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분별을 버리니 백성이 다투지 않는다. 보배를 버리니 백성들이 훔치지 않는다. 의도를 버리니 백성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그리하여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워서 배를 채운다. 뜻을 비우니 뼈가 굳세다. 백성은 바라는 것도 아는 것도 없다. 분별하는 자들이 설치지 못하게 된다. 무위로 행하여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요즘의 힐링붐과 비슷하다.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근본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 부류다. 소인배의 방법이다. 2500년 전 춘추시대 중국은 숲으로 가득차 있었다. 인구는 적었다. 전쟁은 없었다. 과거가 더 살기좋았다는 말이다. 공자가 요순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과 같다. 철기가 도입되자 숲이 벌채되고 인구가 급증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필연 전염병을 부른다. 중국은 황폐해졌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무위의 논리를 이해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근본 독자에게 아부하는 소인배 관점이다. 천하인의 호연지기가 없다. 비겁한 태도다. ### 4, 도는 비어있음으로 도리어 쓰임새가 있으니 채워지지 않게 한다. 연못처럼 깊어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 날카로움을 꺾어서 얽힌 것을 풀어낸다. 도의 빛이 비추면 티끌과 같아서 없는 듯 하지만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 있는 것 같다. 도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나 하느님보다 먼저다. 도는 에너지의 가는 길이다. 에너지는 움직이므로 어디에도 채워지지 않는다. 결코 채워지지 않으므로 도리어 바다처럼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 도는 세상의 모든 뾰족한 모퉁이를 꺾어서 얽힌 실타래를 풀어낸다. 도가 작용하면 자연스러워서 마치 도가 없는듯 하지만 그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우뚝한 도의 모습이 있다. 도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나 하느님보다 먼저다. 이는 직관적으로 느낀 바를 묘사하였으니 구태여 네 해석이 맞니 내 해석이 맞니 하고 핏대 세워서 따질 일이 아니다. ### 5,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장난감처럼 다루네. 성인은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장난감처럼 다루네. 천지에서 성인으로 연역하는 패턴이 좋다. 천지는 높고 인간은 낮다. 에너지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움직인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일방향적이다. 그 역방향 진행은 없다. 그러므로 상대성으로 빠지면 좋지 않다. 천지불인天地不仁 개념은 인간 위주의 주관적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과연 천지는 어질지 않다. 그런데 천지의 도에 기댄다면 잘못이 아닐까? 모순되는 형용이다.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 천지는 어질다. 모르는 자가 치일 뿐이다. 바람은 어질다. 풍차를 돌린다. 모르는 자가 바람에 날아갈 뿐이다. 강물은 어질다. 물레방아를 돌린다. 모르는 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 댈 뿐이다. 천지는 인仁하므로 인간은 천지의 도에 기대야 한다. 단 무지한 자에게는 어질지 않다. 무지한 자에게 천지는 모질다. 그리하여 무지한 자는 도태되었다. 살아남은 당신에게 천지는 어질다. 천지의 도에 기대어도 좋다. 천지 사이는 풀무와 같은가. 비었으나 그침이 없고, 움직일수록 거세어지네. 풀무는 속이 빈 상자다. 에너지의 작동이 풀무의 작동과 같다. 도道가 에너지의 작동을 관찰하여 얻어진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풀무는 철기문명 시대의 도구이다. 공자가 활약한 춘추시대는 풀무를 사용하는 단조철이 막 보급되려 하던 시점이다. 어쩌면 도덕경은 청동기가 지배했던 공자의 시대보다 후대의 저술일 수 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묵직함을 지키고 있느니만 못하네. 언어가 인간을 해친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면 깨달음의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 언어를 넘어설 수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에 좌절할 뿐 깨달음의 완전성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 6,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그윽한 근원이 된다. 그윽한 근원의 문이 하늘과 땅의 뿌리가 된다. 골짜기는 끝없이 이어져 존재하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황토지대에 골짜기는 많고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져 간다. 깨달음은 ‘일’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황토지대의 끝없이 이어지는 골짜기에 비유하고 있다. ### 7, 하늘은 넓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이 넓고 땅이 오래가는 것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생한다. 성인은 자신을 뒤에 세워 오히려 앞서고, 자신을 밖에 두니 오히려 보존된다. 이는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오히려 사사로움에 도달한다. 역시 하늘의 법칙으로부터 성인의 법칙을 연역하고 있다. 이러한 연역논리는 근사한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자의적이다. 하늘과 땅이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게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상부구조를 못 보는 것이다. 하늘의 법칙에서 성인의 법칙이 연역되듯이 하늘이 인간에 앞선다. 하늘은 자기를 앞세운다. 성인은 자기를 앞세운다. 성인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앞장선다. 진짜라면 뒤로 빼지 말아야 한다. 자꾸 뒤로 빼는 이유는 노래실력이 딸리기 때문이다. 진짜 가수는 어디서든 빼지 않고 한 곡조 뽑는다. ### 8,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물은 도道에 가깝다. 몸은 좋은 곳에 살고, 마음은 깊은 곳에 두며, 사귐은 어질게 하고, 말은 믿음직하게 하고, 다스림은 올곧게 하고, 일을 잘 해내고, 움직임은 때맞게 한다. 다투는 일이 없으니, 허물도 없다. 탈레스의 물 일원론을 떠올릴 수 있다. 에너지는 유체의 성질을 가지므로 물과 같다. 유체는 전부 연결되어 하나의 계를 이룬다. 계를 이루어야만 내부에 대칭을 생성하여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계를 이루고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어 위치에너지를 생성한다. 일이 진행되면 위치에너지는 운동에너지로 바뀐다. 물의 성질에서 돌의 성질로 바뀐다. 유체에서 강체로 바뀐다. 근원의 진리는 물과 같지만 우리가 진리를 이용하여 이로움을 소비하는 것은 물의 성질을 돌의 성질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쓰면 물을 쓸 수 없게 된다. 에너지가 일하여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면 외부개입이 없이 다시 위치에너지로 되돌리지 못한다. 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도덕경의 주장은 계속 위치에너지 상태로 머무르라는 말이다. 쓰이지 못한다. ### 9, 있는데도 채우느니 그만둘 일이다. 두드려 칼날을 세우면 간직할 수 없고, 금과 옥이 가득하면 지키지 못한다. 부귀하면 교만하니 자신에게 허물을 남긴다. 이루었을 때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道다. 일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항아리에 채우거나 칼날을 세우는 것은 말단부의 논리다. 일의 끝나는 지점이다. 반면 일의 시작 지점은 처음 성냥을 켜서 불을 지르는 것과 같아서 3년 동안 불을 지펴도 더 지필 수 있다. 성냥을 한통 다 써도 또 쓸 수 있다. 항아리는 덧셈이므로 가득 채우면 일이 끝나지만, 성냥불은 뺄셈이므로 백번을 켜고도 더 켤 수 있다. 금과 옥을 집안에 채우는 것은 말단부의 행동이다. 원인측이 아니라 결과측이다. 부귀를 얻는 것도 사건의 결과측이다. 원인측에 서면 물러날 이유가 없다. 교육가나 예술가는 사건의 원인측에 서므로 물러나지 않는다. 대학교수의 정년이 다른 직종에 비해 긴 것이 이유가 있다. 예술가는 정년이 없다. 일의 시초에 서는 사람은 제한이 없는 것이다. ### 10, 영혼으로 도道를 끌어안되 떼어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는가? 자연스러운 기운을 얻어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 그윽함을 보고 씻어서 흠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는가? 나랏일로 백성을 다스림에 무위로 할 수 있는가? 하늘문이 열려도 가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훤히 알아도 아무것도 모를 수 있는가? 낳음이 있고 키움이 있으니 낳으면서도 갖지는 말라. 하면서도 따르지는 말라. 윗사람이면서도 지배하지 않으니, 그윽한 덕德이라. 깨달음의 깊은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자구를 일일이 해석하려고 한다면 어리석다. 이는 시詩와 같으니 오직 직관할 뿐이다. 자구를 파헤처 낱낱이 의미를 해석하려들수록 망친다. 그것은 끌어안은 도를 떼어내는 짓이며, 어린이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어른의 작위이며, 그윽하지 않아 흠이 많은 것이며, 백성을 무위가 아니라 형벌로 다스림이다. 원문에서 하지 말라는 짓이다. 즐거운 노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시詩는 시詩로 받아야 한다. ### 11,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축 하나에 모여있으니, 그 비어있음에 쓰임이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니 그 비어있음에 쓰임이 있다. 벽에다 문과 창문을 내서 방을 만드니 그 비어있음에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 때문이리라. 바퀴살은 30이나 바퀴축은 1이다. 하나로 서른을 상대하니 29만큼 이득이다. 우리는 그 29의 비어있음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릇과 방도 마찬가지다. 비우면 비운만큼 이득이다. 그러나 일상의 도구들은 그 반대다. 송곳은 뾰족하게 모퉁이가 나 있으니 쓸 모가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차이다. 상부구조는 비어서 쓰임새가 있고 하부구조는 뾰족하게 돌출해서 쓰임새가 있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건의 원인측은 보이지 않고 결과측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이 어리석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너지가 들어차 있다. 우리는 극장의 스크린을 볼 뿐 필름을 보지 못한다. 필름은 관객의 등 뒤에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려 영사실을 본다. 영사기가 돌아가고 있다. 영화가 스크린의 비어있음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름 속에 빼꼭하게 들어차 있다. 하부구조에서 바라보므로 상부구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 등뒤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에너지로 보면 들어차 있다. ### 12, 오색의 화려함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오음의 화려함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한다. 오미의 화려함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타고 사냥하는 화려함은 마음을 미치게 한다. 구하기 힘든 보배의 화려함은 사람의 행실을 망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챙길 뿐 바깥을 바라지 않아. 내것을 취하고 바깥을 버린다. 도교사상은 양생술을 익혀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천박한 짓이다. 성인은 몸을 챙기고 바깥을 버린다고 되어 있다. 그 몸이 영혼을 말하는 것인지 신체를 말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도덕경의 앞부분은 내면적 깨달음의 강조로 보이는데 뒤로 갈수록 자기 신체를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거다. 당시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였다. 전쟁에 휘말려 죽기가 다반사인 시대였다. 그러므로 몸을 보호하여 오래오래 살자는 뜻으로 보는게 맞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의 주장으로 읽는게 더 아름답다. 춘추전국시대는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극도의 혼란기였음을 고려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오색, 오음, 오미, 사냥, 보배들은 모두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서 마지막 ‘량’에 해당한다. 이는 사건의 원인측이 아니라 결과측이다. 군자는 사건의 원인측에 개입하므로 무방하다. 오색의 화려함에 눈이 머는 사람은 그림을 사들이는 소비자이고 그림을 그리는 고흐는 오히려 눈을 뜬다. 오음의 화려함에 귀가 먹는 사람은 청중이고 모짜르트는 오히려 귀가 열린다. 오미의 화려함에 입이 상하는 사람은 미식가이고 요리사는 반대로 입맛이 살아난다. 사건의 원인측에 서는 사람은 해당사항이 없다. 군자는 사건의 원인측에 서므로 다치지 않는다. ### 13, 사랑받거나 욕먹거나 간에 상처입는다. 큰 어려움에 처해도 귀하게 받아들여라. 사랑받거나 욕먹거나 간에 상처입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랑받음은 곧 조만간 그 사랑을 잃게 된다는 뜻이니, 사랑을 얻어도 상처입고, 사랑을 잃어도 상처입는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받거나 욕먹거나 간에 상처입는다는 말이다. 큰 어려움에 처해도 귀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큰 어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내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없다면 어려움도 없다. 그러므로 내 몸을 아끼듯 천하를 대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내줄 수 있고, 내 몸을 사랑하듯 천하를 대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 공연히 말을 배배 꼬아서 헷갈리게 해놨다. 이는 오색의 화려함을 취함과 같고, 오음의 화려함을 취함과 같으니, 언어를 망치는 짓이다. 바로 앞 12장에서 자신이 한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독자를 헷갈리게 하면 욕 먹는다. 노자는 지나치게 일신의 안전에 집착하고 있다. 당시 중국은 그 정도로 혼란했다. 끝없는 전쟁과 음모로 인간의 심성이 피폐해졌다. 현실도피가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 14, 볼 수는 있으나 알아볼 수 없으니 이夷라고 한다. 들을 수는 있으나 알아들을 수 없으니 희希라고 한다. 잡을 수는 있으나 얻을 수는 없으니 미微라고 한다. 이 세가지를 따질 수는 없으니. 그러므로 뒤섞여서 하나로 있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끝없이 이어져 구분할 수 없고, 무로 되돌아간다. 이는 형상이 없는 형상이겠고, 황홀한 것이겠다. 마주봐도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가도 뒤를 볼 수 없다. 옛 도를 얻어 지금 일을 다스리니, 도의 벼리紀가 된다. 환빠들은 이夷를 큰 활로 풀이하는데 노자는 동이를 벼룩이나 이와 같은 작은 벌레로 취급하니 가히 기분좋은 소식은 아니다. 도는 에너지다. 옛날에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도 도의 작용으로 보았다. 기氣로 보기도 한다. 희希에 미微를 더하니 도道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희미하고 작은 존재다. 도의 작용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원인上은 밝히기 어렵고 결과下는 밝히기 쉽다. 인과법칙은 끝없이 이어져 구분하기 어렵고, 결국 무無로 되돌아간다. 결론적으로 도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인과법칙은 옛날에 원인이 시작되어 지금에야 결과로 나타나니 이것이 도道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紀가 된다. 노자는 도를 에너지 작용으로 봤다가, 바이러스로 봤다가, 인과법칙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과법칙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작은 실마리紀는 있다고 애매한 결론을 내렸다.
남만은 벌레라는 뜻인데 동이가 좋은 뜻일리 없지요. 작은 바이러스나 세균 정도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이는 선비족, 동호족, 돌궐족, 흉노족, 거란족, 타타르족, 말갈족, 몽골족과 왜구입니다. 한국도 동이에 포함될 수 있으나 한국이 곧 동이는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