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론과 구조론 상대성이론이든 불확정성원리든 양자역학이든 이런 식의 대중의 경험적 직관과 어긋나는 즉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것이 나오면 사기꾼들이 제철 만난 듯이 환호작약한다. 맘껏 사기쳐도 되는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깜깜이 선거가 되니 국민의당이 활개치는 것과 같다. 구조론을 일종의 그런 걸로 보고, 자리깔아주니 초딩 수준의 개소리를 떠드는 자가 있기 때문에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자기 머리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닌 걸로 여기서 떠들면 안 된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도덕경이든 그거 2500년 전에 해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가?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김용옥 무리는 내게 까이는 거다. 서양철학을 소개하면서 자기 생각처럼 떠들어대는 먹물들이 비판받는 것과 같다. 심지어 TV에 출연하여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이건 외국의 석학 아무개가 한 말인데 하고 인용하는 도둑넘도 있다. 칼럼을 쓰면서 태연하게 석학 아무개를 인용하지를 않나? 이런 자들은 멧 데이먼 영화 ‘굿윌 헌팅’도 안 본 자들 아닌가? 그게 해도 되는 짓이냐? 미친 개아들놈의 새끼가 아닌가? 물론 본말이 전도되지 않는 한 자기 생각에다 광을 내려고 유명한 이름들로 양념을 쳐줄 수는 있다. 남의 철학을 파는건 남의 그림을 모작하는 것과 같다. 가수가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그거 범죄다. 역사학은 묵을수록 가치가 있고 철학과 예술은 새로울수록 가치가 있다. 강신주를 철학자로 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다. 그거 처세술 변종이다. 이 사이트에서 그런 짓은 더더욱 안 된다. 사이트 격 떨어진다. 예수를 팔든, 석가를 팔든, 공자를 팔든 기본 남의 것을 팔면 안 된다. 당연히 신神을 팔아도 안 된다. 구조론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공자나 노자를 인용하는 정도는 물론 괜찮다. 자기 논문이 아니면 논문이 아니다. 자기 철학이 아니면 철학이 아니다. ‘마르크스 원전 전문가.’ <- 이런 표현이 가능하냐고? 적어도 선비라면 있을 수 없는 국어모독이다. 철학자는 자기철학 전문가일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판에 내가 공자 이야기를 곁들이니까 곧 공자를 숭배하려는 식이면 매우 곤란하다. 신을 숭배하는 새끼들은 일단 적이다. 신장사를 하는건 신 외에 또다른 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수장사 하는 자 중에 예수를 이해한 자는 없다. 기독교? 그건 오해다.’ 이 말은 니체가 한 거다. 뭐 이정도 인용은 해주는 거다. 오해될 수 있는데도 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다. 당연히 예수쟁이들을 치려는 거다. 부처쟁이도 마찬가지다. 신이라는 단어의 뜻을 바꾼다. 구조론은 ‘일의 관점’으로 본다. 이 관점은 역사이래 없었다. 비슷한건 물론 있다. 그러나 명확한 형태의 ‘의사결정원리’라는 개념은 없었다. 서양철학으로 보면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다. 마음, 영혼, 이성, 의지, 이데아 따위를 주장하는게 관념론이다. 구조론을 관념론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역학에 근거한다. 수학이고 물리학이다. 단 표상되는 물질 위에 추상되는 것이 별도로 있다. 그것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를 버려야 그 연결된 전체에 도달한다. 나라는 관념이 하나의 의사결정단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개미는 개체단위가 아닌 군집단위로 의사결정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 개체가 죽는건 신경쓰지 않는데 집단이 죽으면 매우 괴로워한다. 인간도 마찬가지. 부족민이 끝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개인이 죽는 데는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인은 다르다. 개인이 의사결정단위로 기능한다. 고등교육을 받아서 집단의 대표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당신은 집단의 대표성을 획득했는가? 깨달았는가 말이다. 가족의 대표성 말고 인류 전체의 대표성이라야 한다. 가족이 있고 그 가족 안에서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일의 단절이 두려운 것이다. 가족이 없는 부족민은 쉽게 죽는다. 모계사회이므로 가족이 없는 남자들이 특히 잘 죽는다. 가족이 없어도 가족역할 하는 무엇이 있으면 죽지 않는다. 구조론은 관념론이 아니다. 유물론에 가깝지만 유물론을 넘어서 있다. 물질은 의사결정의 근거가 아니다. 물질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는 특정한 물리적 조건 하에서만 작동한다는 한계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있기는 있는데, 그 무엇과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물질이다. 그런데 과연 반응하지 않을까? 작용하지 않으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작용하는 방법을 인간이 찾아내지 못한 거다. 일의 원리와 물질의 원리는 별개로 존재한다. 일의 원리가 물질원리에 앞선다. 일의 원리를 의사결정원리라고 여섯자로 길게 말해도 된다. 신은 한 글자라서 종이를 아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의사결정은 대칭을 쓴다. 의사결정 주체는 인간이다. 그 인간이 집단의 대표성을 얻어야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발언권 말이다. 그 대표성을 부여하는 집단이 뭐냐는 말이다. 우주? 우주는 물질 개념에 가깝다. 신이라고 말하면 확실히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말을 쓴다. 종교를 믿는건 자유지만 선교는 자리 봐가면서 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선교활동 하면 안 된다. 절에 가서 선교하면 안 된다. 화장실에서 밥먹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러지 말자. 종교인이라면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조론이 갑이다. 종교주장은 종교공간에서 하고 여기서는 일단 구조론 위주로 간다. 결론적으로 의사결정원리로 볼 때 의사결정 주체인 인간이 의사결정대상인 자연으로부터의 대표성을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그것은 신神이다. 개미는 호르몬을 통해서 집단의 대표성을 위임받는다.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서 대표성을 위임받는다. 그 절차가 신과의 일대일이다. 그러한 대표성의 획득을 전제로 의사결정해야 바르다. 깨달았다고 쳐야 바르다. 종교인은 신에게 복종하느라 기도를 하지만 구조론은 그 반대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나 한 몸을 대표하는 결정인지, 혹은 나 보다 작은 나의 어떤 강박을 대표하는지, 혹은 나를 넘어 가족을 대표하는지, 국가를 대표하는지, 인류를 대표하는지, 그 이상 곧 신을 대표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조건 그 의사결정은 틀리게 된다. 왜 인간은 마이너스로만 즉 무언가를 반대하는 쪽으로만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 찬성이라는 것은 없다. 찬성해도 반대하는데 찬성한 것이다. 무얼하든 반드시 에너지가 소비된다. 무언가 나빠진다. 전체가 나빠지고 대신 원하는 특정한 부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관념론은 사람이 생각을 하면 그 생각에서 곧 에너지가 나와서 어떻게 된다는 주장이다. 유물론은 물질에서 에너지가 나와서 어떻게 된다는 주장이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에서 에너지가 나와 어떻게 된다는 입장이다. 짜증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에 때려맞추려는 태도다. 총을 쏘랬더니 총사대의 삼총사가 총을 안 쓰고 펜싱을 한다. 칼을 쓸것이면 그게 검사대이지 총사대냐 말이다. 퇴행현상이다. 대부분 퇴행한다. 좋은 것을 나쁜데 쓴다. 일베충이 그렇다. 좋은 인터넷으로 증오범죄 저지른다. 구조론은 관념론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물론도 아니다. 관념론은 바둑알들이 바둑둔다는 주장이고 유물론은 바둑판이 바둑둔다는 주장이다. 바둑알은 의지가 없다. 영혼은 없다. 영혼을 긍정하면 신이 부정된다. 바둑알이 지가 알아서 바둑을 두면 이세돌은 뭐냐고? 유물론은 알파고를 부정하고 컴퓨터가 바둑둔다고 주장하는 거다.
◎ 관념론 – 바둑알이 바둑을 둔다. 컴퓨터는 하드웨어고 별도로 소프트웨어가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도교든 뿌리는 모두 이신론적 관점, 구조론적 관점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퇴행시켜서 종교화 된 것이다. 영혼이 있다고 하면 쉽게 납득되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근데 영혼 없다. 마음, 영혼, 이성, 의지, 이데아 따위는 의사결정의 근거가 아니다. 바둑을 두더라도 바둑판의 형태를 고려해서 둔다. 물질을 고려한다. 그러나 물질이 직접 의사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은 표상하고 그 배후에 추상하는 것이 있다. 그 내막은 모른다. 모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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