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뇌와 남자뇌 이런 이야기는 신중하게 해야 하고 신중하게 들어야 한다. 열등감을 드러내는 소인배의 자기소개가 되기 십상이다. 옛날에는 ‘나이가 벼슬’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남자가 벼슬’이라는 식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에헴’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열의 논리’가 사용된다면 그게 열등감을 들키는 거다. 뇌과학으로 보면 남자뇌와 여자뇌의 차이가 있다. 큰 차이는 아니다. 남자가 더 수학을 잘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흑인 남자가 한국 여자보다 더 수학을 잘할까? 이렇게 치고 들어가면 그런 구분이 쓸데없음을 깨닫게 된다. 여자뇌는 멀티기능이 있고 남자뇌는 차단기능이 있다고 한다. 장단점이 있는 거다. 남자뇌는 좌뇌와 우뇌가 많이 연결되어 집중할 때는 뇌의 다른 부분을 차단한다. 그 부분을 더 잘한다. 단 거기에 집중해서 분위기를 못 읽는다. 그 경우 리스크가 커진다. 남자는 소모품이므로 리스크를 감수한다. 포도주 한 잔 정도를 하면 S자 코스나 후진상황에서 운전을 더 잘한다는 설이 있다. 술기운으로 과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거 더 잘하는 걸까? 사고위험은 증가했다. 어쨌든 차이가 있는데 이는 집단 안에서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여자든 남자든 리더가 되면 호르몬 변화로 인해 자기중심적이 된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린다. CEO의 심기관리가 회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CEO 기분이 나쁘면 오판하고 그 경우 회사가 망한다는 논리다. 재벌 3세병인데 독재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논리에 빠진다. 그런데 호르몬 변화로 실제로 뇌구조가 그렇게 바뀐다는 설이 있다. 집단 내부에서의 역할에 따라 호르몬의 영향으로 뇌구조가 바뀔 수 있다. 대개 유아틱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여자만 모여있다면 그 집단 안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남성호르몬이 더 많이 나온다는 설이 있다. 요는 남자역할, 여자역할로, 역할을 정해놓고 그쪽으로 밀어붙이면 거기에 맞추게 되는데 그 결과로 맞추어진 경향을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몰고간다는 거다. 성별에 따른 역할의 강조는 위험하다. 여자뇌는 평균에 수렴되어 있고 남자뇌는 상대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이 말은 남자는 바보와 천재가 많다는 거다. 바보든 천재든 생태계로 보면 불안요소다. 집단의 리스크를 증대시킨다. 리스크를 증대시키는 것이 세력전략이고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 생존전략이다. 환경에 양호할 때는 세력전략을 쓴다. 리스크가 없으므로 리스크를 증대시킨다. 환경이 나쁘면 반대로 리스크를 감소시키는 생존전략을 쓴다. 진화는 철저하게 리스크 감소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유전자는 일단 보수적이다. 만약 다윈식으로 개체변이에 의해 무한진화가 허용된다면 폭주하게 된다. 브레이크가 없다. 그 결과는 멸망이다. 인류의 등장은 생태계 차원에서 매우 위험해진 것이다. 종의 대멸절이 일어나고 있다. 진화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진보 역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이미 진보의 대열에 들어섰기 때문에 계속 가야 하는 것이다. 날아가는 화살이 도중에 멈출 수 없는 논리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기본은 보수다. 환경이 양호할 때만 예외적으로 세력전략을 쓴다. 현생인류의 역사가 3만년이라면 환경이 좋았던 시절은 최근 300년에 불과하다. 한국은 50년 정도다. 인류역사는 대부분 모계사회였고 여성중심의 의사결정을 해왔다. 동물도 모계사회인 경우가 많다. 모계사회가 더 안정적이므로 종의 생존확률을 높인다. 그러다가 근래에 갑자기 의사결정단위가 커졌다. 가족에서 대가족, 부족에서 대부족, 국가에서 대국가로 사이즈가 커지면 남성중심사회로 변한다. 그 경우 리스크가 증대되는데 가족의 멸망, 부족의 멸망, 국가의 멸망이 일어난다. 이게 나쁜 거다. 반대로 살아남아서 대가족, 대부족, 대국가로 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남성중심의 대제국이 되었는데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3천개 소국이 멸망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여성중심인 유럽에 밀린 것이다. 남성중심은 멸망중심이 된다는 의미다. 그 중에 살아남은 하나의 우두머리가 남자이므로 남자가 낫다는건 멍청한 주장이다. 나머지 2999개가 망했다. 이야기는 복잡하다.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풀어야 한다. 바둑에 비유하면 선세력 후생존이다. 초반포석으로 세력을 장악해놓고 대마싸움으로 들어가서 생존을 꾀한다. 그런데 ‘사귀생에 통어복이면 필승’이라고 해서 먼저 귀에서 산 다음에 중앙을 친다. 근래는 사귀생에 통어복이면 필패라고도 한다. 알파고는 처음부터 중앙이다. 축구나 야구는 수비가 우선이다. 선수비 후공격이다. 비유하면 선여자 후남자다. 초반에는 협력수비로 안정시키고 후반에는 개인돌파로 득점한다. 초반에는 리스크를 줄이고 후반에는 리스크를 감수한다. 이렇게 말하면 헷갈릴 것이다. 구조론은 일단 전체에서 부분이다. 그러나 변방을 먼저 먹고 지렛대를 써서 중앙으로 쳐들어간다. 즉 부분을 먼저 치되 부분의 전체를 치는 것이다. 더 헷갈릴 거다. 작은 전체에서 큰 전체로 복제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단체장을 하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부분에서 전체로 보이지만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고 의사결정으로 봐야 한다.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려면 전체의 판세를 읽어야 한다. 산초가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다가 출세해서 왕이 되는 일은 없다. 작은 마을이라도 처음부터 왕이어야 한다. 잔 다르크는 처음부터 신과의 일대일이다. 완전성의 문제다. 본질을 봐야 한다. 작더라도 전체의 모형을 완성한 다음에 복제한다. 이를 외부에서 관찰하면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처음부터 전체를 봐야 완전성을 얻는다.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면 곤란하고 개인이냐 집단이냐다. 남자들은 대집단에 가담하려 하고 그러므로 더 정치적이다. 집단의 확장단계는 더 정치적인 것이 진보적이다. 나이가 들면 소집단에 가담하려 한다. 자기 식구만 챙기려 한다. 결국 남자는 점차 보수화 된다. 여자는 아기가 있으므로 이미 집단의 장이 되어 있다. 더 전체를 신경쓰지만 소집단이다. 남자는 대집단의 부분이 되고, 여자는 소집단의 전체가 된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여자가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남자는 대집단이므로 남자가 더 진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남자는 개인이 보수지만 대집단의 진보에 묻어가고, 여자는 개인이 진보지만 대집단에 묻어가지 못해서 손해본다는 의미다. 집단의 규모에 따라 이중기준이 있다. 이중기준의 오류가 아니라 실제로 기준이 둘이라서 헷갈리는 것이다. 경상도라면 남자의 보수가 두드러지고, 서울이라면 여자의 진보가 두드러진다. 기준 자체가 다르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20세기는 확실히 남자의 시대였다. 부족에서 국가로, 세계로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21세기는 여자의 시대다. 더 이상 통합될 상부구조가 없다. 만들어낼 대집단이 없다. 이제는 소집단을 잘 만드는 쪽이 유리해진다. 중앙집권화는 남자에게 유리하고 지방분권화 곧 정확하게는 의사결정이 개인화 되면 여자에게 유리하다. 즉 집단의 사이즈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미래는 개인주의 시대이므로 여자가 유리하다. 미래는 여자가 진보를 주도해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그렇다. 공자의 논리로 보면 인≫의≫예로 발전한다. 인의 시대는 여자가 유리하고, 의의 시대에는 남자가 유리하고, 예의 시대는 여자가 유리하다. 교회의 역할이 인仁, 정치의 역할이 의義, 문화의 역할이 예禮다. 목사가 남자인 것은 그 종교가 잘못된 거고, 여자의 의사결정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종교의 수요측은 여자고, 정치의 수요측은 남자이고, 문화의 수요측은 여자다. 결론은 일의 단계에 따라서 여자 혹은 남자 역할이 두드러지며 그러한 역할의 강조는 위험한 것이며, 그 역할을 깨는게 중요하다는 거다. 중세유럽은 역할분담으로 강해졌으나 프랑스는 기사도 때문에 싸울때마다 진 거다. 여자와 남자 혹은 여러 가지로 역할분담을 하면 강해진다. 기사도정신에 따라 그 역할을 고정시키므로 프랑스는 영국에 백년동안 계속 졌다. 잔다르크가 역할을 깨자 프랑스는 단번에 강해졌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유교의 사농공상 역할고정은 공자를 오해한 것이다. 역할을 나누되 부단히 바꾸어야 한다.
◎ 의사결정 주도권은 집단의 단위에 따라 다르다.
가족은 작은 단위다. 모계사회가 된다. 대가족은 큰 단위다. 부계사회가 된다. 산업시대는 재벌과 같이 큰 단위를 만드는 남자가 유리하다. 이는 외형적이고 실제로는 큰 단위 안에서 모두가 리더가 되는건 아니므로 개개인으로 보면 의미없다. 실제로는 남자가 희생하는 것이다. 이 상황이 오래가지 않는다. 어쨌든 여자에게 유리한 사회로 가고 있다. 이런게 헷갈리는 이유는 개인과 집단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곧 집단이다. 어쨌든 세상은 여자≫남자≫여자로 가는데 그 중간의 남자에서 대집단이 만들어진다. 그 부분에서 남자의 세력전략이 진보를 주도한다. 그리고 여자의 문화가 마무리한다. 현실도 그렇다. 여자가 남자를 기른다. 남자가 돈을 벌어온다. 여자가 그 돈을 쓴다. 즉 유목민이 소를 키워서 잡아먹듯이 여자는 남자를 키워서 잡아먹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있지만 거기에 매몰되어 그 방향으로 계속 가면 리스크가 커져서 멸종한다. 되도록 고착된 역할을 깨려고 노력해야 살아남는다.
원래 모든 인간은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로 되었다가 여자로 죽습니다. 남자로 될때 남자는 더 많이 남자가 되고, 즉 리스크를 감수하고, 여자는 더 적게 남자가 됩니다. 즉 리스크를 줄인다는 거지요. 아기는 리스크가 없어야 하고, 노인도 리스크를 줄여야 노인까지 살아남습니다. 소집단은 여자가 진보이고, 대집단은 남자가 진보인데, 유럽은 소집단으로 흥했고 중국은 대집단으로 망했습니다. 장기적-소집단으로는 여자의 리스크 감소가 진보이고, 단기적-대집단으로는 남자의 리스크 증대가 진보입니다. 환경이 좋고 정세가 급변할 때는 리스크를 감수하는게 맞고, 환경이 나쁘고 정세가 안정적일 때는 리스크를 줄이는게 맞습니다. 리스크의 증대전략과 리스크 감소전략을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 비유입니다. 딱 맞아떨어지는건 아닙니다. |
남자 졸부들이 돈을 벌면, 새장가를 가는데, 그건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과시욕이 우선. 식당도 획일화되어서, 김밥천국, 아님 거지같은 부페집. 결국은, 리스크가 너무 커서 불안장애 현상을 보여 기이한 판단을 함.
여자들만 모여있으면, 평판에 좌우되다가, 돼지 엄마가 일등을 먹음. 결혼한 여자, 안한 여자, 이쁜여자, 안그런 여자 나누다가 볼일 다보게되는 경향. 결국 고립되어서, 퇴행하게 되는 형태. 꼴찌를 일등으로 추대하는 기현상.
결국 호르몬의 불균형에 대처하기 위한, 스트레스 최소화 법칙으로 사료됨.
사회의 발전단계와 관련있는것인데. 4인가족을 기준으로 남자 가부장이 먹여살리던 시대는 이제 끝난것 같다. 그렇다면, 가족내에서는 여성성을 가지고 (출산과 인구지속성의 의미), 가족 바깥의 부족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 국가적으로는 남성성을 가지며, 외교를 할때는 여성성을 존중해 약소국을 보호하고, 전쟁에 대비해서는, 남성적인 의결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가 지금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