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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831 vote 0 2016.03.23 (17: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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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진실로 아는 것이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 이 말을 조금 안다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도덕적 훈화로 여기면 초딩이다. 공자는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공자는 귀신이나 초자연현상 혹은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농삿일이나 집짓기와 같은 민초들의 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이 점이 각별하다.


    사람들이 귀신을 지어내며 곧잘 종교적인 도피에 빠지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로 아는 자만이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태연할 수 있다. 모르면 곧 거짓을 지어내고 이야기를 짜맞추는게 인간의 타고난 본능인데 공자는 그것을 극복한 것이다. 극기복례라 하겠다.


    알아야 하는 것은 ‘일’이다. 그러나 일은 원래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일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므로 백퍼센트 내가 결정하지 않는다. 기수가 말을 길들이는 것과 같다. 반은 내 마음이고 반은 말 마음이다. 말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말을 모르는 사람이다. 말을 탈줄 아는 것이 말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앎을 넘어선 다른 이야기가 된다. 미리 말과 친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 이런 소리나 하는 자는 멍청한 녀석이니 코를 때려줘야 한다. ‘모르는 것이 아는 것이다.’ 하는 사이비 명상파들도 오백 방 맞고 정신차려야 한다.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아는게 아니다.


    깨달음은 앎을 넘어 더 높은 층위에 있다. 앎 위에 일 있다. 앎은 아는 것이고 일은 하는 것이다. 그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결따라 가지, 앎따라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단 일을 벌여갈 뿐이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일을 벌인다.


    그렇다. 현학적인 지식자랑 필요없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공자의 이 말은 지식이 부족한 자로에게 특별히 던져준 말이다. 뒤늦게 입문한 자로가 중년의 나이에 거문고 연주를 배우고, 시경의 시 300수를 외우기는 무리다. 이미 머리가 굳었다. 동문들이 자로를 비웃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다면 일의 원리에 의지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정리하자!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용기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공자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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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묻기를
    "왜 정치를 하지 않는가? "
    공자 가로되
    “서경에 이르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우애로 대하면 그 안에 정치가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그것이 정치를 하는 것인데 어찌 따로 정치를 한다고 할 것인가."


    공자는 계몽주의자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먼저 개개인의 질을 우수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육으로 가능하다. 곧 계몽주의다. 질 다음에 입자다. 리더를 중심으로 의사결정단위를 만들어야 한다. 일은 복제, 조합, 연출된다. 먼저 작더라도 하나의 모범을 성공시키고 다음 그것을 복제해야 한다. 가족 안에서 정치를 성공시키고 그것을 복제하면 된다. 곧 가족주의다.


    가족주의가 아니면 부족주의다. 부족이라면 작아도 구성원이 100명을 넘는다. 부족 구성원 수백 명을 혼자 상대하는 마인드로 살아가면 종교적 열정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은 종교, 정치, 문화로 인생을 대한다. 부족의 종교는 백명 이상, 가족의 정치는 열명 안팎, 개인의 문화예술은 한명이다.


    정치의 발전은 의사결정단위의 규모를 줄여가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가족주의도 무리고 개인주의가 알맞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에 의지해야 한다. 가족주의로 가면 필연 부패한다. 마초 가부장이 가족 위에 군림하기 위해 공공의 재산을 빼돌려 가족들에게 특혜를 베풀기 때문이다. 공자의 시대인 2500년 전 당시의 사회상으로는 부족주의를 깨는 가족주의 보급이 절실했다. 부족주의로 가면 다수의 이목을 끌기 위해 센세이션을 일으키려 한다. 각종 종교적 퇴행행동을 하게 된다. 마녀사냥이나 매카시즘이 그러하다.


    경쟁자의 숫자가 적어야 한다. 소년은 100 대 1이다. 성적표를 받아도 석차가 100명 중에서 평가된다. 취업을 해도 100대 1의 관문이다. 청년은 10 대 1이다. 연애를 해도 10명 안밖에서 경쟁된다. 승진을 해도 10명 안에서 비교된다. 장년은 1대 1이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다.


    자식을 거느리고 부하를 이끌게 되면 더 이상 외부에 비교될 상대가 없다. 대신 내부에 책임질 식구가 생긴다. 이 때는 문화적인 방향으로 출구가 있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가야 한다. 무엇인가? 인생은 소년≫청년≫장년으로 갈수록 경쟁단위가 작아진다는 거다. 어떤 것이든 성장한다는 것은 그 경쟁단위를 작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소년에서 청년, 장년으로 갈수록 작아지고, 종교에서 정치, 문화로 갈수록 작아지고, 부족에서 가족, 개인으로 갈수록 작아진다. 공자는 경쟁단위를 작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현대사회라면 공자가 강조한 가족주의보다 더 작게 만들어야 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아직도 가족주의에 매몰되어 있지만 우리는 개인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이라면 아직도 철지난 애국주의에 매몰되어 있는데 이는 부족주의라 하겠다.


    종교적 의사결정으로는 안회가 만인 중에 돋보이고, 정치적 의사결정으로는 자공이 열명 중에 돋보이고, 문화적 의사결정으로는 자로의 용맹이 돋보인다. 인간의 의사결정은 타자와의 대칭을 따른다. 홀로 진리와의 일대일을 추구하면 예술, 교양, 매너, 에티켓, 예의를 찾게 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기려고 하면 정치적 위세행동이나 서열행동을 하게 되고, 만인의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면 종교적 열정행동을 하게 된다. 나쁜 쪽으로 가면 마녀사냥이나 매카시즘과 같은 부족민 특유의 종교적 퇴행행동을 하게 된다. 부족 안에 종교가 있듯이, 가족 안에 정치가 있다. 개인 안에는 예술이 있다.


    가족 안에는 형과 아우의 서열이 있다. 가족 중의 최연장자에게 먼저 정보를 전해야 한다. 내무반이라면 어떤 정보든 짬밥이 높은 병장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 이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이런 기본이 안 되므로 진보가 선거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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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어찌 알고 받아들이겠는가. 수레에 마구리가 없고, 바퀴에 연결고리가 없다면 어떻게 굴러가겠는가.”


    의가 있어도 인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고, 예가 있어도 의가 없으면 틀어지고 만다. 공자는 ‘일의 우선순위’로 일이관지하였다. 어떤 일이든 사전 준비절차가 필요한 법이다. 공자는 임금의 의전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에 특히 민감했다.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일에 착수하기 전에 먼저 만나서 인사하고 소개하여 친해져야 한다. 수레의 마구리와 바퀴의 연결고리로 서로의 마음을 든든하게 연결해 두어야 한다. 신의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두텁게 해야 한다. 일은 그러한 사전조치 다음에 착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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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이 묻기를
    "십세十世, 곧 수 백년 후의 일을 알 수 있는가?"
    공자 가로되
    "은이 하의 예를 따랐고, 주가 은의 예를 이었으니 그 손익을 알 수 있다. 주의 예를 이어간다면 100세 이후라도 알 수 있다.


    일의 기승전결 구조를 알면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일은 준비, 시작, 결정, 진행, 완성된다. 예법에 있어서 하의 준비, 은의 시작, 주의 결정으로 보면 공자가 맡고자 한 일의 다음 단계는 진행이다. 공자가 예를 완성하였다면 왕이 1백번이나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법칙이 있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떠올릴 수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역사는 다섯 단계로 발전한다. ‘량의 시대’인 고대의 농경, ‘운동의 시대’인 중세의 말과 근세의 항해술, ‘힘의 시대’인 근대의 산업화, ‘입자의 시대’인 현대의 전자화 그리고 ‘질의 시대’인 미래의 인공지능의 순으로 발전한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문명은 식, 의, 주, 차, 여가의 순으로 발전한다. 량의 식, 운동의 의, 힘의 주, 입자의 차, 질의 여가다. 먹는 것은 식량이니 량이고, 운동은 돌아다녀야 하므로 옷이 필요하고, 힘은 가족들의 힘을 빌리니 가족을 결집할 집이 필요하고, 입자는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차가 필요하고, 최후에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아야 하므로 즐길 수 있는 여가가 필요하다.


    고대나 중세라도 왕과 귀족은 이미 질의 단계 곧 ‘여가’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 다만 그것이 일반화 되는 것이다. 노예는 식, 평민은 의, 중산층은 주, 상류층은 차, 왕은 여가를 누린다. 고대나 중세에 자동차는 없어도 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있다. 마차가 있거나 가마가 있다. 그러므로 큰 틀에서 역사는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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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면 아첨이며, 의義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제사는 여러 사람을 한 자리에 모으는 수단이다. 마녀사냥과 같은 부족민의 종교행동이 그러하다. 오늘 날 제사는 국가의 소임이다. 올림픽 경기나 국가기념일도 일종의 제사행동이다. 미국이 달나라에 사람을 보낸 것도 일종의 제사행위다. 왕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으므로 미국이 인류의 왕행세를 한 것이다.


    사람을 모으는게 중요하다. 학생은 학교에 모으고, 노동자는 일터에 모으고, 병사는 부대에 모으고, 시청자는 TV로 모으고, 네티즌은 인터넷으로 모으고,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모은다. 학생의 소임은 공부가 아니라 학교에 모이는 것이다. 모여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인류의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공부다. 부족민이 항상 분열하는 이유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교육은 지식을 머리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와 연결되어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병사는 외박를 나가도 위수지역 안에 있어야 한다. 적과 대치하여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병사의 임무다. 다만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으면 된다. 더 이상의 오버는 필요없다. 학생은 공부하고 병사는 전쟁하고 뭔가를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은 의사결정으로 연결하고 병사는 긴장상태로 연결하는 것이 진짜다. 그것이 의다. 반드시 연결된 상태에서 의사결정해야 한다. 만약 밀실에서 야합한다면 그것이 설사 유익한 결정이었다 해도 그것은 불의다.


    그렇게 인류의 중심과 연결을 유지한 상태로 의사결정이 되었다면 곧 실행해야 한다. 새로운 소식은 전파해야 하고, 새로운 문화는 창의해야 하고, 새로은 트렌드는 개발해야 한다. 생명은 숨쉬어야 하고 사회는 의사결정의 에너지를 순환시켜야 한다. 거기에는 용맹이 필요하다.


    제사가 종교행동이라면 의義의 실행은 정치행동이다. 일은 종교≫정치≫문화의 순서다. 연결≫의사결정≫실행이다. 제사는 종교로 사람을 연결하고, 의는 정치로 그 연결을 따르며, 불의는 그 연결을 끊는다. 그러한 연결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사는 몸을 던진다.


    안중근 의사는 어떤 일본인을 쳐죽이려고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연결된 마음이 끊기지 않게 하려고 쏜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어떤 일본인을 살해하려고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라 연결된 조선인의 마음을 일본인이 끊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의다. 종교 혹은 철학의 인仁은 사람을 연결하고 정치의 의義는 그 연결을 유지하며 문화의 예禮는 그 연결된 각각을 꽃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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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편 팔일八佾


    공자가 계씨를 평하되
    “정원에서 팔일무를 베푸는 정도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천자는 8렬, 제후는 6렬, 대부는 4열, 사는 2열이 예법이라 한다. 계씨는 대부 주제에 8*8, 곧 64명의 무용수를 썼으니 감히 천자를 흉내내는 위세행동을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결혼식에 외제차 수십대로 거대한 행렬을 만들어 위세를 부린다. 한국인들은 2대까지 지내는 제사를 4대를 넘어 8대까지 지내곤 하니 부족민의 위세행동이다. 소인배 짓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며 곧 다른 사람이 심리적으로 자신을 조종하게 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시선의 노예가 된다. 망한다.


    공자가 예법을 강조한 것은 ‘위세를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제압하려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거꾸로 알아듣는다. ‘위세를 부려서 단박에 제압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유가들은 커다란 관을 쓰고,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임금의 팔자걸음을 모방하니 이는 사람을 제압하려는 소인배 짓이다. 그것을 예법으로 착각한다.


    공자 당대부터 그랬다. 공자는 평민신분인 안회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고 지시했으나 제자들은 따르지 않았다. 안회의 장례는 분에 넘치는 것이 되었다. 제자들의 위세행동을 공자도 막지 못했다. 고조 유방은 막사에서 유가들의 우스꽝스런 행동거지를 놀려먹는 유머를 구사하여 좌중을 웃기곤 했다. 겉멋에 빠져 타락한 유가를 혐오한 것이다. 그러나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궁궐의 질서가 문란하자 별 수 없이 유가를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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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경에서 말하길, ‘제후들이 도우니 천자는 멋지도다’ 하였거늘 어찌 노나라 세 대부의 사당에서 이를 쓰는가?”


    노나라의 권력자였던 세 대부 집안이 천자의 노래를 집안 제사에 쓰는 무례를 저지른 것을 비판하고 있다. 제사의 목적은 사람을 모아 위세를 부려서 심리적으로 제압하는데 있다. 역시 개인의 위세행동이 서로간의 긴밀한 연결상태인 의義를 깨뜨린다는 의미다.


    미국인이 헐리우드 영화에 구태여 성조기를 집어넣는 것도 일종의 위세행동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미국인의 그러한 오만한 행동을 싫어한다는거 알면서 일부러 그런다. 한국과 대만의 독자를 의식하는 일본 만화가들은 하지 않는 짓이다.


    롯데가 100층 건물에 태극기를 박아놓은 것이나, 가수 김장훈이 주제넘게 독도캠페인을 하는 것도 일종의 위세행동이다. 의를 깨뜨려 서로간의 연결을 긴밀하지 못하게 한다. 국가의 대표성과 관련한 행동은 극도로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소인배가 대표성을 획득하는 절차없이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


    서양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어깨를 부딪히지 않는 것이 예禮라고 여긴다.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배우고 방문했다가 경악하게 된다. 한국인은 어깨치기는 기본이요 등을 마구 밀어댄다. 예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서구인과 일본인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예요, 한국에서는 위세부리지 않는 것이 예다. 제사를 요란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예다. 호화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이 예다. 부조금을 받지 않는 것이 예다. 일체의 남 기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예다. 예의 진짜 의미를 알고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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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인仁이 없다면 예禮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이 인仁이 없다면 악樂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에너지원’으로는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와 니체의 ‘권력의지’가 알려져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의지’를 보탤 수 있다. 노자의 도교는 불노장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쾌락의지’에 가깝다. 공자의 입장은 좀 복잡하다. 인仁이 종교적 존엄의지라면, 예禮는 정치적 권력의지에 가깝고, 악樂은 문화적 쾌락의지에 가깝다.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는 이 모두를 포괄한다.


    쇼펜하우어가 화두를 던졌고, 니체가 구체화 했으며 공자가 완성한 것이다. 옳게 계승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반대편에는 헤겔과 칸트의 합리주의가 있다. 그들은 인간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기제를 두고 플라톤의 이데아나 종교의 영혼이나 혹은 신이 인간에게 준 무언가로 보았다. 퇴계의 이원론도 이에 가깝다. 말은 합리주의를 주장하나 종교를 끌어들여서 우습게 되었다.


    구조론의 정답은? 구조론은 모든 근거를 열역학 2법칙에서 찾는다. 에너지의 법칙이다. 이데아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절대정신도 아니고, 신의 섭리도 아니고, 이理도 아니다. 동물의 생존본능도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생존의지도 아니고, 니체의 권력의지도 아니고,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의지도 아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의 동기는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에너지 효율성이다. 인仁이 지知에 앞서고, 의義가 그 다음이며 신信이 따르고 예禮에 마지막이다. 기승전결로 보면 기가 앞서고 승이 잇고 전이 따르고 결이 마지막이다. 에너지 낙차가 결정한다.


    일의 순서개념이 중요하다. 바둑을 두어도 포석이 먼저다. 끝내기가 마지막이다. 포석이 없으면 전투가 소용없고 끝내기도 소용없다. 전략이 없으면 전술도 소용없다. 인간을 지배하는 근본은 마땅히 자연에서 찾는 것이며, 그것은 열역학 2법칙이고, 인간사회에 반영되면 먼저 집단을 결속하는 인仁이며, 다음 정치적 리더십이 지知, 팔로워십이 의義, 의를 지속하면 신信, 표현하면 예禮다.


    공자의 구분법으로 보면 종교적 인仁, 정치적 예禮, 문화적 악樂이다. 물론 언어의 의미가 넓으므로 다른 뜻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맥락으로 봐야 한다. 예가 궁중으로 들어가서 정치일 때도 있고 사회로 가서 문화일 때도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건 맥락에 따라 반듯한 순서가 정해진다는 거다.


    개척자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맨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교회를 짓는다. 그것이 인仁이다. 그 교회에는 장애인도, 노약자도, 거지도, 여성도, 이방인도 들어올 수 있으므로 인이다. 만약 흑인이라 해서 문을 닫아건다면 인仁이 아니다. 인이 개척민 집단의 생존확률을 높인다. 생존의지다.


    그 다음은? 지도자를 뽑고 그 지도자를 따른다. 그것이 의義다. 대의명분이라고 한다. ‘대의’는 진리라는 리더를 따르는 팔로워십이다. 여기서는 예를 말했지만 다르지 않다. 공자의 예는 주로 궁중예법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정치적인 예에 해당하고 의와 가깝다. 그 다음에 개인의 악樂이다. 무엇인가? 전체에서 부분으로 내려온다는 말이다. 먼저 전체의 생존동기를 찾고 다음 개인의 삶의 동기를 찾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먼저 전체와 나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인류 전체 혹은 국가 전체 혹은 조직 전체와 나의 관계설정이다. 그것이 존엄의지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존엄의지 다음에 오는 것이다. 먼저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설정한 다음에 그 관계 안에서 서열을 끌어올리려고 한다. 그것이 권력의지다.


    먼저 신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회사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국가가 나를 거지취급 한다면? 회사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그 국가나 회사에 충성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관계설정이 먼저다. 존엄의지가 먼저다.


    삶의 근원의 기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다. 집단과 나와의 관계설정에서 찾는다. 생존의지든 권력의지든 쾌락의지든 관계가 정해진 다음의 일이다. 묻노니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세상과 어떤 관계인가? 군君인가 아니면 졸卒인가? 장기를 두어도 궁宮이 있고 병兵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aDSC01523.JPG


    논어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점점 더 분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레벨:5]vandil

2016.03.23 (17:37:19)

좋은 소식일 겁니다^^

[레벨:2]택후

2016.03.24 (08:58:06)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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