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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918 vote 0 2016.05.10 (21:39:58)


    원초적 질문을 던져보자. ‘왜 사는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설사 안다 해도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의 문제다. 인류문명의 한계라 하겠다. 인간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한 거다. 그 언어를 발달시켜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안 물어본 자기소개’ 하는 사람이 있다면 피곤한 거다. 개인생각을 들이대지 말고 ‘인류의 언어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려야 한다. 인류는 더 나은 언어를 가져야 한다. 철학은 ‘어떤 사람의 어떤 생각’이 아니라 일련의 개념들로 조직된 사유체계 전반이다.


    예수가 사랑을 말했다는둥, 석가는 자비를 말했다는둥 하는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초딩이다. ‘단어 주워섬기기’는 크로마뇽인도 한다. ‘완전성의 문제’다. 거기에 연동되어 모두 결정된다. ‘무엇이 완전한가’에 대한 관점의 제시가 중요하다. 곧 이상주의다. 예수라면 ‘신’이 완전하다.


    석가라면 ‘해탈’이 완전하다. 공자라면 ‘군자’가 완전하다. 노자라면 ‘불로장수’다. 그리스 신화라면 헥토르가 보다 ‘이상적인 영웅상’에 근접해 있고, 아킬레스는 인간적 감정에 휘둘리는 불완전체라 하겠다. 중세의 ‘기사도’나 청교도의 금욕주의에도 그런게 있다. 완전체가 있다.


    무릇 철학을 논할 때는 근본이 되는 이상주의를 건드려야 한다. 논어나 도덕경의 자구해석에나 매달리는 자는 썩은 자이니 패죽여야 한다. 그게 이상적이지 않다. 추하다. 이상주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출발점에서의 아폴론적 이상이고, 하나는 귀결점에서의 아프로디테적 이상이다.


    전자가 ‘왜 사는가’라면 후자는 ‘어떻게 살것인가’다. 나침반에 N극과 S극이 있듯이 아폴론적 고결한 이상과, 아프로디테적 탐미적 이상이 있다. 공자라면 전자는 인仁, 후자는 예禮다. 순서가 있다. 인간은 아폴론적 천天의 완전체로 시작해서 아프로디테적 민民의 완전체로 끝난다.


    천天이 천명天命을 받드는 것이라면, 민民은 민의民意를 따르는 것이다. 맹자는 천명을 받드는 전자에 주목했고, 순자는 민의를 따르는 후자에 주목했다. 플라톤이 천명을 받들어 하늘을 가리킬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의를 따라 땅을 가리킨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림 말이다.


    이상이 멀리 하늘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은 지금 지상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보수와 진보가 갈린다. 둘을 대립적으로 보고 그 중에서 하나를 포기하려는 것이 보수의 이원론이다. 둘을 통합적으로 보고 둘 중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보의 일원론이다.


    사건으로 보면 가능하다.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과정 안에서 보면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철학과 미학, ‘왜 사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완전성에 대한 개념을 잡아야 한다. 사건으로 보고, 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금이 녹쓸지 않고 다이아몬드가 깨지지 않듯이 변하지 않는 것에서 완전성을 찾기 쉽다. 그러나 금이 왕수에 녹고 다이아몬드가 불에 타듯이 견고한 것이 더 위태롭다. 세상은 동적 존재다. 부단히 움직여 호흡하고 상호작용하는 존재다. 움직임을 멈추면 죽는다. 곧 불완전해진다.


    완전성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와 보수, 이상과 현실, 합리와 실용, 절대와 상대, 낭만과 고전, 일원론과 이원론의 대립을 타개하여 진도 나갈 수 있다. 대립하여 교착된 둘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일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완전하다.


    우주 안에 고착된 채로 홀로 완전한 것은 없으며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 부단히 호흡함으로써 겨우 존재하게 된다. 가수는 노래하지 않을 때 죽고, 댄서는 춤추지 못할 때 죽고, 작가는 글쓰지 않을 때 죽고, 문명은 진보하지 않을 때 죽고, 우주는 팽창을 멈출 때 죽게 된다.


    시간은 흐르지 않을 때 죽는다. 인간은 소통하지 않을 때 죽는다. 존재는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 죽는다. 완전성이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기는 엄마가 곁에 있으면 완전하다. 고양이는 봄볕을 쬘때 완전하다. 새싹은 봄비를 맞을 때 완전하다. 어미는 새끼를 낳을 때 완전하다.


    작가는 쓸 때 완전하고, 가수는 노래할 때 완전하고, 댄서는 춤출 때 완전하다. 단 움직여야 한다. 상호작용해야 한다. 집단은 의사결정해야 한다. 배는 항해해야 한다. 자동차는 질주해야 한다. 완전성에 대한 바른 개념을 얻으면 모든 논쟁은 저절로 해소된다. 운동과정에서 용해된다.


    바른 관점에서 바른 언어가 얻어진다. 공자를 읽든 노자를 읽든 문장이나 자구나 표현에 얽매이지 말고, 공자의 관점, 노자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공자는 완전성이라는 달을 가리켰다. 그 달을 얻을 때 하늘의 완전성을 찾은 맹자와 땅의 완전성을 찾은 순자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세상을 대립으로 이해한다면 언어가 잘못된 것이다. 다른 말로는 깨달음이다. 언어는 주어+목적어+동사다. 일원론은 주어의 절대성을 보고, 이원론은 목적어의 상대성을 본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 목적이 바뀌면 승자가 패자로 바뀐다. 주어는 바꿀 수 없다.


    ‘목적 바꿔치기’를 구사하여 선을 악으로 바꿀 수 있지만, 예수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너의 말이다.’ 모든 속임수는 이 방법을 쓴다. 존재는 사건이며, 인간이 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사건이 종결된 후의 동사를 보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동사+목적어+주어 순으로 일어난다.


    동사는 먹다. 목적어는 밥, 주어가 사람이면 우리는 ‘사람이 밥을 먹었다’고 여기지만 밥이 사람을 먹었을 수 있다.곧 역설이다. 한 번 역설은 목적을 바꾸는 손자병법의 전술이고, 두 번 역설은 주어를 바꾸는 오자병법의 전략이다. 손자병법의 ‘목적 바꿔치기’가 임기응변하는 잔꾀다.


    이 수법으로 성범죄자도 ‘사실은 내가 유혹당한 거다.’ 하고 우겨서 빠져나갈 수 있다. 이런 꼼수는 단기전의 임시변통일 뿐 같은 수법을 두 번 써먹을 수는 없다. 장기전이 안 된다. 전술이 아니라 전략을 쓰는 오자병법이라야 한다. 주어를 바꿔야 한다. 조리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다. 주어를 바꾼다 함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부분이 아닌 전체로, 선수가 아닌 팀으로, 소승이 아닌 대승으로, 내가 아닌 우리로,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밥을 조리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밥을 발명한 거다.


    ◎ 정설은 항우병법 - 직접대상인 동사를 바꾼다. 대상의 제거.
    ◎ 한 번 역설은 손자병법 - 배후에 숨은 목적어를 바꾼다. 대상의 변경.
    ◎ 이중의 역설은 오자병법 - 주어를 바꾼다. 주체의 발전.


    힘으로 제압해 문제를 해결하는게 정설이면, 만만한 상대로 타겟을 변경하는게 손자병법의 역설이다. 반대로 자기편을 늘려서 세를 불리면 자연히 적이 없어지는 것이 오자병법이다. 이때 자신은 변하지 않았는데 변해 있다. 목적어는 바뀐다. 주어는 바뀌지 않지만 달라져 있다.


    그것이 우리가 얻어야 할 완전성이다. 완전성을 목적어의 변경에서 찾으므로 답을 찾지 못한다. 인간은 돈을 찾고, 황금을 찾고, 미인을 찾고, 명성을 쫓는다. 이것은 목적이다. 그 어떤 목적도 완전하지 않다. 왜 사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돈도 황금도 보석도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완전한 것은 자연이요, 진리요, 역사요, 문명이요, 진보다. 왜 완전한가? 그것이 주어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나의 연장이다. 진리는 나의 연장이다. 역사와 문명과 진보도 마찬가지다. 신과 나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완전하다. 주어는 완전하다.


    왜 사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것은 주어를 찾는 것이다. 완전성을 찾는 것이며, 신을 찾는 것이며, 천명을 받는 것이다. 삶의 동기부여를 얻는 것이다. 미인이나 보석이나 황금이나 명성을 찾는다면 틀렸다. 그것은 목적어이며 목적어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자기 바깥에 없다.


    답은 주어다. 주어는 나다. 답은 내 안에 있다. 나를 널리 확장하여 마침내 진리에 이르고 신에 이르는 것이 진짜다. 타자성의 문제다. 타자성을 주체성으로 바꿀 때 완전해진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완전해지려는 것이다. 나와 타자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 인간은 완전해진다.


    어떻게 살것인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를 줄세우는 것이다. 맹자의 천에서 순자의 민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학에서 미학으로 진보해야 한다. 헥토르의 이상에 아킬레스의 감성을 더해야 한다. 아폴론의 이념미에 아프로디테의 탐미주의를 더해야 한다.


    고전주의에 머물지 말고 낭만주의로 진도나가야 한다. 혼자 잘난척 하는 인仁으로 고립되지 말고 예禮로 사귀어야 한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퇴계가 틀렸고 둘을 통합시킨 율곡이 옳다. 임금이 대표로 받는다는 천명에 안주하는 남인이 틀렸고 민의로 나아간 노론이 옳다.


    왜 사는가? 완전성을 찾으니 인仁이다. 타자와 공존할 때 인간은 완전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완전성을 담아내는 그릇인 나를 키운다. 예禮다. 더불어 함께 나아갈 때 아름답다. 완전한 것을 던져두면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아름답게 빛난다. 내면의 완전성이 인, 밖으로 빛나면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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