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5분 정복” 구조는 쉽고도 어렵다. 쉽기만 하다면 진작에 원리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많은데 내까지 차례가 돌아올 리 없다. 그렇다. 구조는 어렵다. 그러나 어려운 이유를 알면 극복할 수 있다. 구조는 원리다. 원리(原理)란 첫 번째 결이다. 결은 나무의 나이테다. 그래서 나이테를 한자로 목리(木理)라고 한다. 원래 리(理)는 옥(玉)+리(里)로 옥을 가공하는 결이다. 결따라 가공해야 한다. 결을 따르지 않으면 갈라진다. 실패한다. 그것이 법칙이다. 세상 어디를 가나 결이 있다. 결이 길이다. 길이 도(道)다. 구조가 결이고 길이고 도다. 길따라 가기는 쉽다. 그래서 구조는 참으로 쉽다. 길은 우리 주변에 있다. 어디를 가나 그 안에 구조가 있다. 그래서 구조는 쉽다. 왜냐하면 익숙하니까. 누구나 일상적으로 구조의 문제에 부닥치게 되니까. 문제는 첫 번째 결이다. 첫 나이테가 어렵다. 첫 번째 나이테가 원리다. 세상을 통째로 한 줄에 꿰어내는 으뜸법칙이다. 항상 그렇듯이 처음이 어렵다. 이거 하나만 제대로 알면 나머지는 안봐도 척이다. 척하면 착이다. 문제 해결된다. 구조는 쉽다. ●는 1이다. ●●는 2다. 그렇다면 ●●●는? 말 안해도 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나이테를 일러주고 세 번째 나이테를 찾으라면 누구나 쉽게 찾아낸다. 그래서 구조는 쉽다. 결이 나 있기 때문이다. 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가 한결, ●●가 두 결, 처음에 오는 두 결을 알려주면 누구나 세 번째 결을 찾아낸다. 과학이 어려운 것은 백만번째 결을 찾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해놔서 어려울 뿐, 열심히 찾으면 결국 찾을 수 있다. 수학은 엄정하다. 그러므로 수학을 좀 아는 사람은 세상에 수학만큼 쉬운 것이 없다고 한다. 똑떨어지는 정답이 나와주기 때문이다. 구조론이 어려운 이유는 첫 번째 나이테를 찾기 때문이다. 그게 쉬운데 어렵다.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 1, 둘을 세우면 2다. 손가락을 세우지도 않고 쥐지도 않고 오므렸다가 폈다가 까딱까딱 하면? 규칙을 정해놓고 그 규칙을 연장하는 것은 쉽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규칙을 확보해놓고 사물에 적용하는 것은 쉽다. 그 규칙을 찾아내는게 어렵다. 그러나 낙담할 이유는 없다. 여러분이 구조론의 복잡한 규칙을 다 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창의적인 리더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맞닥뜨리는 일 중에서 첫 번째 나이테의 문제가 걸리는 잘 없기 때문이다. 항상 처음이 어렵다. 첫출근, 첫소풍, 첫키스, 첫사랑, 첫 번째 내집마련, 첫 직장잡기가 어렵다. 두 번째 부터는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으므로 쉽다. 그런데 보통 첫 번째 코스는 누가 도와 준다. 먼저 온 사람이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해놓고 두 번째 세 번째 결을 당신에게 맡긴다. 여러분은 이미 길이 나 있는 일을 맞닥들인다. 첫 번째 나이테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잡스가 고민하고 있다. 첫 번째 나이테를 찾아라! 이건 첨단에 서 있는, 예술가의 고민, 창조자의 고민, 리더의 고민, 역사적 변혁기의 고민, 사춘기의 고민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문제에 대한 감각을 키울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나이테는 찾기 어렵지만 내가 이미 그것을 찾아놓았으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사물에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구조론은 쉽다. 중요한건 구조론적인 사고다.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확실히 감각을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구조론이 제시하는 정답이 우리의 상식과 안맞기 때문이다. 당연한 상식이 틀렸다. 그래서 문제다. 구조론은 역설이다. 역설은 맞는데 틀렸다는 거다. 참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 말씀을 인용하자. 목수가 오전내내 연장을 벼르는데 지켜보니 집은 건축되지 않는다. ‘아 진도 안나가는구나’ 하고 한숨을 쉬고 보니 그새 목수가 집을 뚝딱 다 지어버렸다. 일머리다. 일머리는 우리의 상식과 반대다. 일머리 아는 사람이 하는 일은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순식간에 해치운다. 일머리 모르는 사람은 초반에 잘 나가다가 막판에 깨진다. 퍼즐을 맞추되 순서대로 차근차근 맞추지 않고 맞추기 쉬운것만 맞춘다. 다 맞춰놓고 ‘어? 나사가 하나 빠졌네! 라인 스톱. 처음부터 다시.’ 일머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상식과 다르다. 상식을 깬 사람은 히딩크다. 그는 한국팀의 약점이 정신력이라고 말했다. 정신력이야말로 한국팀의 강점이라고 믿었던 한국인의 상식과 배치된다. 한국인은 눈에 힘주고 악 쓰는 정신력을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그것은 하수의 정신력이었다. 고수의 정신력은 다르다. 김연아의 연기와 외국선수의 연기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김연아는 항상 동작에 여유가 있다. 다른 선수들은 다음 동작을 기억하기 바쁘다. 다음 동작을 미리 떠올리면 그 이전 동작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오른손을 올렸다면 다음은 왼손을 올려야 한다. 김연아는 오른손과 왼손이 하나의 동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동작이므로 다음 동작을 미리 떠올릴 필요가 없다. 가만있어도 몸의 밸런스가 스스로 그 동작을 찾아간다. 그러나 외국선수는 다르다. 밸런스는 없다. 머리가 동작을 몸에게 요구한다. 앞동작 다음에 뒷동작이 분주하다. 정신없다. 전체를 한 줄에 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2가 심 1을 만들지 않았다. 첫 번째 나이테를 정하지 않았다. 몸≫맘≫삶의 순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첫 번째 나이테는 몸이다. 그 다음이 마음이다. 그 다음이 연기다. 어떤 스포츠라도 그러하다. 몸부터 만들어야 한다. 마이클 잭슨의 춤과 한국 댄스가수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춤을 비교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은 모든 동작이 몸에서 쏘듯이 나간다. 화살처럼 퉁겨서 발사된다. 한국 가수들은 허겁지겁이다. 허공에 팔을 휘젓는다. 아주 파리를 잡는다. 파리를 잡어. 넉놓고 허우적 댄다. 동작이 몸에서 발사되어 나가는게 하니라 허공에 팔을 휘저어 그것을 몸으로 가져온다. 하나의 몸에서 여러 동작이 나오는게 아니라 여러 동작을 그냥 순서대로 주워섬긴다. 나열식이다. 동작 따라가기 바쁘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의 눈은 몸 안에 가 있는데 한국 댄스가수는 허공에 가 있다. 마이클잭슨은 먼저 얼굴에 감정을 띄우고 그 다음에 동작으로 펼쳐낸다. 한국 가수들의 얼굴은 공허하고 팔다리는 허우적거린다. 감정을 끌어올려 탕 하 고 쏘는게 없다. 동작을 까먹을세라 박자를 놓칠세라 전전긍긍하는게 보인다. 강약도 완급도 고저도 장단도 없다. 구조론적 감각이란 전체를 보는 눈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시야다. 돌아가는 판 전체를 책임지는 리더의 관점이다. 통짜덩어리 인식이다. 에너지의 입출력 위주로 보는 입장이다. 에너지의 자연스런 흐름 곧 순리를 따라가는 것이며, 판 전체를 제어하고 조율하는 스위치를 손에 움켜쥔 것이며,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다. 역설이란 부분의 진행과 전체의 진행이 상반되는 현상이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노는 뒤로 가야 한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 뒤로 가는 현상이 역설이다. 걸음을 걸어도 실제로는 발로 땅을 뒤로 미는 것이다. 앞으로 가려면 항상 무언가 뒤로 가야 한다. 뒤로 가고 있으면 앞으로 갈 조짐이고 앞으로 가고 있으면 뒤로 갈 조짐이다. 그러므로 전체를 통찰하는 눈이 없으면 항상 착각하게 된다. 거꾸로 알게 된다. 자연의 근본이라 할 대칭성 원리 때문이다. 대칭은 음양, 남녀, 상하, 좌우, 전후, 정동, 심원, 과거와 미래 등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구조론적 이해란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칭이 있고 그 대칭의 축이 있으며 그 축이 계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절대성의 태도이다. 기계론적 관점이다. 결정론적 사고다.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태도이다. 그들은 세상이 하나의 방향으로 운동하며 빈틈없이 꽉 짜여져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칭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장유유서, 남존여비로 서열이 정해져 있어서 항상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다고 여긴다. 강자와 약자,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다. 이건 비대칭이다. 이들은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굉장한 자신감을 갖지만 현실에서 무참하게 패배당한다. 무수한 반전이 일어나서 약자가 강자를 제압하고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운다. 그들의 오만한 콧대는 꺾이게 된다. 또 하나는 상대적 관점이다. 이들은 대칭을 알지만 허무주의에 빠졌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눈치를 본다.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옳고 부인 말도 옳소이다. 에라이 될대로 되라지.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 정신주의, 심리주의로 도피한다. 눈을 감고 모른척 하며 소극적으로 안주하고 만족한다. 이들은 폼을 있는데로 잡지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카리스마가 없다. 구조론적 이해는 양자를 입체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입체적 관점이 요구된다. 평면적 관점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이기고 임금이 신하를 이기며 일방통행하든가(주로 보수꼴통의 사고). 아니면 강자와 약자가 대등하고, 임금과 신하가 평등해서, 결국 서로 교착되어 옴쭉달싹 못하고 문제해결을 못하고 질질끌든가 둘 중에 하나다. 좌파들은 평등한 사고를 하지만 무능력하다는 인상이다. 우파들은 얼핏 유능해 보이지만 반드시 사고를 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를 희생시키거나 하부구조에 떠넘겨서 대략 상황은 더 나빠져 있다. 입체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들은 미국 쇠고기 수입결정으로 쇠고기 문제를 해결했다고 우기지만 정작 한국인은 미국 쇠고기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뭘 해결했다는 거야?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아니다. 선형사고의 한계다. 좌파의 교착, 평등한 상태의 지루한 대치도 아니요 우파의 폭력, 일방독주도 아닌 제 3의 진정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모든 대칭되는 것에는 축이 있다. 역사의 방향성이 있다. 흐름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역사가 결정한다. 내가 옳다고 우기는건 소아병적 태도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이 미국쇠고기 못먹게 되었으니 이명박이 틀린 거다. 역사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노무현이었다면 안전한 쇠고기만 들여와서 지금 한국인들 미국 쇠고기 제법 먹고 있을 것이다. 근본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입체적 사고다. 근본은 무엇인가? 역사의 진보다. 그것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에너지의 출입처를 찾으면 답이 나온다. 에너지는 반드시 대칭의 축을 통과한다. 그 다음 왼쪽과 오른쪽의 두 날로 전개된다. 그 대칭축 부분을 제어하면 평등이 오히려 문제해결의 활력소가 된다. 상생이 가능하다. 우파방식으로 강자가 약자를 죽일 필요도 없고 좌파방식으로 지리멸렬한 교착상태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평등에서 오히려 강력한 힘을 끌어낸다. 대등할 때 오히려 큰 진보가 일어난다. 과묵하고 말 잘듣는 고분고분한 부하가 일을 잘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말많은 창의적인 부하가 대단한 성적을 낸다. 고참들은 지시하고 신참은 복종해야 하는줄 알았는데 히딩크는 그 반대다. 고참 안정환, 홍명보의 기를 꺾고 신참 박지성, 이천수의 기를 살려놓으니 오히려 더 잘 한다. 우리의 상식과 반대되는 형태다. 이게 입체적 사고, 통짜덩어리 인식,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야다. 중요한 것은 세상 모두가 대칭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대칭의 축이 있고 에너지는 바깥에서 유도되어 축을 통과한 다음 대칭되는 양날개로 전달되면서 그 과정에서 축의 지점에서 제어된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난국은 타개되고 문제는 해결되고 대칭되는 양자는 공존할 수 있다. 이쪽이 저쪽을 제압하고 싹쓸이로 죽여없애야 된다는 이원론의 오류,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바깥에서 안으로 어떻게 에너지를 유도하여 오느냐에 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흩어진 식구를 모아 축을 형성하여 1을 달성할 때 에너지는 유도되고 빛은 내리쬔다. 그러나 보통은 어떤가? 안되는 집안은 항상 고참과 신참으로 나눈다. 서열따지고 선후배따지고 남녀따지고 나누고 나누고 나누다가 갈라져서 1이 되지 않으니 에너지 유도가 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또 밖으로 닫아걸고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평등을 달성하지만 정작 에너지가 없어 허탈해지고 만다. 차는 만들었는데 기름이 없어 못 가는 식이다. 좌파들 일이 뭔가 될듯 하면서 갈수록 허무해진다. ● 수구가 망하는 공식.. 에너지 유무에 따라 강자와 약자로 나눴더니 중간고리가 끊어져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아 불균형이 심해져서 거함이 가는데 초반에는 좀 가는듯 하다가 기우뚱하고 자빠진다. ● 좌파가 망하는 공식.. 강자도 약자도 없이 평등하게 맞추기 위해 에너지가 들어오는 외부를 담장으로 막았더니 에너지가 유도되지 않아 문제해결 못하고 눈만 꿈벅하며 서로 얼굴만 쳐다 보고 있다. 구족론은 되는 집안이 되는 이유를 정교하게 해명한다. 그 복잡한 내막을 다 알려면 머리 쪼개지는 거고, 고도의 정밀한 유도과정이 필요한거고 간단히 세상의 기본이 되는 패턴을 아는게 중요하다. 세상이 다 패턴이다. 패턴이 모이면 대칭이다. 그게 짝짓기다. 모든 문제해결은 짝짓기로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짝을 잘 지으면 신데렐라도 왕비되고 춘향도 졸지에 숙부인 마님 된다. 짝을 잘못지으면 이병헌 꼴나고 타이거 우즈 꼴나고 찰스왕자 꼴난다. 에너지의 흐름을 살펴서 그 흐름대로 짝을 지어야 한다. 어떤 대립된 둘을 짝짓되 그 둘을 동시에 통일하는 제 3의 축을 찾아야 한다. 축을 제압해놓고 이야기를 해야 진도가 나가준다. 축이 노무현이다. 노무현 없는 상태에서 졸라리 논쟁해봤자 답 안나온다. 노무현 없는 지금에 와서 누가 축인가? 안봐도 뻔하다. 말해봤자 입만 아퍼. 세상의 기본은 패턴, 패턴은 항상 대칭, 대칭 다음엔 축, 축 위에 에너지의 흐름. 여기서 순서대로 쫙. 몸으로 에너지가 들어와서 맘에서 에너지가 제어되고 삶으로 전개하여 나가준다는 그림을 그리면 답 나온다. 이것만 알면 감각이 살아서 안보고 그냥 안다. 눈빛만 봐도 아 저 양반은 졌군. 아 저 선수가 이겼군. 하고 알게 된다. 아 저 양반이 주인이군, 아 저 양반은 손님이군, 하고 알게 된다. 그런데 맨 먼저 앞에 나와서 떠드는 것은 주인도 손도 아니고 개다. 어떻든 개짖는 소리가 이리 시끄러우니 기다려보면 조만간 주인이 나오긴 나오겠지. 뭐. 역사의 에너지 흐름을 믿고 기다려볼 일이다. ∑ |
^^ㅋㅋ
이리 설명하면 다 알것 같은데..막상 문제를 만나거나 혹은 생각을 해야할 때는 뭔가가 막힐때가 있는데...
아마도 ...
구조론적 감각이 부족한듯 하고,익숙치가 않아서인듯 하고, 양자를 입체적으로 통일시키는 입체적 관점이 부족하고 전체를 보고 결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런점에서 아직 미성숙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아..나도 좀 쉬워졌으면...^^;
괴로움의 원인이 무지이므로 그 무지를 타개하면 괴로움이 해소가 되는데...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관계속에서 수많은 괴로움들이 닥치는데,,,대체적으로 모두 묻어버리거나 덮어버리거나 억압해 놓은체 봉인해버리려고 합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죽음이 멀리 있는것은 아닌것 같아요.
괴로움을 해소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므로 이미 죽은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