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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인을 곤혹스럽게 하는 사람이 노무현이다. 뭔가 있는 것 같아서 속을 들여다봤더니 말짱 황이다. 있는 거라곤 오기와 배짱 뿐. 그래서 등을 돌렸더니 촛불이 타오른다. 실제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역시 뭔가 있어. 근데 뭐지?’ 실패다. 노무현 얼굴을 쳐다보므로 실패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한국인의 얼굴을 봤어야 했다. 노무현이 임기 5년간 무엇을 했는지를 보지 말고, 왜 한국인 다수가 노무현에게만 특별히 반응하는지를 봐야 한다. 이러한 본질을 이해못하는 한 새누리당과 조중동, 한겨레오마이경향 개들은 계속 깨지게 되어 있다. 노무현의 진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대중의 신분상승이다. ‘사농공상 신분제 폐지된지가 언젠대?’ <-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바로 먹물이다. 그들은 엘리트 신분을 가졌으므로 한국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신분문제가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백인이 차별받는 흑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형식적인 차별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해도 말이다. 진짜는 따로 있다. 차별? 차별이 문제가 아니다. 바보야! 문제는 신뢰다. 신뢰의 문제가 있는 한 차별하지 않아도 차별받는다. 본질은 믿음이다. 엘리트는 서로 믿는다. 하층민은 서로 못 믿는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친구간의 우정이라거나 이런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의사결정을 못하는 문제를 말하는 거다. 하층민끼리 동업하면 다 깨진다. 왜? 엘리트는 딱 봐도 서로간에 우열이 판단된다. 같은 엘리트라 해도 수학 잘 하는 넘과 영어 잘 하는 넘이 구분된다. 역할분담이 된다. 하층민은 그게 안 된다. 엘리트는 대졸이므로 믿을만한 동창생이 있다. 어려울 때 의논할 사람이 있다. 하층민은 그게 없다. 두려움이 있다. 이게 진짜 신분이다. 어려울 때 주변에 의논할 지식인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는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주변에 믿을만한 친구가 없으면 작당해서 믿을만한 그룹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경우 더욱 수렁으로 빠진다. 오승환, 임창용, 안지만, 윤성환이 패거리 지어 도박하러 간 것이 그렇다. 학교다닐 때 공부 안 한 티가 이렇게 난다. 불안해서 그런 거다. 하층민은 너는 선배, 너는 후배 하고 미리 계급을 갈라놓는게 차라리 낫다. 평등보다 차별이 더 편하다. 차별하면 잘은 안 되어도 어떻게든 조금은 의사결정이 되는데 평등하면 아예 출발을 못한다. 대장을 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장을 정해놓고도 따르지 않는다. 이게 되는 사회로 넘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부족민 사회는 평등하지만 평등하므로 오히려 의사결정을 못한다. 신뢰없는 평등보다는 신뢰있는 차별이 더 나을 때가 많다. 그래서 민중이 왕당파에 속하는 거다. 농노해방만으로 안 되고 국민교육까지 시켜줘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요즘도 교포들끼리 서로 사기를 쳐서 종종 뉴스가 되는데 과거에도 그랬다. 일제 강점기에도 같은 조선인끼리 서로 사기를 쳐서 말이 많았고 안창호 선생이 열심히 계몽하고 다녔다. 외국에 나가면 불안해진다. 불안해지므로 그룹을 만든다. 이미 잘못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민을 가도 현지에 잘 녹아드는데 말이다. 요즘은 탈북자들이 그렇다. 탈북자 대상 사기사건이 계속 이어진다. 탈북자는 왜 잘 속을까? 불안하면 누군가에 의지하려 하고 이미 사기당할 기반은 마련된 것이다. 그렇다. 엘리트는 하층민에게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탈북자와 비탈북자가 느끼는 안정감이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 그 안정감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엘리트는 모른다. 동창생끼리 벤처를 창업했는데 한 명은 사장을 맡고, 한 명은 이사가 되고, 한 명은 팀장이 되어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까? 이게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 잡스와 워즈니악만 해도 불만을 해결하지 못한 판에 말이다. 당연히 워즈니악이 사장이고 잡스는 심부름을 하는게 맞지 않을까? 워즈니악이 워낙 엘리트라서 그게 된 거다. 잡스는 내면에 불안감이 있었다. 우리는 범죄자들의 마음 속에 악이 들어차 있어서 그들이 나쁜 짓을 한다고 여긴다. 천만에. 인류문명의 중심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는 엘리트의 자부심이 없으면 반드시 비겁해진다. 버려진 소년은 오줌을 싸는 자해행위로 보모의 눈길을 끌려고 한다. 무의식이다. 매를 맞아도 관심받는게 낫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엘리트에게 없고 민중들에게 있는 것은? 배신의 두려움이다. 원래 인간은 백퍼센트 배신한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결속력은 특이한 경우다. 중국사 한 페이지만 읽어도 배신 이야기가 열 건은 나온다. 어느 나라든 후진국은 사람을 못 믿어서 독재를 하는 것이다. ‘믿으면 되잖아.’ <- 이런 소리 하는 초딩들 많다. 차베스가 악당이라서 독재하는게 아니다. 원래 후진국은 구조적으로 독재를 하게 되어 있다. 서로 못 믿기 때문이다. 믿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그 벽을 동교동도 뚫지 못했고 상도동도 뚫지 못했는데 친노가 해냈다. 토대의 공유가 없는 상태에서, 곧 상부구조가 없으면 인간은 반드시 상대를 자극하여 그 반응을 보고 대칭적 포지셔닝으로 의사결정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배신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남녀간에도 일단 한 번 틀어서 믿음을 확인하고 넘어가는게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도 나온다. 포샤가 바사니오를 시험하기 위해 반지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짓 하면 당연히 깨진다. 엘리트는 그 토대의 공유가 있다. 친노에게는 그 토대의 공유가 있다. 조선왕조의 선비들은 공론을 통해 그것을 만들었다. 과거에 합격한 자들만의 연대감에서 나오는 안정감이 있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 탈북자에게는 어렵습니다. 부족민에게도 어렵습니다. 하층민에게도 어렵습니다. 제 3 세계 여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중에 잡스와 같은 능력자가 있어도 워즈니악 같은 대인배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초적으로 불안하고, 불안하므로 신뢰를 원하고, 신뢰를 원하므로 서로 시험하고, 시험하다가 깨집니다. 친노에게는 그 신뢰가 있고 동교동이나 상도동에는 그 신뢰가 없습니다. 신뢰의 기반이 되는 토대의 공유는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본능의 판단입니다. 체험의 공유로만 가능합니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기득권에 맞서는 해커짓을 함께 하면서 무의식 차원에서 동지라는 신뢰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도 깨졌습니다. 아스팔트에서 함께 돌을 던지며 형성된 민주화 투쟁의 호연지기와 자부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신뢰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집단에 들었을 때 신분상승을 느낍니다. 그래서 노무현입니다. 친노에 들어서 동지가 됨으로써 신분상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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