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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7033 vote 2 2016.04.25 (23:35:06)

     

    서구철학은 죽었다


    지식은 총칼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실존주의는 2차대전 패배에 따른 지식인의 자조에 불과하다. ‘탈근대’라는 것은 피폐해진 지식인의 슬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존엄을 잃고 비참을 얻었다.


    2차대전은 모두가 패한 전쟁이다.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3주 동안 700킬로를 전진할 때 미군은 노르망디에 발이 묶여서 두달 동안 옴쭉달싹 못했다. 노르망디 코앞의 파리도 구경하지 못했다.


    만주에서 소련군이 보름만에 일본군 70만을 포로로 잡을 때 미군은 한달동안 유황도의 2만 일본군 앞에 돈좌되었다. 맥아더는 원래 중국 남부에 상륙하여 한반도로 들어올 계획이었으나 포기한 것이다.


    결국 편법을 써서 원자탄으로 해결했다. 이후 월남전까지 미국은 전쟁의 정답을 내지 못했다. 소련은 독일에 깨졌고, 독일 역시 소련에 깨졌다. 프랑스는 그냥 도망쳤다. 영국은 팔짱기고 구경이나 했다.


    그 전쟁에 모두가 패배했고 승자는 없다. 거대한 비극 앞에 지식은 무기력했다. 그 기조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사실 그만하면 할 말이 없다. 철학자가 입을 놀리면 ‘닥쳐!’ 라는 일갈이 날아올 법 하다.


    그렇다. 그들은 창피해서 입을 닫았다. 그것이 실존주의다. 지식인이 스스로 자기 입을 꿰맸다. 몇 마디 비명소리를 내뱉기는 했어나 언어라고 하기엔 창피한 수준이다. 예술가도 스스로 제 손을 꿰맸다.


    그것이 다다이즘이다. 허영만 화백의 ‘오 한강’에는 화가가 스스로 그림을 봉쇄해 버린다. 그게 극사실주의라는 거다. 예술가는 그림과 음악으로 사회에다 발언해야 하는데 빨갱이로 몰릴까봐 입을 닫았다.


    조약돌이나 그린다. 그것은 절대 발언하지 않겠다는 대단한 발언이다. 비겁자의 슬픈 몸부림이다. 지금도 한국 화단에서 이 비겁자의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단색화’ 어쩌구 하는 유행도 그 변종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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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의사결정능력이다. 그 의사결정능력을 잃었다. 마음은 존엄을 잃었다. 언어는 관점을 잃었다. 미학은 의미를 잃었다. 그들에게는 볼테르의 야심도, 헤겔의 자부심도, 니체의 패기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정치판도 그러하다. 모든 잘못된 것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한국의 지식인도 국민을 야단치지 않는다. ‘국민은 항상 옳다’는 그릇된 숨은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소인배를 꾸짖지 않으니, 개념없이 오만해져서 일베충으로 놀아나는 판이다. 계몽주의 시절이 차라리 편했다. 그때 유럽은 앞선 중국을 추월하려 하고 있었다. 볼테르는 강희제를 이상군주로 찬양했다.


    그런 때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선두에 서게 되자 길을 잃었다. 누구든 그렇다. 꼴등이 2등까지 쉽게 간다. 선두가 되면 헤맨다.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이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를 비켜간 적은 없다. 민주주의가 강한 것은 적이 있을 때 뿐이다. 민주주의는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다. 큰 싸움에서 독재자 한 명이 의사결정하면 당연히 망한다. 이겨도 잠시 이긴다.


    히틀러도 잠시 이기고, 김성근 감독도 잠시 이긴다. 스탈린과 나폴레옹도 잘 나갈 때가 있었다. 독재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경쟁자가 있을 때 강하다. 그래서 미국은 끝도 없이 적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진보는 두 가지 형태다. 하나는 조직의 발달이다. 소집단에서 대집단으로 발전한다. 또하나는 개인의 발전이다. 대집단은 남자가 잘 하는 정치로 되고, 개인의 진보는 여자의 관심사인 예술로 된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 혹은 혁명의 세기다. 전쟁과 혁명을 통해 무수히 많은 대집단이 만들어졌다. 수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념으로 뭉친 초국가도 탄생했다. 냉전을 빚은 동서 양진영이 그러하다.


    무슬림과 기독교의 종교대립도 부각되고 있다. 인간들이 대집단을 만드는데만 열심이라서 ‘빛나는 개인’은 없고 ‘열광적 다수’만 있다. 평등한 시대의 민주주의가 ‘비겁한 다수’의 어리광을 부채질하고 있다.


    봉건시대는 달랐다. 기사들은 농노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을 위해 함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나마 기품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비겁해져서 70억 인류가 모두 치기어린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는 판이다.


    마음은 존엄을 잃었고, 언어는 관점을 잃었고, 미학은 의미를 잃었고, 역학은 구조를 잃었으니, 기어이 철학은 의사결정을 못하게 되었다. 지식은 소심해져서 결국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인류는 의사결정능력을 잃었다. 오직 다수에 의해 굴러가는 판이다. 이 판이 개판이다. 다수의 논리는 오직 대결을 통해서만 작동하게 되어 있다. 트럼프와 같은 자가 간단없이 나타나서 대결을 부추긴다.


    그게 또 먹힌다. 민주주의는 대결없이 작동하지 못하는 불완전 시스템이다. 경쟁없는 시장과 같다.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큰 시장은 자본주의 경쟁이 먹히지만 한국과 같은 작은 시장은 재벌이 독식한다.


    자본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영남과 호남의 고립된 지역에서는 민주주의가 죽는다. 다수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은 수도권에서 작동한다. 일본과 대만은 고립된 섬이라 민주주의가 죽는다.


    중국은 덩치가 너무 커서 외부의 힘에 영향받지 않으니 역시 섬과 같아져서 민주주의가 죽는다. 일본과 대만은 변방에 고립되니 천칭저울의 축이 깨졌다. 중국은 축이 비대해서 천칭저울의 날개가 깨졌다.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는 경쟁이 작동하는 큰 시장, 외부의 입김이 작동하는 개방된 수도권 대도시에만 제한적으로 작동한다. 진보정치의 한계가 명백하다. 그렇다면 인류는 두 번째 진보로 길을 틀어야 한다.


    ◎ 진보 1, 정치적 민주주의가 소집단에서 대집단으로 발전시킨다.
    ◎ 진보 2, 예술적 개인주의가 자원의 질을 향상시킨다.


    그것은 자원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진보주의는 무엇인가? 공자는 소인배와 군자를 구분했다. 이제는 모두 군자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선비로 트레이닝 되어야 한다. 공자는 예악禮樂에서 답을 찾았다.


    지금은 문화와 예술에 답이 있다. 문화와 예술은 개개인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 각별하다. 민주주의는 다수를 만들고 집단의 리더에 의사결정을 위임한다. 이 방법으로도 상당한 진보가 가능하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시작은 되는데 마무리짓지 못한다. 판을 벌이기만 하고 끝내지 못한다. 개인이 최종적이다. 인은 타자를 수용하니 다수를 만든다. 지는 사람을 분별하여 지도자를 탄생시킨다.


    의는 팔로워십이니 무리가 지도자를 따른다. 이에 최고의 팀이 결성된다. 그렇다. 인과 지와 의가 먼저다. 그러나 부족하다. 보다 개인의 덕목인 신과 예가 아니면 안된다. 멋지고 세련된 개인이라야 한다.


    노무현이 인과 지와 의로 백만노빠의 큰 무리를 모아 천하의 일을 벌였으나 마무리짓지는 못했다. 문재인의 신과 예가 아니면 안 된다. 안철수의 불신과 김종인의 무례를 해결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은 적어도 1만인을 이끄는 종교적 지도자의 가치다. 혹은 철학가의 가치다. 지는 적어도 1천 명을 이끄는 지도자의 가치다. 의는 적어도 1백 명을 이끄는 지식인의 가치다. 신이 열명의 무리에 있다.


    열명이 모여 꽌시를 이루면 신이 있다. 예는 한 명의 개인가치다. 한 명을 볼 때는 예를 보고, 열명을 볼 때는 신을 보고, 백명을 볼 때는 의를 보고, 천명을 볼 때는 지를 보고, 만명을 볼 때 인을 본다.


    일베충은 만 명도 넘는데 인이 없다. 환빠는 천 명도 넘는데 지가 없다. 새누리는 의원이 백명도 넘는데 의가 없다. 청와대는 비서가 열 명도 넘을텐데 그들간에 신이 없다. 박근혜는 혼자인데 예가 없다.


    무엇인가? 문명이 진보하면 결국 개인화 된다. 열 명의 집단에서 추구되는 신과 한 명의 개인에서 추구되는 예가 중요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영역은 여자가 보다 강하다. 더 진보적인 경향이다.


    남자는 혼자되면 퇴행해서 곧장 노숙자 된다. 주변에 여럿이 있어야 그나마 사람꼴을 한다. 놔두면 면도를 않는다. 여자는 혼자 살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화장을 하고 몸을 가꾼다.


    그게 더 진보다. 우리는 집단으로도 나아져야 하지만 개인으로도 나아져야 한다. 더 공부해야 한다. 예악 곧 문화예술로 가능하다. 교양과 매너와 에티켓으로 가능하다. 물론 이런 언어는 19세기 언어다.


    21세기에 교양이니 매너니 에티켓이니 하면 촌스럽다. 개인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은 의사결정훈련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강단있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라는 거다.


    우리는 집단의 발전에 묻어가려고 한다. 한국의 원화가치가 올라가면 해외여행 가서 돈을 쓰며 과시하려고 한다. 개인의 인격을 발전시키지 않고 한국의 발전으로 뭔가 이루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해 한다.


    원정 성매매나 하면서 말이다. 추하다. 공자는 그런 개인을 평가한다. 차별하고 증오하는 이유는 타자의 배척이 아니라 자기편에 소속되려는 의도다. ‘나도 우리편에 끼워줘.’ 이 말을 하기가 창피한 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말하는게 더 전달력이 좋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 낯간지럽다. ‘저쪽 사람이 어쩐다.’고 돌려 말한다. 이는 소인배의 비겁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타자성에 의해 작동된다.


    타자성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원초적으로 부도덕하다. 타자성을 극복하는 주체성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제안되어야 한다.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심 없이도 내부적인 결속을 이끌어내야 한다.


    동성애자, 소수자, 장애자, 이방인을 차별은 소외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그들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지식인은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먹히지 않는다. 왜? 그들은 소인배니까.


    공자의 방법이 먹힌다. 공자는 차별하는 자를 차별했다. 차별하는 자가 소인배다. 일베충을 차별하지 않으면 증오범죄는 차단되지 않는다. 공자의 시대에는 예를 살펴 그 사람을 받아들일지를 판단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다자간 경쟁구조에서만 작동하는 불완전한 집단의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타자성에 의지하는 시스템이라 타자가 없는 고립된 지역에는 먹히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주체성에 의지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조직해야 한다. 개인의 의사결정능력을 키워야 한다. 집단적 진보 뿐 아니라 개인적 진보라야 한다. 인≫지≫의≫신≫예로 갈수록 개인화 되어 결국은 개인이 평가된다.


    혁명의 세기이자 전쟁의 세기인 20세기 서구철학은 나약한 패배자인 지식인이 입을 닥치는 가운데 집단이 오만해졌다. 지식인이 너무 신중하고 겸손해졌다. 그 허를 찌르고 종교인이 오만해져서 폭주한다.


    집단은 언제나 옳다는 숨은 전제가 깔렸다. 누구도 집단을 꾸짖지 않았다. 인간은 날로 교만해져서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집단의 힘을 믿고 거리낌없이 타자를 차별하고 배척하고 겁박하는 풍조가 생겼다.


    21세기다. 스마트 시대를 넘어 AI 시대다. 다시 개인의 가치가 주목받는 시대다. 집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티브 잡스 혼자서 세상을 바꾸는 시대다. 집단이 아닌 개인을 진보시켜야 먹히는 시대이다.


    타자성의 민주주의를 해결하는 주체성의 존엄주의가 필요하다. 집단을 평가하지 말고 개인을 평가해야 한다. 지식인은 소인배를 꾸짖어야 한다. 언론인은 국민을 야단쳐야 한다. 트럼프가 무슨 죄냐고?


    트럼프에게는 인류의 무지를 찾아낸 발견자의 공로가 있다.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등신이다. 그 등신을 꾸짖어야 한다. 일베충은 인간이 아니다. 옛날에도 밥벌레와 돈벌레와 공부벌레가 있기는 했다.


    인류가 벌거벗고 정글을 돌아다니던 때가 엊그제다. 그 사이에 진보했는가? 봉건시대에는 개인의 자질을 논했는데 지금은 집단을 비교한다. 트럼프에게 말린 미국인이 한국의 총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회권력교체 못하는 일본 비웃어도 된다. 그러나 집단에 묻어가는 것은 2등까지, 남을 앞서려면 개인이 강해야 한다. 한국인 한 명이 일본인 한 명보다 똑똑해야 한다. 아직은 한국인이 일본인에 밀린다.


    미국인이라면 월세를 줘도 한국인보다 일본인에게 줄 것이다. 한국인 개인이 문화와 예술에서 일본인보다 낫다는 근거가 없다. 최종적 평가는 개개인에서 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신과 예로 이겨야 한다.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믿을만하고 예의바른가? 서구철학은 죽었다. 그들은 개인을 비판하지 않는다. 동양철학은 살았다. 개인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의 전통이 그러할 뿐 동양의 현재는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세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인의 인으로 우리가 세계를 아우르고, 한국인의 지로 세계를 이끌고, 한국인의 의로 세계를 결속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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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은 끝났습니다. 답은 동양에 있습니다. 그 중에도 공자에게 있습니다. 공자가 사람을 야단쳤기 때문입니다. 서양철학은 사람에게 아부하며 '니들이 원하는거 이거 아냐?' 하는 철학입니다. 독일철학은 그나마 좀 점잖고 영국과 미국이 그게 더 심하죠. 지금 한국의 힐링붐도 미국식 자기개발서 아류인데 본질에서 썩은 정신입니다. 500방으로도 부족하고 아주 패죽여야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슈에

2016.04.25 (23:58:12)

17억에 팔렸다는 작품이죠.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kgallery&logNo=220676931338

이우환 작가 曰 인고와 번뇌의 시간을 거쳐 그은 획에 그 의미가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zuna

2016.04.26 (00:32:57)

http://gujoron.com/xe/?mid=gangron&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9D%B4%EC%9A%B0%ED%99%98&document_srl=308791&m=0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슈에

2016.04.26 (02:04:26)

인공지능이 렘브란트 그림을 똑같이 베꼈다고 백만원 받는 세상이 웃긴거죠. 왜 이 링크를 달아주셨는지 몰라도 이우환 화백이 날로 먹고 있단 걸 말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사실 날로 먹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만. 그러니까 그림이 17억이니 24억밖에 안되는 거죠. 쪽팔린 줄 알아야지. 그림이 두자리 억밖에 안된다니. 뭐가 쫄리다고 번뇌니 인고니 설명하고 았습니까? 그렇게 비굴하게 구니 한국그림이 안 팔리고 더불어 영화도 찌질한 것만 찍죠. 드라마가 찌질한 게 팔린다고 그게 답인줄 아나요? 최고가 그림에 줄줄 설명한 게 우습단 거죠. 왜 설명하나요? 뭐가 쫄리다고? 이우환이 어딜 보고 있나요? 서양 시장을 눈치 보고 있다면 틀린거죠. 사실 잘 그린 그림도 아니지만. 본인의 의견을 말씀해주시죠. 링크만 달면 뭘 말씀하시는지 알 수 있나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6.04.26 (10:38:21)

 


   
    일본의 젠스타일에서 나온 모노파니 단색화니 하는게 그래도 변방에서 나름 일정한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마호멧이 우상숭배라며 조각을 금지시키자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을 만든 것과 같아서 예술의 곁가지일 뿐 큰 줄기는 아닙니다.


    한때 아프리카 붐이 일어나서 개나 소나 다 아프리카의 원시조형에서 답을 찾는다며 떠들었지만, 그것은 김어준이 뜬금 이발소그림을 찬양하며 B급문화 예찬에다, 졸라와 씨바를 히트시키는 것과 같이 예술의 희화화를 통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변주에 불과하죠.


    쉽게 말하면 조연입니다. 목에 힘 주는 주류예술에 식상한 지금, 그런 것도 양념으로 있어야 덜 심심하다는 거죠. 근데 그게 예술 아니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아프리카 장사나 B급장사나 졸라씨바 장사는 예술인데 그 아프리카나 한국의 민화나 B급작품이나


    이발소그림이나 졸라씨바는 예술이 아닙니다. 졸라씨바 장사는 예술인데 졸라씨바는 욕입니다. 김어준이 하면 예술이고 당신이 하면 욕이라는 거에요. 알겠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일본의 젠스타일을 조지 루카스가 빼먹으면 예술이고 정작 본토 일본넘이 하면


     조또 아니라는 거죠. 그게 맥락을 얻지 못하는 변방의 비애. 기승전결로 사건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거. 변방이 주류를 치지 않고 양념이나 조연으로 만족하면 똥입니다. 젠스타일이나 모노파나 단색화니 하는 것들은 모두 똥입니다. 그걸 스티브 잡스가 가져가면 


    물론 최고의 예술이 되는 거죠. 한국 문화재를 왜넘이 훔쳐가서 박물관 뒷마당에 놔두면 암것도 아닙니다. 프랑스가 훔쳐간 보물이 프랑스에서는 암것도 아니고 골치아픈 짐입니다. 예술은 제 위치에 있어야 맥락을 얻어 예술이 됩니다. 한국으로 와야 가치있는 거죠. 


    상주의 어떤 도굴맨이 훔쳐가서 감춰둔 훈민정음 해례본은 10조원의 가치가 없다는 거죠. 10조원이 되려면 제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도굴맨은 그걸 모르죠. 결론적으로 박정희의 예술탄압으로 한국예술이 단조로와졌으며 나름 성취가 있다하나 곁가지에 불과하고 


    일본넘이 아무리 좋은걸 만들어도 일본에서는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며 그 일본의 아류인 한국은 더하죠. 일본넘들이 하는건 분재나 수석과 같아서 사실 취미생활에 불과한 거죠. 중국넘들이 옥배추나 다층구 만드는 것도 비슷한데 예술이라기보다는 취미생활에


    가깝습니다. 조잡하다는 말이죠. 하여간 한중일 세 나라가 다 세상을 변혁시켜 가며 맥락을 얻은 예술과 주류와 동떨어인 개인적 취미 사이에서 뭔가 막혀 있습니다. 천장을 뚫고 치솟아 올라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요. 한국에는 색깔을 쓸줄 아는 화가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평생 물감을 만져본 적이 없는 거 같소. 아프리카보다 못해요. 에너지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 형태로 도약하지 못하고 2차원 평면에서 노는 거죠. 예술과 취미는 다른 겁니다. 수석이나 분재나 서예나 꽃꽃이나 다도나 이런건 예술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전혀 예술이 아니라고 하기도 찝찝하죠. 예술에는 정답이 있고 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술이 다양하다는건 오해입니다. 주류와 연결되어 맥락을 얻어야 하며, 동떨어진 변방의 아이디어는 착취당합니다. 주류가 침략해서 아이디어를 빼먹는다는 거죠. 


    이우환 화백의 '조응'에 한 마디 한다면 찍어놓은 점 두개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하면 정신병자 소리입니다. 백남준의 예술이 예술인 것은 TV 앞에 돌부처를 갖다 놔서 뭐 어떤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그걸로 서양을 때린 겁니다. 서양을 졸라 패면 그게 예술.


    김어준의 졸라씨바는 이명박그네를 때리므로 예술, 당신의 졸라씨바는 그냥 욕, 하긴 한국의 단색화도 박정희에게 침묵으로 개기는 방법이라고 하면 예술. 때려서 소리를 끌어내야 예술입니다. 바스키아나 뱅크시나 낙서로 서구문명을 때렸기 때문에 예술입니다.


    그 낙서 안에 심어둔 어떤 메시지가 예술이라고 우긴다면 정신병자입니다. 초딩이냐? 이우환의 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 서양넘들이 그거 보고 뒷머리를 맞은듯한 충격을 받았다면 한 방 먹인 거죠. 근데 우리끼리 그러고 있는 것은 예술이 아니고 비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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