권력행사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없이하여 시간을 단축시키며, 자본주의 사상은 경제적 실천행위에서 시간을 절약하게 해준다. 실제로 시간을 단축시키면 그것이 합리적이며 사상은 그 합리성을 보장한다.
혹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더 시간을 덜 걸리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경우 범위를 축소시켜 놓고 본 것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라는 이념적 목표]에서 보자면 민주주의야 말로 시간을 절약해준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념은 기업경영에서 경제적 성과, 혹은 전장에서의 전투적 승리처럼 좁지 않고, 전체인류의 행복으로서 매우 범위가 크기 때문이다.
독재가 경영에서, 전투에서 단기적 성과를 보장한다해도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부작용을 낳아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만큼 결국은 시간이 더 걸리게 되는 것이다.
사상은 옳다. 민주주의를 할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인정이 되지만 할줄 알면서도 시간이 더 걸리므로 안하는 경우란 있을수 없다.
투표행위라던가 집단적 회의라던가 하는 민주절차를 곧 민주주의 자체로 보는 착오를 범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개인적 권리를 결집해서 사회적 권력을 성립시킨다]는 민주주의 본래의 의미로 본다면 언제나 개인적 권리의 충분한 결집이라는 민주주의가 시간을 절약하여 준다.
사상의 현실성
5. 결실의 현실성이란 그 사상 실천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증명됨을 말한다. 비현실적이란 나타나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 사상이 옳다면 그 성과는 반드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실현되어 나타난다.
저승에 가서 보답받는다는 식의 변명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허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체될 수는 있어도 그 올바른 사상의 성과는 명백히 현실에서 보장된다.
인간이 사상하는 것은 결국 그 성과를 현실에서 확보하자는 것이다. 혹 고상하니 무욕하고 무심하여 마음을 비운 뜻이 [아무 성과도 없어도 좋다]는 식으로 말해지지만 이 경우 대개 거짓이다.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틀린 사상이기 때문이다.
[정리 : 결실의 현실성은 사상의 실천효과를 현실에서 나타낸다]
사상의 성과는 현실에서 나타나야 한다. 혹 저승에서, 혹 내세에서, 혹 심리적 보상 하는 식으로 숨는 것은 반드시 허구이다. 잘못된 사상이다.
자유주의 사상은 개인에게 권리확보의 이익을 가져다 준다, 민주주의 사상은 사회에 합리적 권력행사절차를 가져다 준다, 자본주의 사상은 경제적 효율성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이익이 되고 우리는 그 현실성을 확인할수 있다.
사이비종교의 외계인 숭배사상은 현실 대신 내세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상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현실에서 증거할수 없는 모든 사상은 백프로 거짓사상이다.
사상의 의미는 [그것이 옳다 해서 내가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다면 거짓이므로 사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지 않아도 좋다. 옳은 사상이 신비속으로 숨는 경우는 결단코 없다.
사상체계와 인간
사상체계는 이념에서 출발하고 주의로 귀결되는 하나의 연속된 시간과정이다. 잘못된 사상은 잘못 인식된 학문에 기초하고, 잘못 설정된 이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사상체계는 그 전개과정을 드러내는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의 주인인 인간과의 관계를 내밀히 파악하므로서 올바른 사상을 가지게 된다.
[사상체계의 전개도]
이념 <---- ----> 주의
사상체계 :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공간변수 : 전체인류 개인 (개인 : 사회) 사회화 문명
시간변수 : 중요성 필연성 가능성 합리성 현실성
공간영역 : 세계영역 개인영역 지배영역 영역이동 새로운 영역
시간영역 : 시간통일 공간->시간 과거,현재, 미래현재 ->미래 현재시점
학문의 영역에서 인간은 종속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존재는 원래 있는 것이고 인간은 인식의 방법으로 그 존재에 접근해 간다. 이 과정에서 결코 인간이 그 존재를 훼손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창작품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가 되어 사상체계의 전개과정을 이끌어간다. 인간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사상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긴이 사상을 위해 복종할 이유는 없다.
[정리 : 사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사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어떤 한 특정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고 또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임질수 없다. 책임질수 없으므로 주인이 아니다.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다. 그러나 한 개인일수는 없다. 사상의 주인됨은 한 개인 차원이 아닌 전체인류 차원에서 성립한다. 공간역역에서 한 지역 차원이 아닌 전체 세계영역에서 설정된다. 시간영역에서 특정시점이 아닌 모든 시간대를 통일한다.
즉 사상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간이 주인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작품이지만 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역사과정을 통일하여 전체세계영역을 통일하여 전체인류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사상은 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통일한 전체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사상체계의 전개
사상의 주인은 인간이지만 전체인류가 주인이 되지 한 개인이 임의로 사상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념은 전체인류를 위해 봉사하지 한 개인을 위해 봉사하지는 않는다. 모든 이념적 판단은 한 개인이 아닌 전체인류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이념이 인간을 이롭게 하지만 전체인류를 이롭게 하지 한 개인을 이롭게 하지는 않는다.
사상의 주인이 전체인류라 해서 한 개인이 전체인류를 위해 희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인류 또한 개인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이념의 주인되는 전체인류란 개인들에서 공통분모, 곧 공유되는 성질들만 취합한 것이다. 개인들은 서로 다르지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 공유되는 부분만을 통일하여 놓고 말하는 것이다.
사상의 전개란 어떻게 그 전체인류의 다수에서 한 개인을 이끌어내고 또 그 개인들의 실천을 사회적으로 통합할 것인가이다. 사상체계의 전개는 시간상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낸다. 다수가 개인을 보장하고 개인의 실천이 다시 다수로 회귀되는 과정이다.
[정리 : 이념의 판단기준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체인류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이념적 추구는 한 개인의 차원에서는 결코 달성될수 없는 것이다. 이념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자기정당화이며 개인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할수 있는 모든 실천활동의 기초는 조상으로부터 배달받고 이웃으로부터 도움받은 협력의 덕택이다. 이념은 이러한 세계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세계로부터, 역사로부터, 전체인류로부터,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한아름씩 부여받아 태어나는 것이며 그 받음들에 의해여 나의 현존재가 규정되는 것이다.
[정리 : 인간은 빈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한아름씩 받아서 태어난다]
사상체계의 전개는 이 받음들의 공간변수에 인간의 일생이라는 시간변수를 대응시켜 그 받음들을 자기복제하여 양을 늘려놓은 만큼 이 사회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다. 사상의 옳고 그름 판단은 순전히 이러한 측면에서의 판단이다.
사상의 문제는 학문이 찾아낸 인식의 성과들을 인간이 왜 받아들여 실천해야야만 하는가이다. 이념은 우리의 현존재가 무수한 배달받음에 의지하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리이며 주의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 성과들을 되돌려줄까에 대한 생각이다.
[정리 : 이념은 받은것을 돌려주라 하고 주의는 어디로 어떻게 돌려주라 한다]
우리는 이미 받았으므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한 커다란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 이념이
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돌려줄 것인가?
이미 받았으므로 돌려주어야 하고(근거의 중요성) 돌려주려면 먼저 그 돌려줌의 주체가 되는 자기자신을 확보해야 하며(동기의 필연성) 또 대상과 접촉해야 하고(목적의 가능성) 상당시간이 걸리고서야(방법의 합리성)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난다(결실의 현실성).
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이며 곧 사상체계의 전개이다.
사상체계에서 자기복제
사상에서 이념과 주의를 연결하는 것은 시스템구조이며 그 시스템구조는 자기복제이론에 기초한다. 그 자기복제 이론을 증명하는 것은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A=B)이고 (B=C)이다. 고로 (A=C)이다]의 형태를 가진 하나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하나의 진술과 두 개의 논거로 구성된다. (A=C)가 진술이 되고, (A=B) (B=C)가 논거가 된다.
삼단논법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논법을 성립시키는 이론이 필요하다. 이에 제시되는 것이 집적도 이론에 근거한 자기복제이론이다. 먼저 이론이 있고 그 이론이 사실에 접목되어 현상을 실현한다.
논법(논리)은 이론을 거꾸로 되짚어 그 결과적 현상에서 거꾸로 이론을 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론이 없으면 논법도 없는 것이다. 논리는 이론으로서의 자기복제를 발견해내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삼단논법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의 정당성은 자기복제 시스템이 담보한다. 삼단논법의 논리적 추론순서는 자기복제이론의 전개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되짚어 간다. 자기복제가 근거에서 진술로 하향해가면서 스스로를 해체한다면 삼단논법은 거꾸로 진술에서 근거로 역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정리 : 자기복제는 전개하고 삼단논법은 추적한다]
삼단논법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하나의 진술과 두 개의 논거로 성립하고 두 개의 논거는 두 개의 =로 구성된다. 곧 자기복제이다.
진술은 진위판단 대상으로서의 진술이다. 진위판단은 같음(=)과 다름(≠)의 판단이고 같을 때 참이고 다를 때 거짓이다. 여기서 판단의 근거는 (=)의 2회 반복이다.
논거 ( A=B, B=C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근거.
진술 (A=C) ..판단대상
명제가 되려면 하나의 문장 안에 위 [ (A=B, B=C), (A=C) ]가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명제란 논리적 진위판단이 가능한 진술형태이다.
[사과는 빨갛다] --> 판단할 수 없다. 명제가 아니다. 서술, 내지 묘사이다.
[사과의 색깔은 빨갛다] --> 판단할 수 있다. 명제이다. 진술이다.
여기서 [ (사과A=색깔B)이고 (색깔B=빨강C)이다. 고로 (사과A=빨강C)이다. ]의 논리적 진술형태가 성립한다.
여기서 논리의 전개는 진술로서의 (빨강 C)를 의제로 하고 그 근거를 어디에서 이끌어오는가이다. 논거가 과연 자기복제로 하여 성립하였느냐의 판단이다.
이론은 진술의 진위판단에서 (=)를 판단하게 하며 (=)가 참이기 위해서는 논거로 제시된 두 개의 (=)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동일하다는 것은 곧 자기복제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일성을 어디에서 확보하는가가 이론이 된다.
그 이론적 근거가 자기복제 이론이며 자기복제는 집적도의 증가경로를 따라 제 스스로를 복제하면서 양적확장을 이끌어내어 이 세상의 방대함을 담보해 왔다.
즉 위 진술에서 논거 ( A=B, B=C )의 두 (=)는 진술 (A=C)에 있는 하나의 (=)로부터 자기복제 된 것이다. 그 자기복제가 이론적 시스템이 되고 그 자기복제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논리가 되며 진술은 그 자기복제의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고 논리적 판단은 그 자기복제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최초에 하나의 (빨강C)가 있었고 그 (빨강C)이 자기복제하여 두 개의 (사과A),(색깔B)를 낳은 것이다. 이 자기복제의 경로를 추적하여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사실에 접목하여 우리는 논리를 확보한다.
삼단논법을 성립시키는 이론이 자기복제 이론이다. 자기복제 이론이야 말로 우주존재의 기본적 원리이다.
사상의 유도
사상은 (A=C)라는 하나의 진술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 A=B, B=C )라는 두 개의 전제를 연결시켜 하나의 명제를 만들어놓은 인식의 형태이다. 곧 내부구조를 갖춘 시스템인식이다.
인식들에서 어떠한 주장이든, 견해든, 의사이든 그 내부에 시스템구조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상일 수 없다. 사상이기 위해선 그 내부에 적어도 두 개의 (=)를 포함시켜야 한다. 즉 자기복제의 과정이 담겨있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개의 (=)를 담지 않으면 단순히 서술 내지 묘사가 된다. 서술이나 묘사는 진위의 판단을 할수없고 따라서 문학, 예술의 영역이 될 수 있으나 과학 철학의 영역은 되지 않는다.
과학이란 곧 그 자기복제 과정의 추적이며 과정이 추적될 수 있기 위해서 자기복제 과정이 노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리 : 세계는 곧 자기복제의 현재진행이며 사상은 그 모사이다]
세계존재는 그 자기복제 과정의 현재적 진행이며 학문은 그 자기복제의 추적이며 사상은 그 자기복제를 모사한 인식형태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은 어떻게 최초의 하나로부터 이 모든 방대함이 복제될수 있었느냐의 인식이자 또는 앞으로 어떻게 복제되어 갈 것이냐의 판단이다.
사상의 유도는 근거로부터 동기가 복제되고, 동기로부터 목적이 복제되고, 목적으로부터 방법이 복제 되고, 방법으로부터 결실이 복제되어 왔다는 자기복제과정의 노출이다. 삼단논법은 드러난 진술로부터 자기복제과정을 검증하여 내는 것이다.
사상은 그 내부에 자기복제 과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 삼단논법으로 자기복제를 검증할수 있는 시스템구조를 담보해야 한다. 곧 이념과 주의이다. 사상이 상부조로서의 이념과 하부구조로서의 주의를 내포하는 것은 자기복제 되었기 때문이다. 이념이 복제하여 주의를 낳는 것이다.
자기복제와 삼단논법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동일한 시간대와 동일한 공간대를 동시에 점유하는 두 개의 점은 없다.
무언가 똑같다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대의 둘이 서로 같은 공간적 위치를 점하고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서로 다른 공간적 위치의 둘이 서로 동일한 시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다름들은 전체적으로 같고 부분적으로 다르다. 같은 것만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시,공간적 위치를 점유하는두개의 점은 없으므로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삼단논법에서 ( A = B )의 [ = ]들은 같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존재란 기본적으로 똑같은 것이 절대로 없으므로 모든 같다는 것은 일부분이 같다는 것이며 그것은 존재를 이끌어낸 대응요소의 두 변수 중 하나가 같다는 것이다.
즉 모든 같음들은 아버지가 같은데 어머니가 다르거나 어머니가 같은데 아버진만 다른 것이다. 서로 다르게 생긴 이복형제들간의 일면만의 같음들이다. 완전히 같은 것은 결닫코 세상에 없다. 삼단논법에서의 [ = ]도 예외가 아니다.
삼단논법 ....논거 ( A=B, B=C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근거.
진술 ( A=C ) ..판단대상
위에서 사실이지 ( A=B )의 경우는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사실은 ( AA=AB, AB=AC ), ( AA=AC )인 것이다. 같다는 것은 위에서 공통분모가 되는 A가 같다는 것이다. 공간변수와 시가변수 중 하나가 같은 것이다.
자기복제는 공간과 시간의 만남이다. 공간이 같으면 시간이 다른 것이다.
★(공간변수) ≪-- ♤(시간변수)
복제 1... ★♤ ★♤
≪-- ♧(시간변수 제 2)
복제 2... ★♤♧ ★♤♧ ★♤♧ ★♤♧
≪-- ◎(시간변수 제 3)
복제 3.... ★♤♧◎ ★♤♧◎ ★♤♧◎ ★♤♧◎
★♤♧◎ ★♤♧◎ ★♤♧◎ ★♤♧◎
≪--◇(시간변수 제 4)
복제 4.... ★♤♧◎◇ ★♤♧◎◇ ★♤♧◎◇ ★♤♧◎◇
˚˚˚˚˚˚˚˚˚˚˚˚˚˚˚˚˚˚˚˚˚˚˚
★♤♧◎◇ ★♤♧◎◇ ★♤♧◎◇ ★♤♧◎◇
≪--○(시간변수 제 5)
복제 5.... ★♤♧◎◇○ ★♤♧◎◇○ ★♤♧◎◇○ ★♤♧◎◇○
˚˚˚˚˚˚˚˚˚˚˚˚˚˚˚˚˚˚˚˚˚˚˚
★♤♧◎◇○ ★♤♧◎◇○ ★♤♧◎◇○ ★♤♧◎◇○
위 그림에서 개체들은 자기복제가 거듭될수록 서로 달라지지만 최초의 원형은 그대로 보존된다. 삼단논법은 같다와 다르다의 진위판단을 통해 복제가 거듭되어도 보존되는 원형을 추적해낸다.
삼단논법이 추적하는 같음들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같은 집적도에서 양적인 차이이고 하나는 다른 집적도에서 질적인 차이이다.
[삼단논법의 자기복제 추적]
1. 양적인 차이
--≫ 같은 집적도에서 순서가 다르다.
※ 예 -- (복제 5... A[★♤♧◎◇○] B[★♤♧◎◇○]˚˚˚)
그림에서 A와 B는 질이 같고 양이 다르다. 즉 방향이 같고 순서가 다른 것 이다. 삼단논법은 여기서 순서를 배제하고 방향의 같음을 추적한다.
※...[한개의 사과 (A)와 두 개의 사과 (B), 그리고 양자를 통일한 사과(C) ]
--≫ A는 C다. B는 C다. 고로 A는 B다.
<풀이> ..공간변수가 동일하고 시간변수가 다를 때이다. 동일한 사과나무에 열린 사 과이지만 8월에 수확한 사과와 9월에 수확한 사과는 크기다 다르다. 그러나 둘은 같은 사과이다.
2. 질적인 차이
--≫다른 집적도에서 순서가 같다.
※ 예 -- (복제 2... A[★♤♧] 복제 3...B[★♤♧◎]˚˚˚)
그림에서 A와 B는 양이 같고 질이 다르다. 즉 방향이 다르고 순서는 같다. 삼단 논법은 여기서 방향을 배제하고 순서의 같음을 추적한다.
※...[한상자의 사과(A)와 10개의 사과(B), 그리고 10㎏의 사과(C)]
--≫ A는 C다. B는 C다. 고로 A는 B다.
<풀이> ..시간변수가 동일하고 공간변수가 다를 때이다. 서로 다른 사과나무에서 수 확한 사과이지만 그 수량은 같다. 고로 둘은 같은 사과이다.
모든 변화는 공간변수와 시간변수의 상호대응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므로 동일한 공간적 위치와 동일한 시간적 위치를 동시에 점하는 두 개의 점은 없다. 즉 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은 절대로 없다. 우리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시간적 위치에 다른 공간적 위치이거나 같은 공간적 위체에 다른 시간적 위치임을 의미한다.
삼단논법은 이 두 변수 곧 방향(공간)과 순서(시간) 중 하나를 배제하고 나머지 하나를 추적하는 것이다.
[정리 : 같은 것은 다르고 다른 것은 같다]
1키로그램의 석유는 1다발의 화목과 열량이 같다. 3개의 사과는 두 개의 복숭아와 가격이 같다. 모양이 똑같은 두 개의 볼펜은 놓여있는 순서가 다르다. 같은 것은 반드시 다르다.
다른 것은 반드시 같다. 이러한 원리에 어긋나는 경우는 없다. 최초에 동일한 하나가 자기복제하여 이 우주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모든 것들에 같음을 발견하여 삼단논법으로 그 자기복제과정을 추적할수 있는 것이다.
사상의 전개
인식은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의 순서로 그 정보의 집적정도를 더해간다. 3단논법은 그 상부구조에서 기능하고 하부구조를 통일한다.
배경 --- 언제 어디서 5차정보 (근거) 이념 -- 중요성 복제 1 응용
실체 --- 누가 무엇을 4차정보 (동기) ↑ -- 필연성 복제 2 종합
연관 --- 왜 어떤 3차정보 (목적) -- 가능성 복제 3 분석
이행 --- 어떻게 하여지게 2차정보 (방법) ↓ -- 합리성 복제 4 수용
귀결 --- 하였나 되었나 1차정보 (결실) 주의 -- 현실성 복제 5 지각
귀결의 1차정보는 논리적 진위판단이 불가능하다. 단지 다른 정보에 의속되어 보조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다. 즉 불완전한 정보인 것이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가 기능하려면 접근경로가 설정되어야 한다. 1차정보는 경로지정이 안된 말초단계로서 독립된 정보로 기능하지 않는다.
논리적 판단은 3차정보로부터 가능하다. 이 단계에서 3단논법이 성립한다. 진위판단이 가능하다. 즉 인식의 집적과정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에서 분석가능한 것이다.
3차정보에서 3단논법을 통한 논리적 진위판단이 가능하지만 곧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진위판단을 해줄 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보는 충분히 집적되어야 한다. 4차정보의 종합에서 독립하고 5차정보에서 응용되어 완전히 기능된다.
[정리 : 사상은 주의에서 기능하지 못하고 5차정보인 이념에서 자기복제로 기능한다.]
사상의 전개는 1차정보나 2차정보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는 주의들에 5차정보인 이념의 집을 제공하므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기능한다는 것은 정보가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다. 곧 정보의 자기복제이다.
[정리 : 이념의 기능은 정보의 자기복제가 창의의 근거이다]
5차정보의 인식은 곧 응용이다. 응용된다는 것은 정보가 자기복제하여 또다른 정보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곧 인간에 있어 창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창의할수 있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창조할수 있다. 5차정보에서 자기복제의 기능 때문이다.
사상의 형식
소설가 장정일씨가 음란성이 있는 소설작품을 발표했다면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므로 진위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심하다. 심하지 않다]의 사적인 소감을 발표할수 있을 뿐이다.
마광수씨가 텔레비젼에 출연하거나 신문의 칼럼을 통해 발표한 글들은 문학의 범주가 아니다. 그는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그 신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문학이 아닌 과학, 내지 철학의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마광수는 대학교수의 학자적 신분을 강조하였다.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객관적 평가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판단할수 없다.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상의 형식은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수 있는 객관적 형식이며 거기엔 반드시 차별화된 두 개의 (=)를 필요로 한다. 문학, 예술의 범주가 아닌 과학, 철학의 담론이려면 반드시 사상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주관을 객관화시켜 타인으로 하여금 진위판단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기술하여 주장해야 한다.
사상의 형식은 [옳다, 그르다]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형식이다. 마광수의 주장은 사상이 아니다. 사적인 의견개진일 뿐이다. 그 내부에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적 주장들이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채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주장되고 있다. 정치는 혼자만의 놀이가 아니다. 사회공간에서 공유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주관적 소신의 고집이 아니라 객관적 검증가능한 원칙이다.
서구 선진국 정당들의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 혹은 우파 이데올로기의 복잡하고 짜임새있는 사상체계로부터 유도된 전술이므로 객관적인 비평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불쑥 던지는 정치적 화두들은 도무지 비평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하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문학과 철학의 경계점에서 모호한 화법으로 양자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주관을 마치 이념적 사상토대에 기초한 발언처럼 포장하므로서 다중들에게 잘못된 고정관념을 유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불쑥 던져지는 [화두]들은 비판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이 되는 것은 비판과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언어들은 이미지, 느낌, 연상, 뉘앙스, 유추의 무기로 함부로 편견을 유포하면서 결코 책임지지 아니한다.
이문열의 주장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들은 철학이 아니고 사상이 아니고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대가 빈곤하기 때문에 비판할수 없다. 이문열이 그른 것은 그의 주장이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그저 느낌들과 이미지들과 기분들을, 정치적인 양념으로 반죽하여, 문학의 방식으로 포장하여 불쑥 던져버린다. 즉 그 내부에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문열의 주장을 하나의 화두로 받아들여 논란하다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해버린다. 남는 것은 기분나쁨 뿐이다.
사상의 체계
사상은 생각 思, 생각할 想이다. 생각 하나는 논거(思)가 되고, 생각 둘은 진술(想)이 된다. 진술은 논거로부터 자기복제된 것이다. 사상은 논거와 진술의 형식을 갖춘 생각의 형태라는 점에서 망상, 느낌, 이미지, 연상, 유추, 감상, 이미지, 소감따위와 구분된다.
사상은 적어도 기능과 체계를 가진 생각들의 집합형태이며 적절하게 상대를 찾아 그 기능을 발휘하는 시간적 과정이다.
사상의 기능은 최초 근거로부터 유도하여 동기에 의해 유발되고 목적에서 주어지며 방버에서 마련되고 결실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실현과정이다.
<사상의 기능>
1. 근거 - 유도되는가?
2. 동기 - 유발되는가?
3. 목적 - 찾아지는가?
4. 방법 - 마련되는가?
5. 결실 - 얻어지는가?
사상의 기능은 예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에서 유도되고 유발되고 찾아지고 마련되고 얻어져서 실익을 제공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기능적 실익이 없다면 그건 사상이 아니다.
이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사상의 검증은 이 시스템의 진위에 대한 판단이며 그 판단은 이 사상체계의 전개가 자기복제에 으한 연속성의 획득에 기인하느냐의 여부이다.
먼저 근거가 주어지고 그 근거가 자기복제하여 동기를 낳고, 동기가 자기복제하여 목적을, 목적이 밥법을, 방법이 결실을 낳는 순서대로 자기복제가 진행된다.
우리가 사상으로 하여 얻는 것은 결실에서의 실익이다. 그 실익이 궁극적은 차원에서 어디에서 얻어오는가? 근거에서 얻어온다. 근거로부터 배달하는 수단이 자기복제이다.
사상은 무언가 명백히 얻어오는 것이다. 얻어온다면 이쪽에서 생기는 것 만큼 어딘가에 손실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최초에 근거가 되는 손실은 동력원에서이다. 동력원에서 손실이 일어나는 것만큼 결실에서 실익이 얻어진다. 곧 동력발생이다. 자동차는 그 동력전달의 매개가 된다. 곧 자기복제의 시스템이다.
사상체계 자동차의 동역전달체계
근거 (손실) 동력원
동기 동력발생
목적 동력제어
방법 동력전달
결실 (실익) 동력효과
생각이 사상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근거를 제시하고 실익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실익이 증명되지 않고 근거가 불투명한 편견, 고정관념, 소신, 망상, 허구들과 충분히 구분된다. 실익을 남긴다는 것은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결집하여 명백히 유효한 기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사상의 형성
노자가 무위자연을 주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실익이 주어진단 말인가?] 실효성이 없으면 사상이 아니다.
갈릴레이가 말했다. [지구는 돈다] 그래서 어떠한 이익이 있다는 말인가? 이는 학문적 인식일 뿐 사상은 아니다.
사상은 실익을 제시한다. 그 이익이 어디서 훔쳐온 것이 아니고, 허위가 아니며,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그 명석한 근거를 제시할 때 우리는 사상이라 부른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상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인생에 주어진 시간마큼 살아가면서 그 생에 그만큼 채워넣어야 한다. 어디에선가 얻어와서 얻어온 만큼 채워넣는다. 그 얻어올 데가 있어야 한다. 근거이다.
사상은 그 얻어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사상의 예..기독교 사상
체계 기독교사상 학문
1. 근거는 ? 창조론 존재론
2. 동기는 ? 원죄설 인식론
3. 목적은 ? 구원 정신론
4. 방법론 ? 믿음소망사랑 방법론
5. 결실은 ? 천국행 문명론
기독교사상은 명백히 천국행의 실익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실제적인 이익은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에 기초하고 있다. 원죄설과 구원론과 믿음은 중간단계로서 그 창조로부터 얻어와서 천국으로 배달하는 체계로 되어 있다. 이 사상이 옳은지의 여부는 학문이 증명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어떠한 주장이나 견해는 반드시 이러한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 있어야 한다.
정치가는 정치사상을 가져야 하고 교육가는 교육사상을 가져야 한다. 문학가는 문학사상을 가져야 하고 사업가는 경영사상을 가져야 한다.
정치가의 사상은 정치의 궁극적 근거를 어디에서 얻어오고 어떠한 결실을 제공하며 그 중간단계에서 자기복제로의 배달경로는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