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편 옹야雍也 “안회가 학문을 좋아하여 분노를 옮기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지금 안회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자를 듣지 못했다.” 공자의 학문은 단순한 지식의 배움이 아니라 깨달음의 배움이다. 지식이라면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한달만에 다 배워버린다. 재여가 빈둥댄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배우려고 해도 배울만한 콘텐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식은 목간에 씌어졌는데 ‘남아수독오거서’라 하나 요즘으로 치면 단행본 한 두권 분량이다. 논어의 글자 수는 11705자다. 시경과 서경, 예기, 주역을 더해도 20만자다. 한 페이지에 글자가 1천자씩 들어가면 200페이지다. 한자는 내용이 압축되므로 3배는 부풀려야 맞다. 요즘 기준으로 600페이지 정도 배우고 나면 더 배울게 없다. 공자에게 3천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나 부풀려진 숫자이며 공자는 끝내 수제자를 얻지 못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당대에 끊어졌으니 이후 맹자와 주자가 있다하나 깨달음과 멀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저지르자 서경은 완전히 사라져서 한 권도 남아난 것이 없게 되었을 정도다. 책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가는 망하고 한동안은 도교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 “안회는 현명하다. 도시락밥과 표주박물로 누추한 곳에 살면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현명하다. 안회여!” 공자는 제자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기에 열심이었다. 최대 3천명에 이른다는 공자집단의 생계는 벼슬한 제자들의 재정지원으로 유지되었다. 공자 본인도 여러나라로 돌아다니며 임금에게 유세하여 등용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끝내 등용되지 못했다. 공자의 행동은 모순되어 보인다. 조선왕조의 선비들은 나아가 벼슬하기를 자랑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물러나 은거하는 이중행동을 했다. 임금이 불러주기를 바라며 은거쇼를 하는 자도 있었다. 퇴계는 거듭 물러나서 명성을 얻었고, 송시열은 요란한 은거쇼로 명성을 얻었다. 공자가 벼슬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벼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공자가 기용되지 못한 것은 열국의 왕들이 공자를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공자집단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이에 비례하여 공자가 벼슬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벼슬하여 자신의 학문이 정당함을 입증하기보다 수제자를 키워 자신의 사상을 계승시키는 것이 낫다. 공자는 후자를 선택했다. 벼슬을 구할수록 명성은 높아졌고 명성이 높을수록 임금은 불편을 느낀다. 당연히 벼슬길은 멀어진다. 공자는 안회가 자신의 이러한 뜻을 알아채기 바랬다. 벼슬은 당연히 해야 한다.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학문의 계보가 끊기면 의미가 없다. ###
자하에게 이르되 콜롬부스 이후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은 갑자기 눈을 뜨게 된다. 세계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은 부유한 중국과 인도, 아랍에 뒤쳐져 있었다. 가난했던 것이다. 유럽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발견하자 자기네보다 열등한 집단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문명인과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획득한 것이다. 원래는 자기네가 야만인이었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를 신앙하여 천국에 가기를 소망할 뿐이었으나 갑자기 목표가 바뀌었다. “내가 아프리카를 가봤는데 말야. 거기에 야만인이 살더라구.” “왜 야만하지?” “글자를 모르니까 야만하지.” “나도 글자를 모르는뎅?” 곤란해졌다. 이에 계몽주의 사상이 대두된 것이다. “뭐야? 반평균 깎아먹는 자가 너였구나. 당장 글자배워서 야만을 졸업하라고. 너 때문에 우리까지 야만인이 될 수는 없잖아!” 자기네보다 열등한 집단의 존재를 깨닫고 자기네가 우월한 집단임을 증명하기 위해 글자를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 서구 계몽주의 사상이다. 공자가 2천5백년 전에 했던 계몽주의를 그들은 300년 전에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대칭을 통해서만 의사결정할 수 있다. 자신과 비교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학문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공자의 가르침이 서구 계몽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때만 해도 중국이 유럽보다 부유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이 부유해지자 단숨에 공자를 발로 차버렸음은 물론이다. 19세기에 일본이 퇴계의 유학을 배워 단번에 강해졌으나 이차대전의 책임을 퇴계에게 덮어씌우고 걷어차버린 것과 같다. ###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는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도를 통하지는 않는가?” 공자는 일의 우선순위로 일이관지했다. 구조론과 같다. 역시 일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밖으로 나가려면 문을 통해야 하고, 세상으로 나가려면 깨달음을 통해야 한다. 도道를 단순히 인격수양으로 한정하여 받아들인다면 잘못이다. 인격은 속일 수 있다. 낯빛을 가장하고 말을 꾸며서 하는 자는 모르는 사람에게 인격자로 보여질 수 있다. 안철수의 부류들이다. 도는 진리다. 도는 자연법칙으로 존재한다. 마음이 가는 법칙도 같다. 자연법칙과 마음법칙을 일치시키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문을 통하여 나가듯이 훈련을 통하여 나간다. ###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촌사람이고, 문이 질을 이기면 문서를 기록하는 사람인 사史이니 문과 질이 어우러져야 군자다.” 인격과 재능이 어우러져야 군자다. 인격이 있으나 재능이 없는 사람은 시골에 많다. 재능이 있으나 인격이 없는 사람은 공무원 중에 많다. 여기서 질은 구조론의 질과 같다. 질에서 입자와 힘, 운동, 량으로 가면서 재능을 발휘한다. 질이 안좋은 사람도 재능을 발휘하여 질이 되는 척 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의사결정의 현장에는 안철수처럼 갑자기 바보가 되어 정체를 들키게 된다. ###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보다 못하다. 아는 것은 챙겨담아 두는 것이요,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써서 일하는 것이요, 즐거워하는 것은 둘이서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이 진짜다. 일의 순서로 보면 즐거워 하는 것은 복제, 좋아하는 것은 조합, 아는 것은 연출이다. 즐거워하는 것은 둘이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요, 좋아하는 것은 메뉴를 고르는 것이요, 아는 것은 그것을 먹는 것이다. 어떤 일의 시작부분은 아이처럼 즐거워하게 된다. 일을 반복하다보면 좋아하게 된다. 그리하여 잘 알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지식의 획득절차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다보면 순서가 반대로 된다. 시골 어린이는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운다. 처음 물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한다. 헤엄에 익숙해지면 수영을 좋아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영을 잘 알게 된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면 반대다. 먼저 수영을 알게 되고, 다음 수영을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즐거워하는 단계 까지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게 된다. 수영에 능숙해져도 아직 마음 한구석에 물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실력이 극한에 이르지 못한다. 진정한 배움은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내가 물을 배우는게 아니라 물이 물을 배우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공부하는게 아니라 공부가 공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일하는게 아니라 일이 일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 자체의 결을 따라가면 완전해진다. 즐거워 하는 자의 경지다. ### “중간 이상인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대해 말할 수 있으나 중간 이하인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공자의 교육방법은 시詩와 악樂을 통해 단박에 묘리를 깨닫는 방법과 주역을 통해 밸런스 감각을 깨닫는 것이 있다. 요즘으로 치면 뛰어난 예술작품을 통해 미학을 깨닫는 것이다. 그 시대에 시경의 시詩를 읽고 깨달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대개 공자의 세련된 스타일을 우러르며 겉보기 흉내나 낼 뿐이다. 논어가 깨달음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 ###
번지가 지혜를 묻자 공자의 과학적 태도가 빛나는 장면이다. 개인의 인기를 위해 집단 안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사람은 귀신을 가까이하고 불러들이는 법이다. 이는 인간의 본능인 종교행동이다. 조상은 집단의 공통분모이므로 집단의 결속을 위한 논리장치라다. 이는 교회의 역할과 같다. 부족이 집단의 결속력을 높이는 방법은 외부의 침략자에 맞서 대항하는 것이다. 이때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처럼 외부의 침략자를 거짓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마녀가 나타났다. 종북이 나타났다. 친노가 나타났다. 빨갱이가 나타났다. 서울시 지하에 땅굴이 있다고 외치는 소인배가 있다. 그들이 귀신을 불러들인다. 귀신을 공경하라는 것은 집단의 결속력 유지에 기능하는 종교의 역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귀신을 멀리하라는 것은 거짓으로 마녀를 지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
번지가 인仁을 묻자 이는 구조론적 사유다. 과학의 체계적 접근이다. 어려운 것은 시스템을 세우고 매뉴얼을 만들고 체계를 잡는 것이다. 도량형의 통일과 같다. 먼저 도량형을 통일하고 상업을 일으키면 번영하게 된다. 반대로 미터법과 파운드법이 뒤죽박죽인채로 경제가 발전하기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 "아는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니, 아는 자는 움직이고, 어진자는 고요하며, 아는 자는 즐기고, 어진 자는 오래 간다." 일의 우선순위로 보아야 한다. 상부구조는 의사결정하고 하부구조는 집행한다. 인仁은 상부구조에서의 의사결정이요, 지知는 하부구조에서의 실행이다. 그러므로 어진 자가 아는 자보다 윗길이다. 어진 자는 장기전, 아는 자는 단기전이다. 어진 자는 세력전략, 아는 자는 생존전략이다. 어진 자는 오자병법, 아는 자는 손자병법이다. 어진 자는 진보, 아는 자는 보수다. 어진 자는 봄이고 아는 자는 가을이다. 어진 자는 오래 가는 원칙을 세우고 아는 자는 환경에 맞게 임기응변한다. 어진 자는 복제하고 아는 자는 조합, 연출한다. 어진 자는 일을 일으키고 아는 자는 마치고 수확한다. 깨달음은 어진 것이며 예는 아는 것이다. 어진 자는 작가이고 아는 자는 PD다. 어진 자는 가르침을 펼쳐 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아는 자는 들이친다. ###
재여가 묻기를 순진하게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 공자가 다른 사상가와 다른 점은 최종보스의위치에 선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 뒤에 숨는다. 속이면 속아주고 신에게 판단을 맡긴다. 노자 역시 비슷하다. 자연의 법칙에 맡긴다. 소크라테스 역시 기꺼이 독배를 마셨다. 보통은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신에게 맡기고 나는 단지 내 역할만을 하고자 한다. 하늘이 나를 그릇으로 쓰려고 하면 흔쾌히 몸을 내맡긴다. 공자는 다르다. 임금까지 가르쳐서 바로잡는다. 임금들이 공자를 기피하는 것이 당연하다. ### “군자가 먼저 글을 배워 두루 알게 된 다음 예禮로써 이를 다진다면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 예禮는 학學의 표현수단이다. 지금이라면 논문을 발표하거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지식을 자랑할 수 있다. 당시라면 예가 유일하게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대중이 모이는 행사는 제사밖에 없다. 거기서 예를 행하면 지식인의 증표가 된다. 예禮로 학學을 검증하는 것이다. ### “어진 사람은 자신이 서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세우고, 자신이 통달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통달하게 한다. 가까운 일로 비유하여 깨닫는다. 인仁의 방향이다.” 대승적인 팀플레이다. 일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일은 기승전결로 연결되어 간다. 그러므로 일을 일으키는 사람 옆에는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서 있어야 한다. 자신이 통달한 것을 그 사람도 통달해야 이어받을 수 있다. 깨달음은 일의 연결구조이므로 가까운 일로 비유하여 일을 이어받을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깨달음은 무리가 큰 일을 함께 하는 대승의 방향이다.
군자는 절대성에 반응하고 소인배는 상대성에 반응합니다. 문을 통하지 않고나갈 수 없다는 이치는 엔트로피의 절대성입니다. 큰 것은 작아지고 작은 것은 커진다는 말은 상대성입니다. 상부구조는 절대성이 작용하고 하부구조는 상대성이 작용합니다. 둘 다 맞는 말이나 공자는 일의 시작에 쓰이고 노자는 일의 마감에 쓰입니다. CEO는 일의 시작을 지시하고 말단직원은 마감을 챙깁니다. 노자의 가르침에만 열렬히 반응하여 스스로 소인배임을 인증한다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
번지는 공자학파의 막내뻘이자 공자의 마차를 끄는 마부였다 합니다.
나름 공자를 가까이 모시는 특권이었던거죠.
그래서 질문을 보면 맥랑한 철부지 아이의 물음같은 부분이 있고,
공자의 답변도 눈높이 선생님처럼 간명하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