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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721 vote 0 2016.02.26 (13:03:45)

     

    도는 언어에 있다


    공자 가로되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 했으니 도는 가까운 곳에 있다. 언어가 가장 가깝다. 구조론은 언어의 완전성에서 구한다. 언어가 완전하면 소통하고, 불완전하면 막힌다. 그 ‘소통의 완전성’에서 숨은 패턴을 발견하면 깨달음이다. 어렵지 않으니 한국말을 똑바로 하면 깨달음은 이미 그 안에 있다.


    언어는 동사가 모여 명사가 된다. 모든 언어는 일단 동사로 출발한다. 움직이지 않아도 인간에게 보였으면 동사다. 인간의 보는 행위가 곧 동작이기 때문이다. 동사에 동사를 곱하면 명사가 된다. 보는 행위의 동사와, 그것을 가리키는 행위의 동사가 합쳐서 명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사는 동사의 중첩이니 언어의 본질은 여전히 동사다. 명사와 명사가 중첩되어 주어가 되고, 주어와 주어가 중첩되어 명제가 되고, 명제와 명제가 중첩되어 담론을 이룬다. 그 과정에는 계속 대칭을 따라간다.


    층위가 상승하여 근원에 도달한다. 근원은 위치 에너지의 동動이다. 위치에너지는 확산을 수렴으로 바꾼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 언어는 동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끝난다. 단어의 동에서 시작하여 이야기의 동으로 완성된다.


    민民 위에 사士가 있다. 사 위에 귀족 있고, 귀족 위에 왕王 있다. 왕 위에 다시 민이 있다. 그 민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니 곧 민중民衆이다. 여기서 집단의 의사결정이라는 정치의 사건은 완결된다.


    언어가 동으로 시작하여 동으로 끝나듯이 의사결정은 민에서 시작하여 민으로 끝난다. 언어는 동사의 동으로 시작하여 담론의 동으로 끝나고, 의사결정은 개인의 민으로 시작하여 민중의 민으로 끝난다. 민은 확산방향으로 존재한다.


    수렴방향으로 바뀌어 위치에너지를 생성하면 민의 집단이니 바로 민중이다. 거기에는 에너지가 걸려있다는 점이 다르다. 담론에는 동사에 없는 위치에너지가 걸려있다는 점이 다르다.


    동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끝나고, 민에서 시작하여 민으로 끝나니 처음과 끝이 호응된다. 호응되면 완전하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을 때 그대가 답하여 호응하면 의사소통은 완전하다. 시작과 끝이 같으므로 순환이다.


    여기서 노자는 만물의 순환을 본다. 그러나 에너지로 보면 다르다. 이야기는 담론으로 시작하여 동사로 끝난다. 정치는 민중으로 시작하여 개인으로 끝난다.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 성립한다. 에너지로 보면 만물은 순환하지 않는다.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순환을 일으키는 대칭은 가운데 있고 정상에 없다. 맨 위와 맨 아래는 대칭이 없다. 질과 양은 대칭이 없다. 입자는 항상 반대입자가 있고, 힘은 항상 반대힘이 있고, 운동은 항상 반대운동이 있으나, 반대질은 없고 반대량도 없다.


    있다 해도 계 바깥에 있고 계 안에 없다. 사건 안에 없다. 그 비대칭을 보아야 한다. 노자의 모든 역설은 일의 중간단계에만 성립한다. 먼저 만물의 순환을 보고 다시 그 순환고리 안에서 결코 순환하지 않는 에너지의 일방향성을 보면 깨달음이다.


    대칭에 따른 순환의 가역성이 열역학 1법칙이면, 순환하지 않는 비가역성은 열역학 2법칙이다. 만물은 순환하는 대칭과, 그 대칭을 깨는 엔트로피로 되어 있다. 버스는 노선을 따라 순환하나 그 일은 순환하지 않는다.


    노자는 버스의 순환을 보았고 공자는 순환하지 않는 일의 전개방향까지 보았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햇볕은 태양에서 지구로 올 뿐이며 그 역은 없다. 에너지는 중앙에서 변방으로 간다. 역사는 변방이 중앙을 치지만 그 역시 키가 자라서 중앙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국가의 중앙 위에 더 큰 인류의 중앙이 있기 때문이다.


    동사만 보고 명사를 못 보는 데서 실패가 있다. 인간의 마음이 동사에만 주의가 쏠리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에 대꾸하려는 의도가 앞서면 그렇게 된다.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지 말고 ‘자기 언어’를 완성시켜야 한다. 동사 앞에 명사를 세워야 한다. 술어부 앞에 주어부를 세워야 한다.


    진술 앞에 전제를 세워 명제를 이루고, 명제 앞에 반복문 앞에 조건문을 세워서 담론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추론이다. 추론을 마친 다음에 비로소 말해야 한다. 이는 말할 권리를 획득하는 절차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발언권이다. 자기 언어를 얻은 다음에 말하기다.


    공자는 임금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였으나 시골에서 주름잡는 향원鄕原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다. 정치판이든 시민단체든 문화예술계든 그 분야의 바닥이 있고 패거리가 있고 터주대감이 있는 법이다.


    그 바닥 패거리가 향당鄕黨이면 터주대감은 향원鄕原이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이 향당에 딱 들어맞는다. 그렇다. 언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천하의 언어에서 왕의 언어로, 귀족의 언어로, 사의 언어로, 민의 언어로 내려와야 한다. 그 천하의 언어는 다시 민의 언어가 모여서 이루어진다.


    공자가 향당에서 말한다면 민으로 사를 치는 격이니 엔트로피에 맞지 않다. 순리를 거스르는 셈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고향에서 말하지 않았고, 노무현도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김기덕도 충무로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명박근혜는 고향에서 이쁨받고 있지만 가짜다. 천하의 언어를 얻은 다음에야 발언권이 있다. 민의 언어를 결집해야 천하의 언어가 얻어진다. 천하인이 되어 에너지를 이루어야 한다.



   aDSC01523.JPG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아는 순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수레에 물건을 싣고 운반합니다. 물건을 수레에 실을 수 있으나 수레를 싣지 못합니다. 언어는 의미를 운반하는 수레입니다. 의미를 언어에 실을 수 있으나, 언어 그 자체를 언어에 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언어를 언어에 실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싣고 운반하는 자동차가 있듯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언어에 언어를 실으면 깨달음입니다.

 


[레벨:10]다원이

2016.02.27 (14:05:26)

언어는 동사가 모여 명사가 된다. 모든 언어는 일단 동사로 출발한다. 움직이지 않아도 인간에게 보였으면 동사다. 인간의 보는 행위가 곧 동작이기 때문이다. 동사에 동사를 곱하면 명사가 된다. 보는 행위의 동사와, 그것을 가리키는 행위의 동사가 합쳐서 명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동렬님, 이부분에 대해 부연설명 부탁드립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6.02.29 (10:44:43)

말 그대로입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는 건지. 


다 설명되어 있잖아요.

예컨대 명사 '사과'라고 하면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뜻과, 내가 그것을 '가리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의 명사에는 두 개의 동사가 숨어 있다는 거죠.


두 번 말하기 귀찮으니까 인류가 명사를 발명한 거죠.

원래 모든 단어는 동사로 시작됩니다.


바람이 불면 부르르르 소리가 납니다. 

입으로 불어도 부르르르 소리가 나죠.


부르르르르>불다>불음>바람 식으로 동사가 명사로 발전하는 겁니다.

명사 바람에는 '불다+있다'라는 두 가지 동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부는 것이 있는 것'이 바람입니다. 

[레벨:10]다원이

2016.02.29 (14:10:3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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