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 김용옥이 차이나 어쩌구 하는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율곡을 찍은 모양이다. 한다리 건너 들었는데 필자의 입장도 같다. 율곡은 5천원이고 퇴계는 1천원이다. 퇴계는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 퇴계는 안동 촌넘이다. 변방의 안철수다. 이들은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왕의 혈통을 인정한다. 이거 묘하다. 일본과 비슷하다. 덴노는 혈통이 인정되지만 대신 집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영국도 마찬가지. 섬나라들이다. 호남과 영남 촌동네는 지리적인 고립 측면에서 섬과 같다. 학문도 진리따라 가는게 아니라 포지션 따라 간다. 이게 맥락이다. 큰 틀을 살펴야 한다. 입으로 떠드는건 가짜고 서 있는 위치가 진짜다. 입을 보지 말고 발을 보라. 진실을 알 수 있다. 변방의 아웃사이더들은 말로는 왕권강화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왕의 통치권을 약화시킨다. 이들은 왕을 하늘의 뜻을 전하는 대리자로 본다. 왕의 직업은 제사다. 제사는 일가친척을 한 자리에 모은다. 집회와 같다. 박근혜가 괜히 빨간 옷을 입고 국민의 시선을 끄는 행동이 일종의 제사다. 왕은 제사만 잘 지내주면 되고, 정치는 지들이 알아서 한다며 왕의 개입을 막는다. 이들의 이상국가는 일본이다. 박근혜도 제사만 지내고 정치는 방치다. 정치? ‘정치는 국회가 해야지. 국회 심판하자.’ 박근혜 국회심판론이다. 자기가 해야하는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게 일본놈 + 남인들 정서다. '전쟁? 그거 내가 한 거 아닌데. 도조 내각이 했잖아. 왜 나한테 따지고 그래?' <- 일본의 전범 히로히또 생각. '왜 나만 갖고 그래? 29만원 밖에 없다니깐.' <- 전두환 생각. 사고방식이 아주 똑같은 놈들이다. 예송논쟁은 왕이 사대부 일원인가 아니면 특별한 존재인가다. 이 논리는 평민과 노비 사이에도 대입된다. 노론은 노예제와 성차별, 서얼차별 등 일체의 차별을 폐지하자는 입장이고 남인은 반대다. 차별주의다. 뿌리는 정도전이다. 고려시대 기준으로 보면 이성계는 역적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높이는 대신 왕의 지위를 신에서 인간으로 깎았다. 왕은 신이 아니므로 인간 이성계도 왕해먹을 자격 있다는 논리다. 계승자는 화담 서경덕인데 이 양반은 주장이 과격해서 남녀평등까지 가버렸으므로 황진이가 서화담을 극찬한 것이다. 진도를 너무 나가 위험해졌으므로 맥이 끊겼다. 이를 온건하게 되살린 사람이 율곡 이이다. ◎ 정도전≫서경덕≫이율곡≫송시열≫최한기 이 사상의 계보는 중국에 없다. 중국 성리학은 중화와 만이를 차별하는 논리다. 중국은 왕≫경≫대부≫사≫민의 계급제도로 창업했는데 세계사 유일의 민란이 성공해버린 한나라 이후 계급제도 근간이 무너졌다. 도교가 성행하며 만민평등으로 가버렸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활개를 치는 시스템이 되어 혼란해졌다. 그러므로 오랑캐와 싸우면 백전백패다. 주희가 꾀를 내니 중화와 만이로 차별하는 시스템을 고안한 것이다. 이기이원론은 약해빠진 송나라 특수성에 근거한 거다.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논리다. 중앙에 맞서는 지방의 논리로 복제된다. 그런데 이게 은근 일본과 맞다. 일본은 조선과 달리 지방자치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주나라 봉건제도가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덴노≫막부≫다이묘≫사무라이≫농민의 계급사회다. 지금도 대놓고 재일교포 차별하고 부라꾸민을 차별한다. 그런데 야꾸자는 그 차별논리의 역혜택을 입는다. 차별하는 대신 안 건드리는 그런거 있다. 원래 부라꾸민은 정부도 못건드린다. 재일교포도 차별받는 대신 빠찡꼬 시장을 휘어잡는다. 교묘한 반대급부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보수꼴통의 본질이다. 남인은 왕과 신하의 차별, 남성과 여성의 차별, 평민과 노예의 차별, 중국과 조선의 차별 등 일체의 차별을 통해 국가를 유지하려고 했다. 뿌리는 퇴계 이황이다. 하는 짓이 지금 안철수 패거리의 주장과 판박이다. 안철수가 연립정부를 들고 나오는 것도, 박지원이 왕년에 문재인 대권, 박지원 당권으로 대권당권 분리설을 퍼뜨리는 것도 같다. 이들의 주장을 얼핏보면 굉장히 맞는 말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우리의 2030은? 이런 식으로 미리 칸을 나누어 역할을 분담하면 2030은 할 일이 없다. SNS와 팟캐스트는 할 일이 없다. 이들의 논리는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물결, 새로운 에너지 유입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꼴통의 논리인 것이다. 하긴 퇴계가 살던 안동 촌동네에 무슨 새로운 물결이 오겠냐고. 이들의 차별주의는 다시 중앙과 지방의 차별로 복제된다. 중앙과 지방이 따로 놀게 되면 지방의 호족들은 살판이 나는 것이다. 김한길 호족 만세다. 안철수, 천정배, 박지원, 박준영, 이종걸, 박영선 등 지방호족들이 유난히 띨빵하게 구는게 다 이유가 있다. 조선후기 모든 피바람 뒤에는 해남 촌놈 고산 윤선도가 있다. 이 양반의 맹활약에 노론이 싹 죽은 거다. 남인의 대논객이라 하겠다. 당쟁을 거의 전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상소를 올려서 그냥 ‘저 자를 죽여라.’ 이러는 자다. 지방의 호족들은 왕을 신격화 하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내정간섭을 받지 않는다. 윤선도는 조선의 3대 땅부자인데 해남군에서는 거의 왕이다. 첩도 여러명을 두고, 해남의 현령들은 윤선도가 죽은 후에도 문안인사를 가야만 했다. 그의 저택은 50만평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왕도 윤선도 밑이다. 지방에서 맘대로 개판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일본은 그렇게 한다. 봉건영주들은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막부 몰래 독도와 오키나와를 접수했다고 주장한다. 독도논쟁도 일본 특유의 남인논리 때문이다. 우리는 막부가 독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한 증거를 갖고 있지만, 일본은 막부는 막부고, 지방 번에서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고 우긴다. 그런 식으로 일본이 해먹은게 너무 많아서 독도에서 밀리면 곤란해진다. 율곡은 수도권 출신이다. 율곡은 항상 중국과 외국을 끼고 들어간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은 섬이 아닌 것이다. 퇴계는 서울과 지방이 일본처럼 권력분점하고 중국과 조선도 그렇게 권력을 분점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중국은 전형적인 봉건국가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막부와 다이묘의 관계가 아니다. 중국과 50 대 50으로 대등하게 맞서 조선이 강력한 의사결정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이기일원론이다. 임금과 신하는 같은 사대부 계급의 일원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이 논리가 위험하다. 구조론의 복제원리에 대입되어 이 논리가 무한복제된다면? 현대의 평등사회가 된다. 정도전이 이 논리 펴다가 주원장에게 밉보여 살해되었다. 주원장은 신하가 임금과 맞먹으려 하는 유교에 불만을 가지고 수만명의 선비를 때려죽였다. 그 여파로 조선에서 사화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역시 복제다. 임금과 신하가 평등하다? 이게 예송논쟁이다. 조선후기에 노비를 해방하고 각종차별을 철폐한 것이 모두 율곡의 논리를 사용한 것이다. 율곡이 조선을 디자인했다. 그런데 중국에 없는 논리다. 조선의 독자논리다. 이원론이고 일원론이고 복잡하게 따질거 없다. 간단하다. 서울사람들은 파리든 베를린이든 뉴욕이든 북경이든 다 일원론이다. 왜? 외부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끝없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불판 갈아준다. 지방은 다르다. 국경을 쌓고 담장 높이고 차별하되 대신 자율권을 준다. 주인이 노예를 발로 차며 ‘너는 당나귀를 발로 차면 되잖아.’ 이런다. 그런데 노예도 익숙해지면 이게 편하다. 차별받는 만큼 챙기는거 있다. 돈 계산은 노예가 전담하므로 존엄을 손해보고 대신 이익을 빼돌린다. 이게 배짱이 맞기 때문에 퇴계 이원론은 어디가도 인기있다. 단 서울에서는 먹히지 않는다. 차별을 하면 외부 에너지 유입이 막히기 때문이다. 당나라 서울 장안이라 치자. 운하로 곡물을 실어온다. 운하가 막히면? 서울시민은 다 죽는다. 임금 신하 차별없이 싹 죽는 거다. 이정기 장군이 운하를 막아버리자 장안은 식량이 없어서 깡그리 굶어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항상 변화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북극의 물개가 얼음장 밑에서 숨구멍을 지키듯이 거기에 목을 매야 하는 것이다. 이원론은 죽음으로 가는 직행열차다. 왜 남인 윤선도는 혼자서 조선을 망쳤을까? 말 안 해도 다 아는 거다. 변방의 호족이 50만평이나 되는 집을 가지고 있으면 딱 조선일보 사장 마음이 된다. 노론이 씹을 거 뻔히 안다. 선제공격 들어간다. 일리도 있다. 어찌보면 일본은 그것으로 더 발전했다. 그러나 세계사 기준으로 보면 다르다. 일본의 경제적 성공은 중국이 주나라 때 한 것의 복제다. 의사결정구조의 진보가 아니다. 역사는 의사결정시스템의 역사다. 조선은 평등한 선비 중심의 새로운 모색을 했다. 조선이 가난했지만 돈을 신앙으로 삼는 지금 기준이고, 당시로 보면 나름 살만큼 산 것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대접받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은 전 국민이 모두 왕이 장희빈과 어찌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 사회도 나름 의사결정 모델이다. 일본은 덴노에 막부에 다이묘로 분산되어 촌사람들은 그저 자기 마을 안의 일만 신경썼다. 야꾸자가 어쩌든, 부라꾸민이 어쩌든, 일반인은 그런 남의 내부일에 신경 안 쓴다. 한국사람의 중앙정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사실 조선시대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우리방식이 맞다. 일본의 방법이 먹힌 것은 섬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일본처럼 하려해도 봉건제도가 안 된다. 거대한 전쟁, 메뚜기떼의 습격, 대홍수, 대규모 유민의 발생 등으로 정기적 싹쓸이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조선은 중국 영향으로 일본처럼 안 된다. 일본도 구한말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해서 군사적으로 성공했다. 퇴계모델, 남인모델이 바보들에게는 은근 매력있지만 안 되는게 싸우면 패배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투에 이긴 적은 있어도 전쟁에 이긴 적은 없다. 변화의 시기에는 일원론으로 구조의 질을 세팅해야 이긴다.
21세기는 퇴계의 역할분담, 차별주의보다 율곡의 역할공유 통합주의가 먹힙니다. 구조의 질을 세팅하여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퇴계가 한 짓은 지금 안철수 짓과 같습니다. 푸틴이나 오바마나 클린턴이나 시진핑이나 과거 방식의 상징적인 군주가 아닙니다. 레이건처럼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와 외교하고, 내치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영삼처럼 대통령은 인기있는 개혁이나 하고 내치는 총리에게 맡겨놓고, 이렇게 여유부리다가 망합니다. 부시가 왜 망했겠어요? 전쟁하다 망한 겁니다. 대통령은 외교만 하면 된다는 논리죠. 멸망입니다. 현대사회가 그런 사회입니다. 대통령은 열 사람의 몫을 해야 합니다. 하루에 전화 백통씩 해야 대통령 자격이 있습니다. 강희제는 하루 5백 건의 문서를 처리했는데, 박근혜는 7시간 동안 행불사태. 제갈량은 일중독으로 죽었고, 후임자도 줄줄이 과로사. 한국 대통령은 과로사로 죽을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안철수처럼 간보기나 하고 있으면 망합니다. |
아주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사상사적, 시대사적 맥락을 잘 짚어주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