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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162 vote 0 2016.02.22 (21:38:00)

 

      
    중용中庸의 중中이 반드시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中은 중복되어 있으니 겹친다는 의미가 있고, 무겁다는 뜻도 있다. 손가락 마디의 가운데 두터운 부분이 중中이다. 밸런스의 원리에 따른 균형감각이 중용이다. 굳이 말하자면 중中은 천칭저울의 축이고 용庸은 평상平常이니 곧 밸런스다. 중용은 축을 움직여 밸런스를 잡는다는 뜻이 된다. 공자의 논어 한 대목을 빌리자.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과격한 사람이나 고집스런 사람과 함께 할 일이다. 과격한 사람은 진보적이고, 고집스런 사람은 원칙을 지킨다.”


    깨달음의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 좋지만 정의당과 같은 진보주의자나 표창원과 같은 원칙주의자도 나쁘지 않다. 눈치를 보며 그때그때 입장을 바꾸는 자가 가장 나쁘다. 올바른 결정은 당연히 좋고, 틀린 결정은 검증한 후에 오류를 바로잡으면 된다. 우물쭈물 하며 시간만 끌고 있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된다. 그 사이에 사람이 죽어나간다. 최악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중용은 일의 우선순위에서 앞서는 것이다. 사건의 원인측이 중용이며, 결과측은 중용이 아니다.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것이 중용이며 결에 서는 것은 중용이 아니다.


    기는 다음에 올 승과 얽혀 있고 결은 얽혀 있지 않다. 기는 얽혀 있으니 다른 사건에 파급되므로 군자는 중용을 실천하여 신중하다. 결은 얽혀 있지 않으니 파급효과가 없으므로 소인은 기탄이 없다. 운전기사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살펴야 하므로 중용을 행한다. 승객은 자기 자신만 챙기면 되므로 중용을 행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의 반대는 ‘쓸모’다. 보통은 ‘모퉁이’를 쓴다. 송곳이나 칼이나 망치나 돌출된 귀퉁이를 쓴다. 구석기 시대라면 돌을 깨뜨려서 날카로운 모퉁이를 ‘쓸 모’로 삼는다. 중용은 반대다. 바퀴의 축처럼, 혹은 됫박처럼 돌출된 모퉁이가 아니라 두텁고 혹은 움푹한 가운데를 쓴다.


    구조론으로 치면 상부구조는 중용을 쓰고 하부구조는 모퉁이를 쓴다. ‘선중용 후쓸모’다. CEO는 중용을 쓰고 실무자는 쓸모를 쓴다. 합리주의는 중용을 쓰고 실용주의는 쓸모를 쓴다.


    진보는 외교라는 중용을 쓰고 보수는 전쟁이라는 쓸모를 쓴다. 자기 자식에게는 사랑이라는 중용을 쓰고, 남의 자식에게는 폭력이라는 쓸모를 쓴다. 의사결정을 쓰는 것이 중용이고 그 결정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것이 쓸모다.


    노자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는 것'이라 했다. 이런 식의 말장난이라면 언어가 비루한 것이다. 바보들에 의해 나쁜 쪽으로 악용될 수 있다. 당당하지 못한 언어를 쓰면 반드시 부작용이 있다.


    ‘쓸모있다’는 표현은 동사다. 중용은 명사다. 명사로 말할줄 알아야 한다. 동사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상대성이 성립하므로 헷갈린다. 소인은 헷갈리는 단어를 좋아한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다.


    군자는 손잡이를 쓰고 소인은 칼날을 쓴다. 군자는 원재료의 맛을 쓰고 소인은 조미료를 쓴다. 군자는 금의 신용을 쓰고 소인은 금의 때깔을 쓴다. 군자는 글로 적을 죽이고 소인은 주먹으로 적을 죽인다. 일의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


    선합리 후실용’이며 중용을 쓸 것인가 혹은 쓸모를 쓸 것인가는 일의 진행정도에 따라 정해진다. 월드컵이 2년 남았을 때는 중용을 쓰고, 이미 시합중일 때는 쓸모를 쓴다. 중용으로 팀을 꾸리고 쓸모로 골을 얻는다.


    바둑을 두어도 포석은 중용으로 하고 끝내기는 쓸모로 한다. 이세돌과 격돌하는 알파고는 끝내기가 강한 대신 포석이 약하다고 한다. 인간은 중용에 강하고 기계는 쓸모에 강하다.



    ###


    천명은 성性, 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 도를 닦는 것이 교敎다.


    자연의 성에서 인간의 도 그리고 사회의 도에서 개인의 교로 연역하고 있다. 자연에서 인간으로 연역하는 전개는 구조론과 같다. 그러나 성에서 도로 연역하고 끝나야 한다. 성에서 도로 가는 논리와, 도에서 교로 가는 논리는 다르므로 이중기준의 오류가 된다. 성이 자연의 진리라면 도는 사회의 진보법칙이다. 교는 그 진보의 실천이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아도 삼가하고 들리지 않아도 조심한다. 도는 지극히 은미隱微하므로 군자는 언제라도 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도는 법칙이므로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수구꼴통이 진보에 역행하지만 인류사의 큰 틀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진보에 기여한다. 알고 똑바로 가거나 모르고 비틀대며 가거나 모두 진보로 가게 된다. 알면 주도하여 가고 모르면 끌려 간다. 알면 즐겁게 가고 모르면 성내며 간다. 결국 법칙대로 간다. 그것이 도다.


    희로애락의 정情을 펼치지 않은 것이 중中이고, 펼쳐서 절도에 맞는 것이 화和이니 중은 천하의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도다. 중과 화를 실행하면 천지가 편안하고, 만물이 생육된다.


    중은 가운데가 아니라, 중복되어 겹쳐진 것이다. 피기 전의 꽃봉오리와 같다. 화는 피어난 꽃송이와 같다. 구조론으로 보면 중은 상부구조, 화는 하부구조다. 중이 의사결정이면 화는 그것을 실행한다. 일의 우선순위로 보면 중이 화에 앞선다. 먼저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계책을 내며 다음 조화롭게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라.


    공자 가로되 

    “군자는 중용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한다. 군자의 중용은 군자이면서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는 것이다.”


    중용은 복잡성complexity과 같다. 구조론의 구조構造와도 같다. 중中은 밸런스의 축이고 용庸은 밸런스다. 중용은 저울의 균형이다. 군자의 자리는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울이 기울어 심판이 공정하지 않으면 파급효과가 있듯이, 군자의 행동은 많은 사람에게 직간접의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군자는 윗사람이면서도 상황에 맞게 처신하고, 소인은 아랫사람이면서도 거리낌없이 행동한다.


    “중용은 지극한 것이니, 실천할 줄 아는 이가 적다.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똑똑한 자는 지나치고 멍청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는 어진 자는 지나치고 못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 중에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이가 없지만 맛을 아는 이는 드물다. 도가 행해지지 못한다.”


    중용은 가운데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론은 먼저 중심을 이루고 다음 그 중심을 움직여 계를 통제한다. 무질서한 군중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 유체와 같은 상태을 연출하면 축이 성립한다. 그 축을 움직이면 계가 통제된다. 그냥 중간에 서 있으면 곤란하고 중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바둑판의 한 가운데 천원은 중심이 아니다. 내편과 상대편의 대마가 어우러져야 밀당의 중심이 생긴다. 중심은 그냥 있는게 아니라 선제대응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중앙을 차지하고 가만이 버틸게 아니라 움직여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고수만이 중용을 실천할 수 있다.


    조용한 사회에 이슈를 던져서 공론을 크게 일으키면 중용이 생성된다. 디자이너가 계절별로 유행을 만들듯이, 개그맨이 유행어를 히트시키듯이, 가수가 앨범을 내듯이 끝없이 에너지를 불어넣고 펌프질을 해서 중용을 이끌어야 한다. 태풍의 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집단이 활력을 얻어 도리어 사회가 안정된다.


    공자 가로되
    “순舜은 큰 깨달음이 있었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말도 살피기 좋아하시고, 악은 숨기고 선은 드러냈다. 양단을 잡아 중간을 백성들에게 썼으니, 이것이 순으로 불린 까닭이다!”


    ‘악은 숨기고 선은 드러냈다.’는 말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사결정했다는 말이다. 무위가 아니라 인위다. 날것으로가 아니라 잘 요리된 상태다. 지식인이 ‘원칙’이라는 방패막이에 숨어 고집을 피우며 막 던지는 예는 많다.


    조중동이 사고를 쳐도 표현의 자유라고 하고, 이명박이 사기를 쳐도 민주주의라고 한다. 지식인이라면 파급효과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지식인이 분위기파악을 못하여 사건의 맥락을 배제하고 기계적인 판단을 일삼는다면 이는 소인배의 면피행동이다. 


    공자 가로되 

    “사람들이 똑똑한 척 하지만 그물이나 덫과 함정으로 몰리고도 피할 줄 모른다. 사람들이 똑똑한 척 하지만 중용을 택하여 한달도 지키지 못한다.”


    인간은 기승전결로 이어가는 일의 흐름에 치인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다. 유권자는 정치인을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어서 떨어뜨린다. 벼슬자리에 태워주면 그것이 흔들기를 위한 전단계의 예비행동임을 모른다. 지지율 올라가면 그게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정말 지가 잘한 줄로 안다. 일은 기승전결로 전개하며 반드시 두 번 흔든다. 두 번의 반전과 역설이 잠복해 있다. 오직 선제대응하는 자만 살아남아 끝까지 간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판을 설계하고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 남이 설계한 판에 낚이면 무조건 당하는 거다.


    공자 가로되
    “안회는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善을 얻으면 꼭 쥐고 가슴에 지니며 그것을 잃지 않았다.”


    중용은 중간에서 눈치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한가지 선이란 곧 한 가지 의사결정원칙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되어가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중용이다.


    강자는 기세를 타면 일이 풀리고, 약자는 기회를 얻으면 일이 풀린다. 중용을 모르는 자는 무작정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부추기려 한다. 약자는 부추겨도 여전히 못하고, 강자를 억누르면 비뚤어질 뿐이다.


    공자 가로되
    “천하를 고르게 할 수 있다. 작록을 사양할 수 있다. 흰 칼날도 밟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용은 불가능하다.”


    중용이 밸런스의 원리임을 설파하고 있다. 극단에 서는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호흡을 맞추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악기를 잘 다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알아야 지휘자가 된다. 지휘자는 곡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남의 곡에 기운을 불어넣어 그것을 자신의 곡으로 재탄생시켜내기다. 깨닫고서야 가능하다.


    자로가 강强을 묻자 공자 가로되
    “남방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관용으로 가르치고 폭력에도 보복하지 않음은 남방의 강함이니 이는 군자의 길이다.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채로 죽어도 좋다는 것은 북방의 강함이니 이는 용사의 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화이불유和而不流이니 무리와 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균형이 강하니 중심에 서서 기울지 않는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옹색해도 변치 않으니 균형이 강하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어도 변치 않으니 강하다. 균형이 강하다.


    화이불유和而不流가 절창이다. 무리와 어울리되 휩쓸려가지는 않는다. 현실정치에 개입하되 세태에 끌려가지는 않는다. 선제대응하여 판을 이끌되 기세에 휩쓸리지는 않는다.


    진정한 강함은 현실도피한 은자의 똥고집 강함이 아니요, 맹목적으로 원칙만 강조하는 3류 지식인의 ‘곤조’ 강함도 아니요, 현실에 참여하여 잘못을 바로잡되 변덕스러운 세태에 떠밀리지 않는 것이다. 선제대응으로 가능하다. 결과에 서면 휩쓸리고 원인에 서면 휩쓸리지 않는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지지율을 보고 행동하면 휩쓸리고 능동적으로 계획을 실천하면 이끌어갈 수 있다.


    공자 가로되 

    “소박하게 행동하거나, 은둔을 하거나 기행을 하면 후세에 유명해지겠으나 나는 하지 않겠다.”


    죽림칠현의 ‘유영劉伶’처럼 벌거벗고 누워있거나, 혹은 달마의 면벽 9년과 같이 은둔행동을 하거나, 혹은 예수의 금식기도와 같은 고행을 하는 등의 괴짜짓을 벌이면 쉽게 유명해 질 수 있으나 이는 소인배의 자아도취이기 쉽다. 대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가식이다.


    죽림칠현도 혜강과 완적이 괜찮았을 뿐 나머지는 은자인척 하면서 실제로는 은자라고 소문내고 우르르 몰려다녔다. 그들이 은둔했다는 산양은 낙양 주변이다. 낙양에 은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들은 출세했다.


    “군자가 도를 받들어 행하되 반쯤 하다가 그만두는데 나는 끝까지 간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되 세상을 피하여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가 없으니, 오직 성자가 그럴 수 있다.”


    ‘끝까지 간다’는 대목에 방점을 찍을 일이다. 보통은 어떤 고매한 인격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한 인격수준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자유다. 죽림칠현처럼 깨달았다며 무애행을 한다. 공자는 다르다.


    공자는 삶의 전체과정을 하나의 ‘일’로 보므로 인생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 까지 계속 간다. 즉 공자는 깨닫기 위하여 깨닫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깨달음은 공자의 목적이 아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깨달음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큰 일을 벌이는 사람이다. 세상을 바꾸는 큰 일을 벌인다. 그러므로 멈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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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용은 평상平常의 중을 쓰는 것입니다. 평상平常은 저울이 수평을 유지하듯 고르고 안정된 것이며, 중은 그 저울의 축을 움직여 판을 장악하고 계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시간으로는 미래를 곱씹어 앞날을 내다보고, 공간으로는 주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오맹달

2016.02.22 (23:44:32)

감사히 읽었습니다. 

1. 중용과 무기탄을 택시기사와 승객으로 비유해주시는 부분은 감탄입니다. 

2. 류준열이 크게 떴다가 안티에 시달리는 것 역시 일단 띄워주고 이제 흔드는 것이 남았군요. 

체를 거르듯 시험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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