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ADHD는 의사들의 주장처럼 약물로 치료해야 할 문제라기 보단, 아이들의 주의력과 흥미, 집중도 등 다양한 심리적 요인들을 캐무시하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의 실패에 더 가깝다. 따라서 ADHD에 대한 궁극적인 처방은 당연히 교육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이들의 주의력을 문제삼을 게 아니라 아이들이 주의를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재미없고 지루한 교육을 하는 것이 문제다. 학창 시절 나는 이를 주로 수업 시간 동안의 조용한 딴짓(혼자 상상하기, 딴 책 읽기)으로 극복핬기에 ADHD라는 진단명을 피할 수 있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떠도는 주의력을 조용히 표출하면(즉, 공부 안하고 안 들키게 딴짓하기) 열등생이 되고, 남들 눈에도 보이게 그 지루함을 표현하면 ADHD가 된다.
2.앞으로의 진로 상담은, 기존에 존재하는 진로에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인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양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직업 선택 뿐 아니라, 직업 창조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로 상담은 진로 창조와 맞물려야 한다. 새로운 진로의 창출의 가능성이 가장 큰 분야가 바로 복지 분야이다. 앞으로의 진로 교육은 복지 분야에서의 사회적 기업들을 만들어내는데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바와는 달리 놀라울만큼 이타적이고 이상적인 구석이 있다. 청소년기 들어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추상적인 사고능력은 그들 내면의 <이상주의>를 불타오르게 한다. 그러한 이상주의에 맞춰 아이들이 진로를 모색하게 하여야 한다.
3.현재의 상담심리학은 <적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적응>은 개인의 심리적, 경제적, 신체적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을 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앞으로의 상담은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적응>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내담자가 <일신우일신>할 수 있는 지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상담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현재 사람들이 끌어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는 것은 사회적인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즉 개인적인 자질, 심리적인 결함의 문제라기 보단,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이야기이다. 가난하고 못 배울수록 심리적인 문제도 더욱 커진다. 특히 가난과 무지는 유전적인 원인에서 기인한 정신병리들(우울, 조울, 통합실조증 등)에 대한 그야말로 촉매역할을 한다. 정신 병리의 발현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미봉책에 그치며 궁극적으로 정신 병리에 대한 접근은 사회적인 접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신과 의사, 임상심리사, 상담심리사 등이 주도하는 정신병리학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 무지하다. 근래 들어 겨우 통합적인(구조적인) 접근이 출현하고 있긴 하나, 아직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의사들이 무지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기득권 층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눈을 뜨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시도할 에너지가 없다. 물론 그런 의사들도 있지만 비주류이다. 새로운 차원의 정신병리학이 필요하다. R.D 랭이 그러한 접근을 시도하긴 했지만, 아직 의학의 본류로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 앞으로 소위 정신병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보다 정밀한 접근이 요구된다. 이에 대한 연구물들이 축적되어야 한다.
현재 상담심리학 현장을 바라보니, 상층부(교수급)는 보수적이고 하층부(학생)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교수급만 되어도 벌써 배가 부르다. 사회적인 문제가 곧 개인적인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지만 거기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 교육제도가 경쟁을 강조하면 할수록 아이들의 자살율, 정신병리 발병률도 더욱 높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지만, 발언하지 않는다.
상담의 미래는 어둡지만 밝다. 상담이 지금처럼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상담의 미래는 어둡다. 상담은 반드시 진보와 함께 가야 한다. 상담 심리학의 이론들은 개인이 가족들과 맺는 관계가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밝혀냈지만, 가족을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회라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상담심리학의 거두들이 말년에 사회 운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담심리학은 사회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이를 깨뜨리고 상담심리학 분야에 사회적 차원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
상담을 통해 개인을 <정상>적인 수준으로 복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안일하다. 전염병의 원인(외부 환경의 불결함, 예방 시스템의 부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환자한테 백신 놓고 그걸로 끝이라고 안심해선 곤란하다. 건강을 회복한 환자에겐 전염병을 막는 일을 시켜야 한다.
상담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운동가가 되어야 한다. 물론 주는 상담이겠지만 보조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변화에도 참여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사이클을 완전히 파악하고 이를 상담자 뿐 아니라 내담자에게도 자각시킬 수 있을 때, 비로서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이 가능하다.
문제가 있으면 답은 존재한다. 이것은 구조론의 핵심이다.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도 답은 있다. 다만 그 답이 개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나도 구조론에 기반하여 앞으로의 변화, 즉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예측을 해 보았소.
평소에 생각하던 바를 간단하게 메모해 보았소. 이렇게 기록을 남겨 놓고 향후 추이를 지켜볼 생각이오.
내 지론은 이렇소. 상담이 개인에 천척하는 한, 상담의 미래는 없소. 상담이 가족 상담에 머무는 한, 상담의 미래는 없소. 더 큰 차원에서 에너지를 끌어오지 못하는 한, 상담계는 죽어버릴 것이오. 현재 한국의 상담계는 미국이라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고 있소. 그러나 그 에너지 격차가 사라지는 시점이 올 것이오. 반드시 온다오. 그 때 상담은 어디로 갈 것인가? 미국의 상담은 근본적으로 개인, 가족 상담에 기반을 두고 있소. 그들의 상담은 결국 사회적 소통으로 나아가질 못했소.
한국에서의 상담은 반드시 사회적 소통의 지점까지 치고 나아가야 하오. 너와 나와의 만남이 개인적인 깨달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실천으로도 나아가야 하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상담자보고 본업인 상담을 제쳐두고 밖에 나가 데모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오. 그러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선 상담계라는 이름을 걸고 그것이 개인, 가족의 내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하며, 내담자에게도 이 세상에 대한 <적응>보다는 새로운 <창조>의 삶이라는 차원, 지평이 열려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오.
내가 진실로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상담계의 보수화이오. 벌써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소.
에너지를 미국에서 조달하는 한 한국 상담계는 망할 것이오. 물론 현재 열심히 번영하고 있는 중이지만, 내가 말한 망한다는 의미는 영원히 종속되리라는 의미요.
제기랄. 바꾸고야 말겠소.
나는 대화를 통한 순응이 아니라 혁명을 꿈꾸게 하고 싶소.
상담을 하다가 학생들에게 일단 적응을 하라고 말할 때,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소.
씨자, 나부터가 적응하기 싫어서 제대로된 직장도 안 갖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학생들한테 그래도 공부는 꾸준히 하라고 말할 때, 속에서 천불이 나오. 적응이 아니라 다 뒤집어 엎으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 말하고나서 수습할 자신이 없어 말하지 못하고 있소.
수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구조론 모임에 가입한 것이기도 하오.
세력을 만들면, 적어도 개인이 어떤 변화를 시도할 때 져야 할 부담이 줄어들 것이기에, 그리고 그렇게 부담이 줄어들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제도권에서 탈주하여 그야말로 꿈을 꾸고 혁명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오.
꼴통들 가려내는 역활은 오세님이 맡으시구랴.
아카데미 수료증이 있어야 할게요.
아니면 등록증이라도..^^
답답한 상황이 너무나 많으오. 특히 사교육이 불을 뿜고 있는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항상 공부나 열심히 하는 것은 아무쓸모도 없다라고
말할때마다 혹시나 짤리지 않을까 조금 걱정은 되오만.. 신대륙으로 가기 위한 발걸음이기에 당당하오.
사회적 모순이 모순적인 가족을 만들고, 모순적인 가족이 모순적인 개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아마 대부분의 상담자들도 알고 있을거요. 그러나 가족이나 사회는 개인적인 상담으로 어쩌지 못할만큼 복잡한 역학관계에 맞물려 있으므로, 만만한 개인이나 바꾸자.. 이런게 상담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 아닐까 생각해보오. 가족이나 사회를 제외한 개인상담이 별 효과가 없음을 알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겠소.
문제는 개인속에 들어찬 사회에 대한 무력감을 어떻게 분쇄할 것인가로 압축되어야하오. "나 혼자서는 어쩔 수 없어. 사회가 만들어놓은 이 지랄같은 정글의 법칙에 굴복하는것 외에는.." 모든 학생, 부모, 선생, 상담자들의 마음을 가득채우고 있는 이 굴복을 분쇄하지 않는한 어떤 교육도 상담도 소용없을거요. 소용없는걸 알지만 생존을 위해서 학생과 내담자들을 이용하는 가짜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순간 소설가 김훈(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둥)처럼 늙어있소.
개인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 모순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도 물론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지만, 그 다음이 중요하다고 보오. 그래서 어쩌라고? 그따위 썩어빠진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살라고? 이것이 젊은이들을 분노케하고 좌절케하는 어른들의 썩은 이데올로기요. 벌레가 끊임없이 위에서 공급되는 것에는 눈을 감고, 당장 썩은 부위만 도려내겠다는 심산이오. 이것은 주어진 인생동안 나만 무사히 살아내면 그뿐이라는 닭대가리 발상이오. 이렇게 비굴하게, 모순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른들의 눈이 썩은 동태눈처럼 변한것은 아닐까 생각했소. 늙어도 초롱초롱한 눈빛이 있소.
뛰어난 심리분석가들은 한 사람의 개인사를 모두 분석해서 방대한 데이타를 보여줄수도 있소. 그러나 그 데이타가 사람을 바꾸지는 못하오. 온갖 적응훈련도 지속적인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는한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마오. 방법은 외부로 반격해 들어가는 것 뿐이오.
반격하려면 적에 대한 정확한 지형정보를 가져야하오. 사회적 지도, 역사적 지도, 철학적 지도.. 물론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구조론적 지도가 있어야하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실탄을 확인해서 가장 유리한 포지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야하오. 다행히 지금 사회에는 인터넷, 모바일, IT라는 신무기, 신사회가 건설되어 있어서 끼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소. 아래에서 적응하지말고 위로 개척하는 삶이어야 하오. 이것은 현대의 많은 개척자들(빌게이츠, 손정의, 스티브잡스 등등)에 의해 증명된 삶이오.
계속적인 성공사례가 개척정신을 자극하게되오. 기득권자를 뛰어넘는 사람은 적응자가 아니라 개척자요. 개척의 성공사례를 지속적으로 발굴해서 아이들을 자극해야하오. 이것이 심리상담가를 비롯한 모든 교육자들의 몫이오. 병원이나 학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이런 신개념을 도입하기는 거의 불가능할거요. 몇 년간 경험을 쌓다가 일찌감치 구조심리상담연구소를 세워서 새로운 상담계의 지형을 만드는게 빠를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