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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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617 vote 0 2008.12.29 (12: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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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 군이 있기 앞서 구보 씨가 있었고 구보 씨가 있기 전에 달마 선생이 있었다. 짜라투스트라가 어떻게 말하였던 간에 그것은 니체의 언설에 불과하다. 어쨌든 달마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기를 부여하자


우리에겐 꿈이 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의 꿈이다. 어디서 그 답을 찾을 것인가?


집단의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서 개인의 동기유발을 중시하는 시대로 지금 역사는 크게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버스가 더 효율적이지만 사람들은 한사코 승용차를 이용하려 든다. 왜인가? 버스의 경제적 효율성보다 승용차의 접근성이 더 개인의 동기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이다. 콩나물 값이라면 100원이라도 깎으려고 애를 쓰지만 여행이라도 나섰을 때는 비싸더라도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왜인가? 그것이 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여행이라면 노는 것이 목적이다. 놀 때는 확실하게 놀아야 그 목적과 맞아떨어진다. 비용을 의식한다면 분위기를 깨고 만다. 놀고자 하는 목적을 배반하게 된다.


세상은 변한다. 집단의 조직을 통한 효율성 보다 개인의 동기유발이 더 중요한 사회로 가고 있다. 그동안의 변혁운동은 조직을 통한 집단의 효율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이는 버스의 효율성과 같다. 이 방법은 이제 먹히지 않는다.


더 개인화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과 밀접한 것에서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개개인의 인격적 존엄이다.



강한 개인을 만들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2차대전에 대한 환멸의 결과였다. 그것은 철저한 환멸이었다. 왜 환멸이었던가? 2차대전은 인류가 무제한적인 집단의 효율을 추구한 결과로 빚어진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개인에 있어서의 동기부여다. 개인이 강해야 한다. 나약한 개인들이 겁먹고 우르르 몰려갈 때 재앙이 빚어졌던 데 따른 반성이다. 사르트르는 강한 개인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또 한번 환멸해야 한다. 부시의 전쟁책동에 환멸해야 하고 산업화의 무한경쟁에 환멸해야 한다. 철저한 환멸의 끝에서 개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소통을 이루자


지금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개혁의 대열에 참여하기 위한 동기부여다. 둘은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의사소통이다.


조직하지 않는 방법으로 조직하기, 통제하지 않는 방법으로 통제하기, 지배와 명령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의사를 결집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다.


정보화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졌다. 독립적인 개인의 수평적인 연대가 중심이 되는 시대는 가능하다.













이 책을 읽는 법


이 책은 필자 특유의 모자이크식 글쓰기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느 페이지부터 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뒤에서부터 읽어도 되고 혹은 중간에서부터 읽어도 좋습니다.


단 뇌를 비워야 합니다. 고정관념과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이 책의 어휘와 개념들은 독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달마의 어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논문이 아니고 학술서도 아닙니다. 비전문가의 잡다한 상식에 기초하여 씌어졌으므로 팩트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면 바로잡아 훗날 정식으로 출판할 때 보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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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동쪽을 보라

- 다시 이상주의를 말하다 -



이상주의가 현실주의다

마지막 이상주의자는 누구인가?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말할 수 있다. 그의 외침은 짧았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20세기를 흔들어 놓은 두 사건을 든다면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킹 목사의 민권운동을 말할 수 있다. 또한 소로우가 쓴 ‘시민의 불복종’에 영향 받은 바 된다.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환경운동의 등장이다. 소로우의 목소리는 이 시대의 환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렇듯 21세기 인류문명은 알게 모르게 소로우의 설계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명사 차원의 거대한 기획이다. 역사의 설계도를 그려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되는 현실주의는 무엇인가? 이상주의의 설계도를 참고하여 밑에서부터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현실은 본래 그 거리가 멀지 않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설계와 건축의 차이와 같다. 둘은 언뜻 대립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로 대립되지 않는다. 설계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건축가가 추구하는 효율성은 서로 모순되는 듯 하지만 모순이 아니다.


우리가 설계가의 마음을 잃을 때 건축도 죽는다. 알아야 한다. 이상이 현실이다. 이상이 죽은 때 현실도 죽는다. 인간으로 하여금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게 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부단히 호흡하게 하는 것은 이상이라는 이름의 동기부여다. 이상이 현실을 끌고 가는 힘이다. 



21세기는 인간혁명의 세기다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인간을 계발하는 방법도 있다. 공자, 묵자, 플라톤, 마르크스의 견해가 전자에 가깝다면 노자, 석가, 소로우, 루소의 방법은 후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이라면 충분히 실험되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실험이 그러하다. 집단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의 한계가 공자의 한계이고 플라톤의 한계이며 묵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20세기가 사회혁명의 세기라면 21세기는 인간혁명의 세기다. 인간을 계발하는 방법이라면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소로우의 도전은 아직 시도되지 않았기에 실패하지도 않았다.


왜 이 시대에 와서 소로우가 주목되는가? 소로우가 여섯 번 고쳐 쓴 그 작은 책자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디와 킹 목사 이후 한동안 맥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던 ‘소로우의 아이들’이 21세기 이 시대에 와서 더욱 활발한 몸놀림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로우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철저한 개인의 관점에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소로우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일 수 있다. 집단을 조직하는 방법이 한계를 보인 만큼 이제 개인의 각성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붙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에 와서 이상을 잃어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동기부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20세기 방식의 동기부여가 그 집단주의 성향으로 하여 우리네 개인의 삶과 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로부터의 변혁은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인간혁명으로 다시 시작한다.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이상주의를 말한다. 



개발독재의 유산 집단주의

세상의 눈은 다시 동쪽을 주목하게 되었다. 왜인가? 불교나 유교, 도교 등 동양사상에 공통된 핵심 코드는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이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서구를 개인주의 문화권으로 치고 동양을 집단주의로 도식화하는 잘못을 범하곤 한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서구의 개인주의 성향은 근대화 이후 나타난 산업화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문명사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산업화는 거대한 인류사 안에서 짧은 주기를 가진 하나의 사이클에 지나지 않는다. 더 긴 호흡의 주기를 가진 문명의 사이클이 있다. 기독교문명과 유교문명으로 비교할 수 있다. 유목민 문화와 농경민 문화로 비교해 보아도 좋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업화 과정에는 집단주의 성향이 두드러진다. 포드시스템의 효율성에 자극 받아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로 엮어보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집단주의 역시 서구에 비해 산업화가 늦었던 이유로 나타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산업화에 있어서 서구를 따라잡고 있는 지금 우리는 개발독재 시대의 나쁜 유산인 집단주의를 극복하여 가고 있다. 산업화 다음에는 정보화다. 정보화 시대에는 집단의 효율보다 개인의 창의력을 주목하게 된다. 


21세기 문명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크게 방향을 틀고 있다. 이제 동양의 농경민 문화가 가진 본래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빛을 발할 때가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를 망라하고 동양적 전통에 공통된 깨달음의 코드가 소로우의 개인주의 성향과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집단은 가고 개인은 온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기차보다는 버스를 이용하고 버스보다는 승용차를 이용하게 된다. 게시판보다 블로그가 더 각광을 받고 집단의 힘을 강조하는 시위운동보다 개인의 힘을 강조하는 동양적 성찰이 강조된다.


물론 공자와 플라톤의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는 집단의 가능성과 개인의 가능성이 교섭하면서 얻어지는 양자간의 긴장관계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진보한다. 집단주의는 비판되어야 하지만 공자와 플라톤이 말했던 이상적인 공동체의 꿈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상적인 공동체는 인격적 측면에서 충분히 계발된 인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곧 이상적인 인간들에 의해 이상적인 공동체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조직되지 않는 형태의 조직이어야 한다. 회의나 토론이 아니어야 한다. 지배와 명령이 아니어야 한다. 억압과 통제가 아니어야 한다. 이심전심에 의한 자발적인 역할분담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로 간다.


조직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조직보다도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가 지배하는 사회는 가능하다. 무엇이 필요한가? 개인의 온전한 자유가 필요하다.



인간은 더 자유로워졌다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삶이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향유했던 에덴동산에서의 삶보다 더 행복하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가 신장된 것은 분명하다. 요는 삶의 목적이 곧 행복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천만에.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자기실현이다. 무엇에 의해 가능한가? 자유다. 인류는 더 행복해지지 않았지만 더 자유로워졌다. 그 자유에 의해 자기실현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전근대가 있고 근대가 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자유의 수준이 달라졌다. 자기실현의 가능성은 높아졌다. 행복의 책임은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 각자의 몫으로 돌려졌다.



초인도 죽었다

전근대는 인간이 폭력에 의해 억압받던 시대였다. 인간이 초라해진 만큼 신은 위대해졌다. 노예의 시대이자 신의 시대였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신을 대신하여 초인을 생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근대는 무엇인가? 산업화의 결과로 인간은 절대적인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더 강한 힘을 찾아 떼로 몰려다니고 있다. 절대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폭력적 힘을 숭배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자유를 희구하면서도 막상 주어진 자유 앞에서는 두려워하며 도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영웅을 찾아 혹은 초인을 찾아 혹은 정신적으로 의존할 어떤 대상을 찾아 무리 지어 몰려다니곤 한다. 부족하다. 더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독립을 고립으로 알고 자유를 소외로 알고 해방을 버려짐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파시즘이다. 개인의 각성이 아닌 집단의 조직에서 답을 모색하는 마르크스의 이상주의 역시 일정부분 파시즘의 혐의가 있다.


산업화에 이은 정보화다. 21세기는 수평적 네트워크로 무장한 독립적인 개인의 시대이다. 그들은 절대폭력에 주눅 든 전근대의 노예가 아니고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근대의 슈퍼맨 추종자들도 아니다.


바야흐로 21세기다. 초인도 죽었다.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왔다.



21세기는 참사람의 시대

소로우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이상주의라는 건축에 있어서 그 원자재는 개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계발을 전제로 하지 않는 변혁의 시도는 부실공사와 같다. 개인이라는 건축자재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류의 이상은 각성된 사람, 열려있는 사람,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에 의해 달성될 것이다. 그들이 이상적인 문명의 건축을 가능하게 할 낱낱의 벽돌이 된다.


그대 자신을 향하여 부단히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면의 각성을 이루고 있는가? 바깥을 향하여 열려있는가? 자유를 얻어 독립하고 있는가? 세상 모두와 폭넓게 연대할 의지를 갖추고 있는가?


왜 유럽에서 라마교 선풍이 일어나고 있는가? 왜 서구에서 각별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고 있는가? 왜 21세기에 와서 다시 설계사 소로우가 주목되는가? 이유가 있다. 집단의 시대를 끝막고 개인의 시대를 열어젖힐 신인류가 출현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영웅을 찾아 몰려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독립적인 개인들이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조직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통제된 군대보다도 강력하다.


비록 소수이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깥을 향하여 열려있는 사람들이 있다. 각성된 그들 신인류를 나는 ‘참사람’이라 부른다. 



게시판 지고 블로그 뜨다

왜 기차의 시대는 가고 자동차의 시대가 오는가? 왜 버스는 지고 승용차가 뜨는가? 왜 그 모든 흐름들이 점점 더 개인화 되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여 가는가? 집단보다 개인에서 더 많은 효율성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집단의 조직에서 얻어지는 효율보다 개인의 창발성에서 얻어지는 효율이 더 크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동기부여’의 측면에서 볼 때 버스보다 승용차가 더 그 동기와의 호응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점차 동호회나 게시판의 광장문화에서 탈피하여 일 대 일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하는 미니홈피와 블로그, 메신저 등으로 개인화되어 가고 있다. 이는 결코 일회성의 우연이 아니라 이 시대의 거대한 트렌드이다.


한때 공공의 광장에서 대화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개인의 거실에서 통화하고 있다. 전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메신저와 블로그와 미니홈피가 속속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개인이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 역할에서 적극적인 생산자 역할로 임무를 변경하게 된다. 이는 종이신문과 구분되는 인터넷만의 특징인 쌍방향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잘 조직된 100명이 생산하는 효율성보다 뛰어난 한 명의 천재가 창안한 아이디어가 더 많은 성취를 이뤄내는 시대가 온다. 예컨대 촛불집회가 그러하다. 플래시몹이 그러하고 학내에서 신앙선택의 자유를 촉구한 강의석군의 단식투쟁이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되지도 않는다. 그 자발성의 힘이 아름답다.


구체적으로는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시판에서 정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당한 글쓰기의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는 누구라도 손쉽게 조작할 수 있다.


개인의 미디어 접근성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 이러한 작은 흐름들이 모여서 거대한 조류를 만들어 낸다.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이면에 필연적인 어떤 법칙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누구도 이 거대한 시대의 조류를 거스를 수 없다.



도시 가운데 섬이 있다

‘도시의 공기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전근대에 사람들이 떠들썩한 시장이나 왁자지껄한 광장에서 자유를 느꼈다면 21세기에 와서 인간은 시끄러운 도시에서 도리어 억압을 느낀다.


이제는 도시가 섬이 되었다. 이제는 도시가 되레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 인터넷 기업 ‘다음’이 제주도로 본사를 이전하려는 계획을 세운 데 이어 다른 인터넷 벤처들도 다투어 도시를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이런 때 잊혀졌던 동양의 가치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동양의 깨달음과 명상이 주목받고 있다. 달마의 선(禪)이, 노자의 무위가, 주자의 도학(道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를 한때의 오리엔탈리즘 바람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왜인가? 불교사상에는 특별히 개인주의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아예 도시를 반대하고 있다. 법가의 집단주의에 반대하고 개인적인 인격의 완성을 추구한 점에 있어서는 유교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소로우의 외침이 이 시대에 더 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철저한 개인주의자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개인이 주목받는 시대가 되었다.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성철스님이다. 육조 혜능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불교를 대개 통일한 선(禪)불교의 최종결론이 온전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에 있음은 물론이다.


현대인의 이상은 점차 집단의 이상이 아닌 개인의 이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개인이 강한 나라가 경쟁력을 나타내는 시대가 되었다. 혼자일 때 강한 한국인의 강점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온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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