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언어다 언어는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자연을 관찰하여 정보를 획득하고 뇌에 저장한다. 외부의 정보를 내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정보를 표현하고 전달한다. 내부의 정보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 둘은 모순된다. 입력과 출력으로 방향이 반대다. 당연히 헷갈린다. 인간의 언어는 원래 불완전하다. 이 문제를 해결한 언어는 없다. 언어는 불편을 감수하면서 그럭저럭 써야 하는 세련되지 못한 도구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한국어는 형용사가 특히 발달해 있다. 형용사는 동사의 변종이니 한국어는 동사가 발달한 것이다. 우리말은 동사가 맨 뒤에 온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게 망하는 거다. 사람의 주의가 마지막 부분에 쏠리기 때문이다. 뒷부분 동사에 주의하며 앞부분을 건성으로 듣다가 뒤통수 맞는다. 영어가 안 되는 이유도 앞부분을 건성으로 듣는 버릇 때문이다. 반면 한국어의 장점도 있다. 깨달으려면 주어에 주목해야 한다. 외부의 정보를 인식할 때는 주어가 뒤에 있는게 좋지만, 구조를 복제하여 전달할 때는 주어가 앞에 있어야 한다. 정보를 입력할 때는 주어가 뒤에 있는게 좋고, 외부로 출력할 때는 주어가 앞에 있는게 정보전달에 좋다. 초딩이 일기를 써도 첫머리에 ‘나는 오늘...’을 써놓고 무엇을 쓸지를 생각한다. 주어를 미리 정해버리는 것이다. 망했다. 사유의 울타리를 한정해 버린다. 이게 타파해야할 ‘숨은 전제’다. 무의식적으로 기본을 깔아놓고 시작하는 거다. 17점 깔아놓고 두는 한국의 옛날 순장바둑과 같다. 이 상태에서는 창의가 안 된다. 전략은 생략하고 전술로 바로 들어간다. 이미 범위가 좁혀져 있다. 그 생각의 틀을 깨야 한다. 바둑은 포석이 중요하고 언어는 주어가 중요하다. 게다가 우리말은 주어를 함부로 생략한다. 이명박의 BBK처럼 주어도 없이 말하는 자가 있으니 고약하다. 영어라고 좋은 언어는 아니다. 구글이 알파고로 어깨에 힘을 주지만 아직 인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object’로부터 코딩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벌써 망했다. 객체는 목적어다. 영어는 목적어가 맨 뒤에 온다. 어떤 영어 쓰는 넘이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으니 처음부터 잘못됐다. 그 수준으로는 인간을 능가할 수 없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은 계산능력이지 창의력은 아니다. 한국어가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 대량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아이디어 하나 떠올리는 것은 창의가 아니다. 조영남처럼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창의가 아니다. 가짜다. 진짜는 시스템을 돌린다. 창의는 공장에서 찍어낸다. 창의가 안 되는 것은 공장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천장을 뚫는건 깨달음이지만 창의는 그것을 밑천으로 포드시스템을 돌리는 것이다. 창의하려면 ‘주어 바꾸기’를 훈련해야 한다. 초딩 일기는 언제나 ‘내’가 주어다. 틀렸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본 이웃집 할머니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사건의 주체만 바꿔도 한 달치 일기를 하루에 몰아쓸 수 있다. 방학일기는 잊어버리고 놀아도 된다. 주어가 정해져 있다는 착각을 깨자. 주어는 이제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주어는 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의사결정단위다. 내가 의사결정할 수 있는가? 없다. 내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어 멋대로 의사결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창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간적으로도 내가 커져야 하고 시간적으로도 내가 커져야 한다. 의사결정 주체는 인류문명 자체다. 내가 결정하지만 인류문명의 결정을 내가 대리하는 거다. 사건의 주체를 팀으로 높이고, 인류로 높이고, 자연으로 높이고, 문명으로 높이고, 신으로 높이면 깨달음에 이른다. 자연의 언어는 ‘주어+목적어+동사’다. 한국어가 자연과 일치하는 언어다. 북방 유목민의 언어로 봐야 한다. 유목민이 몰이로 사냥할 때는 동작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동사가 중요하다. 정확하게 동작을 지시할 수 있는 언어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목적어를 바꿀줄 모르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유를 못한다. 그래서 미신에 잘 빠진다. 더욱 주어에 소홀하므로 스케일이 큰 사유를 못한다. 그러나 자연과 순서가 맞기 때문에 한 번 답을 알면 실행에 능하다. ‘object’를 중심으로 사유하는 영어로는 알파고가 한계다. 그 이상 가는건 한국인이 해내야 한다. 객체지향형 사유에서 주체지향형 사유로 바꿔야 한다. 영어 쓰는 사람은 절대 못한다. 애초에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청남대 모임에서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가능성을 봤다고 할까요. 더 이야기하면 기밀누설이 되겠습니다. 문명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이며 사유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가 정합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에 맞춰져 있으며 그것은 듣는 사람 기준에 맞추어 하향평준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갓난 아기도 알아들을 수 있는게 인간의 언어입니다. 돼지나 개는 동사의 변화를 알아듣고, 인간은 무려 목적어의 변화까지 알아들을 수 있으며, 주어의 변화를 알아듣는 깨달음의 수준까지는 진도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20세기 문명의 한계는 영어의 한계가 정했습니다. 인류의 한계가 분명한 만큼 특별히 좋은 언어를 가진 한국인이 뭔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
자연의 언어는 '주어+목적어+동사' 라는게 질-입자-힘-운동-량 순서 대로 나열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