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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705 vote 0 2008.12.29 (12:52:57)

 

구조주의 논리학

철학의 중심에 논리학이 있다. 논리학에 수학이라는 붓으로 칠하여 물질을 입히면 자연과학이 되고 마음이라는 붓으로 행동을 입히면 인문학이 된다. 이 모든 것은 근본 자연의 질서에서 유도된다.

● 자연의 질서≫ 논리학 ━ 수학과 물질 ≫ 자연과학

                        ┗ 마음과 행동 ≫ 인문과학

인과율에 기초한 서구 논리학이 있었던 자리에 구조론이 와야 한다. 인과율이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 자연의 질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조체와 시스템의 진보를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인에서 결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출력측의 입력전환이라는 피드백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구조주의 논리학은 인과율에 기초한 서구 논리학의 결점을 보완하여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완성시킨다.

논리학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사유를 일치시키기다. 자연은 입체적 모형으로 존재하며 시스템으로 발전하는데 비해, 인간의 사유는 흑백논리의 단선구조를 따르므로 불일치가 일어난다.

대부분의 창의가 논리적 연산이 아니라 자연의 모방에서 얻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영감, 직관, 통찰이다. 논리적 연산과정 없이 입체적 모듈을 이룬 자연을 복제하여 그대로 아이디어를 조달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타인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재현되지 않는다. 천재의 일회성 아이디어로 끝나고 만다. 인간의 언어에 문제가 있다. 인간은 직관과 통찰로 얻은 것을 언어에 실어서는 타인에게 전하지 못한다.

언어가 선형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선은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담을 수 있을 뿐 자연의 입체적 모듈을 통째로 운반할 수 없다. 천재의 창의는 전파되지 않는다.

아직도 지구촌 인류는 예수의, 노자의, 혜능의, 고흐의, 모짜르트의, 김기덕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창의는 입체적 모듈인데 이를 선(線)의 언어에 태우려는 즉 부수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지식은 반영(反映)된다

언어는 결함 있는 도구다. 거울의 좌우가 바뀌듯 반영(反映)된다. 이를 원래대로 환원시키지 못하므로 오류가 일어난다. 언어를 사유의 도구로 삼아 생각하는 한 인간은 고급정보를 운용하지 못한다.

뇌 속에 깨달음의 모듈을 건설해야 상대성과 역설에 지배되는 고급정보를 운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순수한 사유 그 자체는 자연의 질서와 일치한다는 데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까.

오류는 전달과정에서 일어난다. 자기 자신에게도 전달하고 타인에게도 전달한다. 그러나 보통은 번뜩이는 영감으로 얻은 직관적 아이디어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 자신감을 잃고 만다.

베테랑의 무수한 경험이 아니면 자신이 직관으로 알아낸 것을 불신한다.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고 권위 있는 타인에게 판단을 위임한다. 그러나 타인과 교류되는 정보는 낮은 수준의 정보운용일 뿐이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높은 질서를 가진 고급정보는 이심전심이 아니면 전달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언어의 한계를 직시한다면 일정부분 고급정보의 운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언어의존을 끊는다면.

자연의 질서에서 인간의 지식이 유도된다. 가운데에서 양자를 잇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의 통찰과 직관이 자연의 질서를 복제한다. 이심전심의 심(心)은 감정이 아니라 입체적 모듈의 중심 혹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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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명상법은 마음을 관찰한다. 뇌기능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본다. 어떤 사건에 밀도가 걸려 있으면 긴장한다. 입체는 떳떳함을, 각은 아름다움을, 선은 자연스러움을, 점은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느끼는 감정을 통해서 계에 물려 있는 질서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주변과 맞물린 정도를 헤아릴 수 있다. 높은 질서인지 낮은 질서인지 알 수 있다. 고급정보인지 단순한 정보인지 판단할 수 있다.

문법은 뇌기능의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로 단계적인 대칭구조를 이룬다. 귀납되는 개념적 지식은 불완전하지만 문장구조 내의 대칭성이 연역원리를 따르므로 보완된다.

말을 할 때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말이 나온다. 내 입이 1초 후에 무슨 말을 뱉을지 나 자신도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장구조 내에 대칭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가는, 내가 생각을 해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의 긴장도에서 결정된다. 메모리에 어떤 컨셉을 올려놓기만 하면 문장구조의 대칭성을 따라 말이 술술 풀려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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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정의 대칭성, 문법의 대칭성이 자연의 질서와 일치하므로 언어적 지식이 가진 단점이 보완된다. 인간의 지식은 근본 자연에서 유도되는 것이며 자연≫질서≫마음≫문법≫개념 순으로 성립된다.

자연이 연역되는데 비해 인간의 개념적 지식은 거꾸로 귀납된다. 개념이 진리를 담아내기는 하지만 반영(反映)된다. 거꾸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류가 있다. 문장구조의 대칭성이 바로잡는다.

자연의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간의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그런데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말과 행동은 다시 자연의 연역을 따른다. 행동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전체가 먼저다.

왜? 부분에 집착하다가는 호랑이의 밥이 될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행동에 임하여 인간의 감정이 전체를 보도록 충동한다는 사실이다. 호랑이 앞에서는 긴장한다. 긴장하면 전체를 본다.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긴장, 불안≫떳떳함, 부끄러움≫아름다움, 역겨움≫자연스러움, 어색함≫시원함, 답답함의 순으로 신호를 보내온다. 이러한 감정신호를 포착하여 계에 걸린 질서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과학은 언어적 지식 위에 건설되었다. 귀납논리를 따르므로 오류가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실제로는 귀납적 방법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과학자들도 자연과의 정직한 대면에서 얻어지는 영감을 따른다.

지식 위주의 과학적 방법론은 영감으로 얻은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여 객관화시키는 데만 쓰인다. 모든 오류는 아이디어를 타인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물러나 조용히 관찰하면 답이 보인다.

전제와 진술

인간이 결함투성이 언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눈치가 있기 때문이다. 눈치는 포지션이다. 상대성이 작용하는 계의 대칭구조를 읽는다. 상황을 읽는다. 같은 단어라도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주어와 술어≫명사와 동사로 조직된다. 이들은 포함관계를 이룬다. 전제와 진술의 대칭 속에 주어와 술어의 대칭이 있고 그 속에 또 명사와 동사의 대칭구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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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더의 모빌처럼 단계적인 대칭구조가 있다. 의미는 단어 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일정부분 포지션 속에 숨어 있다. 단어가 지시하는 개념에는 오류가 있지만 그 포지션 구조에는 오류가 없다.  

개념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포지션에 오류가 없는 이유는 포지션은 항상 앞과 뒤, 좌와 우, 겉과 속, 중심부와 주변부를 동시에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 포지션은 구체적인 작동과정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을 때는 포지션이 없다. 포지션은 반드시 행동을 촉발한다. 그 행동과정에서 검증된다. 포지션은 항상 상대가 있으므로 오류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펀치를 맞는다. 행위는 실패가 되고 결국 퇴출된다.

빌다와 빌리다는 어원이 같다. 더하다와 덜다, 달다와 떼다, 박다와 빼다, 빨다와 불다, 내다와 넣다는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어원이 같다. 대부분의 동사가 그러하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엄마를 반대로 발성한 것이다. 풀다는 묶다를 반대로 소리 낸 것이고 뒤는 앞을 반대로, 너는 나를 반대로, 오다는 가다를 반대로 발성한 것이다. 대칭되는 개념은 대개 같은 논리로 출발하여 분화된다.

개념에는 오류가 있어도 포지션에는 오류가 없고, 언어에는 오류가 있지만 눈치에는 오류가 없다. 이렇듯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대칭성이 상호검증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은 언어의 쓰임새를 결정하는 부분이다. 전제에 대해 진술이 중요하고, 주어에 대해 술어가 중요하고, 명사에 대해 동사가 중요하다. 쓰임새를 지시하는 이 부분은 오류가 거의 없다.

쓰임새는 행동으로 연결되고 행동과정에서 오류가 걸러지기 때문이다. 언어의 오류는 주로 반대편의 전제와 주어와 명사에서 일어난다. 항상 전제가 지시하는 게임의 규칙 속에 함정이 있고 속임수가 있다.

문제는 인간의 관심이 반대편의 진술과 술어, 동사로 쏠린다는 데 있다. 자연의 운행은 항상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인간의 관심 역시 낮은 질서측의 진술, 술어, 동사쪽을 주목한다.

인간은 어떻게든 행동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언어에서도 행동을 지시하는 동사쪽을 주목한다. 전제와 진술, 명사와 동사로 대칭되는 양측을 동시에 의식의 메모리에 띄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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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손을 주목하게 하지만 속임수는 커튼 뒤에서 일어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관심이 저절로 동사쪽으로 쏠리므로 주목되지 않은 전제와 주어와 명사로 속인다.   

● 높은 질서 ≫ 전제, 주어, 명사

● 낮은 질서 ≫ 진술, 술어, 동사

전제는 관심에서 벗어나므로 속이기 쉽다. ‘유령을 봤다.’고 하면 ‘봤다’에 주목할 뿐 ‘유령’에 주목하지 않는다. 아마 헛것을 본 모양인데, 헛것은 놔두고 오직 ‘봤는지’만 검증하려 하므로 속아 넘어간다.

역설의 논리학

논리학은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인식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뒤집혀져 입력된 언어적 지식을 본래로 환원시켜 자연의 질서와 일치시키는데 의의를 둔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통째로 역설이다.

구조주의는 역설이다. 깨달음은 역설이다. 지식의 귀납이 자연의 질서를 잘못 해석하므로 바로잡는다. 역설은 패러독스다. 패러독스는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다.’이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에는 포지션이 있고 포지션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전제부의 ‘사실이 아닌데’에서 쓰인 ‘사실’과 진술부의 ‘사실이다’가 말하는 ‘사실’의 의미가 실로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라도 포지션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포지션의 문법적 기능을 무시하고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앞의 명제는 틀렸다. 그러나 언어는 대칭구조 내의 포지션에 따라 이차적 의미를 가진다.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다’는 부분에서 틀렸지만 전체로 맞다. 단선구조로 보면 틀렸지만 입체로 보면 옳다. 틀렸는데 옳다? 벌써 혼선이다. 혼선을 막기 위하여 분류이론에서 구분지를 둔다.

● 사건에서 - 이다/아니다

● 주체에서 - 있다/없다

● 방향에서 - 같다/다르다

● 운동에서 - 옳다/그르다

● 정보에서 - 맞다/틀리다

틀렸는데 맞으면 옳다로, 그른데 옳으면 같다로, 다른데 같으면 있다로, 없는데 있으면 이다로 판정된다. 이순신 장군은 없는데 있다. 책에도 있고 광화문에도 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다’가 된다. 이순신 장군‘이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많은 진술이 독립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 한 마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 가기는 갔는데 황소의 잔등에 붙어서 갔다면?

파리의 부산행은 독립적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간 것은 파리가 아니라 황소다. 이 부분을 엄밀하게 진술하려면 문장이 대책없이 길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편의에 따라 맞지 않은 표현도 쓴다.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눈치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을 그렇게 했다가는 지구는 도는데 지구가 돌지 않는 사태가 일어난다. 엄정해야 한다. 역설의 이해가 필요하다. 논리학은 통째로 역설이다.

역설이란 간단히, 진술이 전제라는 배에 태워져 있고, 술어가 주어라는 배를 타고 있고, 동사가 명사라는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술만 보고, 술어만 보고, 동사만 보고 판단해서 안 된다.

‘앞을 쳐라’고 지시했는데, 앞을 치기 위하여 팔을 뒤로 빼는 사전동작을 하면 그만큼 앞이 아니라 뒤를 쳤으므로 틀렸지만, 이는 부분이 틀린 것이고 전체로는 맞다. 부분을 보면 항상 착시다. 이것이 역설이다.

앞으로 가려고 노를 저으면, 노를 뒤로 보냈으므로 뒤로 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류로 판정하면 착오다. 그 결과로 배가 전진했으므로 옳다. 사건 전체를 봐야 한다.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구분지 5가 있다.  

● 사건에서 - 이다/아니다 : 전제부와 진술부의 연결 판정. (A면 B다.)

● 주체에서 - 있다/없다   : 작용과 수용에서 심과 날 판정 (A는 B다.)

● 방향에서 - 같다/다르다 : 공간적 방향에서 대칭성 판정. (A≫ B다.)

● 순서에서 - 옳다/그르다 : 시간적 순서에서 변화판정.    (A→ B다.)

● 정보에서 - 맞다/틀리다 : 개별 정보의 사실성 판정.     (A와 B다.)

명사들은 독립되어 있다. 파리나 황소는 독립적 존재다. 사람과 자동차는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사건은 독립되어 있지 않다. 파리는 황소 등에 붙어 있고 사람은 자동차에 타고 있다. 포함되어 있다.

논리의 오류는 사건의 불완전성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독립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어떤 사건의 일부를 구성하는 과정인데 그 점을 무시하므로 궤변이 가능하다.

인간의 언어사용은 투박하다. 사람들은 yes/no로 판정하려 한다. 청문회의 패널들은 ‘예/아니오로 답하시오’ 하고 증인을 윽박지른다. 무리다. 역설은 이 부분을 거칠게 다루는 데 따른 오류의 시정이다.

세부 연산규칙들

역설은 속임수가 아니라, 자연의 대칭성에 따른 타당한 법칙인데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므로 빚어진 혼선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섯 구분지로 된 세부연산규칙이 필요하다.

점에서 점을 칠 수 없고, 선에서 선을 칠 수 없다. 항상 입체에서 각을 치고 각에서 선을 친다. 작용과 수용 중에서 항상 작용 쪽이 높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낮은 포지션에 있는 수용측을 친다.

그러므로 일하기에 앞서 상위단계의 포지션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인간의 눈에 포착되지 않는다. 권투선수가 오른손 혹을 치려면 먼저 내밀었던 왼손 잽을 끌어당기면서 그 반동으로 쳐야 한다.

이때 몸통은 왼팔과 오른팔을 통일하는 상부구조다. 펀치는 팔이 아니라 한 단계 위인 몸통에서 출발한다. 동작은 항상 몸통을 거쳐 간다. 이 과정은 잘 이해되지 않고 포착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역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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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은 존재의 근본원리인 역설을 해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역설은 포지션 변경이다. 모든 운동은 높은 포지션에서 낮은 포지션을 치는 형태다. 그러므로 사건은 항상 높은 포지션에서 촉발된다.

● 배중률 - 이다/아니다(A면 B다) 전제와 진술의 연결판정

● 동일률 - 있다/없다  (A는 B다) 작용, 수용에서 주도권판정

● 모순율 - 같다/다르다(A≫B다)  공간적 대칭에서 방향판정

● 인과율 - 옳다/그르다(A→B다)  시간적 변화에서 순서판정

● 한정률 - 맞다/틀리다(A와 B다) 개별 정보의 사실성 판정

논리학에서는 배중률, 동일률, 모순율, 인과율이 알려져 있다. 구조주의 논리학은 한정률을 추가한다. 그리고 이들 각각을 별개의 규칙들로 보지 않고 하나의 커다란 논리구조 아래 통합시킨다.

한정률은 의미를 한정하여 사건을 완결시킨다. 한정률이 없으면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날아가는 화살은 매 시간단위 내에서 정지해있다. 무한소와 무한대 역시 계속 작아지거나 계속 커지는 것이 아니다.

무한을 성립시키는 비례관계 속에 정지해있다. 무한 개념도 하나의 포지션이다. 이것이 한정률이다. 비례관계가 주어면 ‘커진다’, ‘작아진다’는 술어다. 술어는 주어의 배를 탔다. 그 범위 안에 갇혀 있다.  

● 배중률 - 이다/아니다.. 하나의 독립적 사건인지 여부를 판정한다. 하나의 전제부와 진술부 사이의 대칭구조가 성립하고 있다.

※ A면 B다. ⇒ A(사과는)면 B(빨갛다)다. 전제부와 진술부를 단순 연결한다. 이때 링크는 하나여야 한다. 전제와 진술이 통합되어 하나의 독립적 사건을 이룬다. 순환성을 판정한다.

● 동일률 - 있다/없다.. 사건을 일으키는 작용측의 심과 구분지로 맞서는 수용측 날 사이의 대칭구조를 판정한다. 이때 심 1에 날 2가 대칭된다. 심이 날에 앞선다는 주도권 개념이 중요하다.

※ A는 B다. A(사과는)는 B(껍질이+빨갛다)다. 사과는 심 1, 껍질+빨갛다는 날 2다. ‘껍질+빨갛다’ 둘을 판정하는 기준이 심 포지션의 사과다. 전제부 심이 진술부 두 날을 규정하는 룰러다. 분할성을 판정한다.

● 모순율 - 하나의 공간적 방향에서 ‘전제부의 전체≫진술부의 부분’의 집합으로 이행한다. 높은 질서에 낮은 질서가 종속된다. 주어부에 종속된 술어부 내에서의 대칭구조를 판정한다.

※ A≫B다. A(사과는)에 B(껍질이+빨갛다)가 포함된다.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껍질이 빨간 특정한 그것은 사과에 포함되지만, 모든 사과가 껍질이 빨간 것은 전혀 아니다. 가역성을 판정한다.

● 인과율 - 하나의 시간적 순서에서 전제⇒진술로 이행한다. 낮은 질서가 사건의 시간적 진행을 따라, 전제의 높은 질서를 대체하고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진술인지를 판정한다.

※ A→B다. A(사과는)였는데 B(껍질이+빨갛다)가 되었다. 사과는 사과대로 있고 껍질+빨간 것은 그것대로 있을 수 없다. 사과를 소거시키고 껍질+빨간 것으로 완전히 대체시켜야 한다. 연속성을 판정한다.

● 한정률 - 하나의 결말을 남기고 사건이 종결되어야 한다. 사건이 연장되어서 안 된다. 낮은 질서를 구성하는 내용이 각각 최종적으로 결말을 짓고 끝단을 드러내는 팩트인지를 판정한다.

※ A와 B다. A(사과는)와 B(껍질이+빨갛다)다. 껍질과 빨갛다는 사과가 정한 바운더리를 벗어날 수 없다. ‘사과는 빨갛다. 빨간 것은 토마토다.’로 의미가 확장되어서 안 된다. 반복성을 판정한다.

배중률, 동일률은 전제부 위주로 판정하고 모순율은 전제에서 진술로 전환되며 인과율, 한정률은 진술부 위주로 판정한다. 항상 1을 따라간다. 논리학은 모든 국면에서 1이어야 하는 조건을 충족하는지 감시한다.

배중률은 하나의 사건인지를 판정한다. 동일률은 사건을 일으키는 작용측의 심이 하나인지를 판정한다. 주어가 하나여야 한다. 모순율은 공간적 방향성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판정한다.

인과율은 시간적 순서에서 진행이 하나인지를 판정한다. 진술부가 전제부를 완전히 대체해야 한다. 한정률은 최종적으로 진술되는 정보가 하나인지를 판정한다. 거기서 또 무언가를 남긴다면 오류다.

● 배중률 - 사건은 하나다.

● 동일률 - 주어는 하나다.

● 모순율 - 방향은 하나다.

● 인과율 - 순서는 하나다.

● 한정률 - 결과는 하나다.

구분지 다섯 중 어디라도 둘이면 오류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문장에서 의미가 함축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가 포지션에 따라 여러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의미가 확장되어 갖은 혼선이 일어난다.

알리바이

다섯 구분지는 통합되어 하나의 사건을 구성한다. 사건은 연역적으로 일어나므로 배중률부터 시작되지만 인간의 인식은 귀납논리를 따르므로 다섯 번째 한정률에서부터 거꾸로 추론을 시작한다.

● 배중률 - 언제/어디서..    하나의 시공간적 알리바이를 깬다.

● 동일률 - 누가/무엇을..    하나의 작용측에서 범인을 특정한다.

● 모순율 -  왜/어떤..       범인에서 피해자의 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 인과율 - 어떻게/하여지게. 하나의 수용측에서 피해자를 특정한다.

● 한정률 - 하였나/되었나..  하나의 결과에서 단서를 얻는다.

한정률은 사건을 정지시켜 단서를 확보한다. 버스가 계속 달리고 있다면 단서를 얻을 수 없다. 화살이 계속 날아가고 있다면 단서를 얻을 수 없다. 단서가 확보되는 이유는 어떻게든 사건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범인이 현장에 꽁초를 남겼다면 꽁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꽁초투척사건은 종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탐정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한정률에서 확보된 단서에 인과율을 적용하여 피해사실을 확보하게 한다.

작용반작용에 따라 반작용측에서 인과율로 피해사실을 확보하고 피해자를 특정한다. 비가역성을 적용하여 모순율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방향을 튼다. 범인은 피해자를 찌를 수 있지만 피해자는 범인을 찌를 수 없다.

동일률을 적용하여 작용측에서 범인을 특정한다. 배중률을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범인의 알리바이를 깨뜨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건의 추론은 완결된다. 모든 과학의 탐구는 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 추론의 순서 - 한정률≫인과율≫모순율≫동일률≫배중률

● 추론의 성과 - 단 서 ≫피해자≫흉 기≫가해자≫알리바이

인과율은 결과가 원인을 대체함이다. 원인과 결과가 대칭을 이루므로 원인이 중단되는 시점부터 결과가 시작된다. 범인이 흉기로 찔렀다면 범인의 찌르기는 원인이고 피해자의 상처는 결과다.

범인의 찌르기가 소멸하고 피해자의 상처가 확정된다. 원인이 100퍼센트 결과로 대체된다. 모순율은 원인에서 결과로 방향을 튼다. 그것은 흉기다. 흉기가 범인의 찌르기를 피해자의 상처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절대적으로 일어난다. 그 방향은 항상 일방향적이다. 범인이 피해자를 찔렀는데 범인이 찔리는 경우는 없다. 모순율에 따라 항상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찔린다.

이 논리를 이용하여 피해자의 상처에서 범인의 찌르기를 특정할 수 있고 그 매개인 흉기를 증거물로 제시할 수 있다. 동일률은 범인이 주장하는 ‘찔렀지만 나는 범인이 아니다’는 궤변을 깬다.

동일률에 따라 심 1이 날 2를 지배한다. 범인 1이 칼+찌르다의 2를 포괄한다. 칼+찌르다 2는 범인 1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범인이 특정된다. 찌른 자가 범인인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다.

배중률은 범인의 알리바이를 깬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연상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이 두 사람이거나, 혹은 하나의 사건이 두 사건이라면 범인은 ‘내가 죽였지만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둘러댈 수 있다.

내가 죽인 것은 이 사건이고 그가 죽은 것은 저 사건이라 우긴다. ‘내가 찔러죽인 건 맞지만 그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배중률이 사건을 하나로 확정하기 때문에 범인의 둘러대기는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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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논리학은 차례로 판정되는 다섯 구분지가 하나의 사건으로 통일되는 입체적 모형의 모든 국면들에서 하나의 사건, 하나의 심, 하나의 방향, 하나의 순서, 하나의 결과인지를 규명하고 판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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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전 4-5 구조주의 논리학 image 김동렬 2008-12-29 3705
20 발전 4-4 (계속) image 김동렬 2008-12-29 4030
19 발전 4-3 구조주의 철학, 구조주의 세계관 image 김동렬 2008-12-29 5855
18 발전 4-2 사물의 구조, 구조론 사전 image 김동렬 2008-12-29 5040
17 발전 4-1 극한의 법칙, 자연의 구조 image 김동렬 2008-12-29 5430
16 정립 3-5 보편이론, 일반이론, 분류이론 image 김동렬 2008-12-29 6740
15 정립 3-4 유도이론, 집적이론 image 김동렬 2008-12-29 4487
14 정립 3-3 다섯가지 세부이론 image 김동렬 2008-12-29 4778
13 정립 3-2 평형계의 작동 image 김동렬 2008-12-29 5217
12 정립 3-1 구조체의 얼개 image 김동렬 2008-12-29 5805
11 입론 2-4 개념정립, 존재론과 인식론 image 김동렬 2008-12-29 5690
10 입론 2-3 구조론의 가치, 구조론의 세계관 김동렬 2008-12-29 3841
9 입론 2-2 구조란 무엇인가? image 김동렬 2008-12-29 3797
8 입론 2-1 비반복성의 이해, 일치와 연동의 법칙 image 김동렬 2008-12-29 4736
7 총괄 1-4 구조론을 얻다, 깨달음과 구조론 image 김동렬 2008-12-29 5072
6 총괄 1-3 상식의 오류들, 구조주의 역사 김동렬 2008-12-29 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