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와 도덕경 그리고 중용을 ‘구조론’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논어는 분량이 많아 일부만 발췌하였고, 도덕경은 전문을 살폈고, 중용은 자사가 쓴 뒷부분의 군더더기를 잘라냈다. 구조론의 관점을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므로 원문의 정확한 뜻을 알고자 하는 분에게는 이 작업을 권하지 않겠다. 도덕경에 ‘굽은 것이 도리어 곧다.’고 했으니 때로는 직역이 오히려 오역이 된다. 2500년 전이라면 어휘의 숫자가 절대 빈곤했다. 추상개념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었다. 오해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오해할 바에는 빈약한 텍스트에 의존하지 말고 차라리 그들의 마음 속으로 쳐들어가서 그들이 말하고 싶었으나 옳게 말하지 못한 본심을 파헤치는 것이 더 나을 터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일단 말이 많아진다.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스스로 말을 복제해내기 때문이다. 만물은 서로 엮여 있다. 그 엮여있음을 쓰는 것이 깨달음이다. 엮여 있으므로 하나를 건드리면 모두가 반응한다. 언어가 언어를 물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줄줄이 딸려나온다.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했고, 자공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안다고 했다. 안회는 꼬리를 제대로 물었고, 자공은 끄트머리를 조금 물었다. 논어가 하나를 말하면 구조론은 열을 해석한다. 구조론은 공자를 넘어선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꼬리를 넘어 몸통까지 물었다. 누구든 자신의 언어를 획득하면 머리를 쥐어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패턴을 복제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자나 노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수 있다. 그들 역시 자기 언어의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그 패턴의 파악이 중요하다. 어떤 ‘사유의 모듈’을 쓰는지 알아채야 한다. 모듈을 알면 공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말이 그렇게 나와버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노자는 저절로 쏟아져버린 말과 이를 수습하기 위해 둘러댄 말의 불일치가 심하다. 말해놓고 말을 주워담는데 많이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즐겁다. 가공에 실패한 날 것이 더 신선하다. 논어와 도덕경에 대해서는 많은 해설서가 나와있으나 본질인 ‘사유의 모듈’을 파악하지 않고 지엽적인 자구해석에 매달려 있더라. 부질없다. 공자와 노자가 쓰는 사유의 모델을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모듈은 미완성이다. 부족한 부분은 채워서 말하는게 맞다.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헤아려야 한다. 필자의 작업은 공자나 노자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다만 구조론을 알리는 수단으로 논어를 이용할 따름이며 논어와 도덕경을 알리려는 뜻은 없다. 이 작업은 논어와 도덕경을 소재로 삼은 나의 작업이다. ‘언어도단’이라는 말이 있다. ‘언어의 도’를 자른다. 많이 잘려져 있다. 통치술로 이용해 먹으려는 역대 제왕들이 잘라먹었다. 공자와 노자를 팔아먹는 제자들 역시 아전인수를 구사하여 서슴없이 칼질을 했다. 증자가 가장 심했다. 껍데기만 남았다. 복원해야 한다. 다만 ‘언어도’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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