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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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502 vote 0 2008.12.29 (12:50:27)


개인주의자 한국인들

서구가 개인주의라면 동양은 집단주의라는 식은 편견은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진실을 말하자.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발독재의 경향이 집단주의를 낳았다. 탈산업화 그리고 정보화의 경향이 개인주의를 요구한다.


사회는 점차 집단의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에서 개인의 창의를 추구하는 시대로 진화한다. 포드 시스템 이후 집단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대규모의 효율을 생산하는데 성공한 사례가 없고 모택동의 문화혁명 이후 집단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역사의 변혁을 성공시킨 예는 없다.


인간계발이야말로 문명의 최종적인 종착역이 된다. 그리고 한국인들이야말로 인간계발에 유리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흔히 비교되는 일본인 특유의 집단주의는 전혀 본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유목민이었던 게르만족의 집단주의 역시 본받을 일이 아니다.


마을사람들 중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마을사람 전체를 징벌하는 문화는 일본의 것이다. 단 한 사람이 반역을 저질러도 마을 전체가 소각된다. 독립군을 추적할 때 사용했던 초토화의 수법은 일본 역사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100명의 부대원들 중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잘못을 저지른 병사를 징벌하는 대신 무작위로 10명을 추첨하여 그 10명을 대신 처형하는 방법으로 집단을 징벌하는 것은 로마군의 관행이다. 이 끔찍한 단체징벌 습관은 ‘현대전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었다.


훈련 중 잘못을 저지른 병사를 앞으로 불러내어 곤장을 치는 것이 동양의 풍속이라면 단 한 명의 병사가 잘못을 저질러도 부대원 전체가 처음부터 다시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 프러시아군의 관행이었다. 가공할 집단주의의 화신이었던 이차대전의 독일병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알아야 한다. 서구의 개인주의를 비난하고 일본의 집단주의를 추종했던 박정희의 파시즘에 우리 모두가 조금씩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본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한국인을 길들여 그 영혼을 약탈하고 노예로 순치시켜 가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다

다시 소로우의 월든을 생각한다. 이상주의가 그리는 참된 사회는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은 사회’이다. 이는 인간의 계발, 곧 개개인의 각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산업화는 날로 인간을 옥죄어오고 있다.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영역은 물리 공간에서 더욱 비좁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타인의 삶에 참견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다르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어깨동무하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참사람만이 가능하다.


공자는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일흔이 되어서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힘든 거다. 그거 벅차다. 더 쉬워져야 한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근본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그것을 굳이 문제 삼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예단하며 방어를 빙자한 공격을 일삼기 때문이다. 안 된다. 전쟁광 부시짓이 그러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의 지혜는 충분히 보급되고 있다. 그것은 문명의 이기에 의해 가능하다. 주어진 문제를 칼로 잘라내고 톱으로 절단하는 방법이다. 문명이 칼과 도끼를 공급함으로써 우리는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불행한 이유의 대부분은 가난이나 질병과 같은 문제들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부대끼며 굳이 타인과 비교하고 또 비교 당하기 때문이다. 동성애 문제가 그러하고 낙태 문제가 그러하다. 구태여 그것을 문제 삼으려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구와 수단이 필요하지만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 삼지 않는 데는 오로지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 사회는 가능하다. 개인의 이상이 꽃피우는 시대는 도래한다.


잘못 가고 있는 탈근대담론

사실이지 우리나라에도 탈근대담론이 소개된 지는 제법 되었다. 아도르노니 푸코니 데리다니, 들뢰즈니 하는 이름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것은 번역에 불과하다. 그들의 작업에는 무언가 알맹이가 빠져있다.


논의는 잘못 가고 있다. 개인주의는 동양의 가치 중에서도 깨달음의 나라이며 은자의 나라인 한국에서의 고유한 가치이다. 집단주의는 게르만족의 유목민 전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서구의 가치다.


집단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 본래 우리의 가치였던 개인주의를 역수입한다는 것이 우습다. 우리 자신에 대한 편견으로 무장한 채 있지도 않은 동양의 집단주의를 매도하고 아직은 설익어 어설픈 서구의 미성숙한 개인주의를 숭배하는 탈근대담론의 매판 길드 상인들을 나는 서구추종 사대주의자로 여긴다.


물론 여전히 전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영웅을 숭배하고 초인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 자신의 각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는 즉 개인의 각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서구의 개인주의는 요즘의 ‘웰빙 열풍’과도 같이 너절한 것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미국에만 가면 어떤 동양의 가치들도 처세술로 둔갑해 버리곤 한다. 미국에서 명상은 셀러리맨의 영업실적을 북돋우는 수단이 되고, 요가는 비좁은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의 건강관리를 위한 방편이 된다.


미국인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는 유능한 CEO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석가 또한 초거대 다국적 기업의 유능한 오너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 채식주의는 사교계의 유명인사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본래 우리의 선점한 가치였으나 단지 산업화에 뒤쳐졌다는 이유로 서구에서 역수입된 그들의 철학적 토대가 빈곤하기 짝이 없는 탈근대담론은 미국에서 처세술로 유행하는 ‘유능한 CEO 공자의 경영학’이나 ‘뛰어난 재담꾼 노자 유머집’ 따위와 마찬가지로 진짜가 아니다.  


착각해서 안 된다. 공자는 CEO가 아니다. 노자는 개그맨이 아니다. 선(禪)은 넌센스 퀴즈가 아니다. 공자는 겨우 10여 명을 거느렸을 뿐이고 노자는 늘 혼자였다. 석가 역시 생의 많은 부분을 혼자인 채로 감당하였다. 그들은 철저히 독립적인 개인들이었던 것이다.



구루병에 걸린 선지자들

모세의 출애굽 사건은 개인의 구원이 아닌 집단의 구원에 해당한다. 말세와 심판과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그 전통은 분명히 집단의 사고를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 동양정신에 있어서 구원은 집단이 아닌 개인의 상승으로 설명된다.


석가의 해탈은 개인의 자기구원이다. 공자의 군자(君子) 역시 집단이 아닌 개인의 실천에 의해 담보된다. 동양의 개인주의적 태도야말로 기독교 문화에 찌든 서구정신에 비해 확실히 경쟁력이 있는 인류의 보편가치가 된다.


물론 우리의 전통에도 많은 잘못들이 있다. 1천 5백년 전에 원효성사가 이미 자유를 설파하고 개인을 말했는데도 오늘날 조계종의 승려들은 짬밥의 법칙에 얽매여 하루라도 먼저 들어온 선배와 고참을 섬기기에 여념이 없다. 육조 혜능이 이미 개인을 말했는데도 왜곡된 선불교의 전통이 잘못 인도한 즉 조사(祖師)에 대한 숭배와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요하고 있다.


명상과 관련한 단체도 많고 웹사이트도 있지만 대개 ‘구루병(guru病)’에 걸려있다. 구루는 존경을 바쳐야 하는 스승을 의미한다. 스승을 섬기고 계율을 지키고 선각(先覺)이니 뭐니 하며 내부의 계급을 두는 건 진짜가 아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집단주의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늦게 배운 포드 시스템의 효율성에 현혹되어 넋을 잃었다. 박정희 무리의 군사문화에 오염되었다. 착각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진짜가 아니다.


온전히 혼자일 수 있어야 한다. 독립적인 개인으로 우뚝 서야 한다. 먼저 해방이 있고 그 다음에 자유가 있을 것이다.



리버티와 프리덤

해방 다음에 자유가 있다. 리버티(liberty)는 곧 해방(解放)이니 이는 맞서 싸우고 이겨서 권리(權利)를 쟁취하는 것이다. 프리덤(freedom)은 자유이니 이는 그냥 내 맘대로 하는 것이다. 둘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 권리(權利)들에 의해 담보된 프리덤이 진짜이고 권리의 보장이 없는 프리덤은 가짜이다. 리버럴은 그 권리를 획득하는 절차가 된다. 권리 없는 자유는 허상에 불과하다.


자유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어야 한다. 요는 그 실천의 수단과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이다. 자유의 크기는 권리의 크기에 비례한다. 권리라는 이름의 실천수단과 물리 공간의 확보를 전제하지 않은 프리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하와 더불어 공명하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천하의 나아감에 기여하는 것이다.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천하와 나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다. 둘째는 천하와 공명(共鳴)하여 나만의 울림과 떨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립공간이다.


그로 하여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소통(疏通)이다. 그 네트워크와 독립적인 물리공간의 확보가 전제되지 않는 프리덤은 가짜이다. 진짜를 위해서는 권리라는 형태의 네트워크를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리버티가 필요하다.


일찍이 유마힐(維摩詰)은 갈파하기를 ‘대중이 앓으니 보살도 앓는다’ 했다. 천하의 울림에 함께 공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이 독립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다는 반증이 된다.


울림과 떨림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노예로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다. 많은 경우 자유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권리라고 써야할 것을 잘못 쓴 것이다. 이는 권리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의 빈곤에서 비롯한다.



자유는 소통의 가능성

전근대에 인간은 노예였다. 근대는 해방이었으나 그것은 물리적 해방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자유는 여전히 인간이 도달하여야 할 미완의 가치로 남아있다. 내 맘대로 해도 된다지만 권리가 없으니 아무 것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리버티의 크기는 권리의 총합과 같다. 소유권이 없고 생존권이 없고 인권이 없고 환경권이 없이 자유가 없다. 이래서는 고작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에 성공할 뿐이다. 리버티에 의해 담보되지 않은 프리덤은 어설픈 것이다.


우리는 권리의 부재로 하여 반쪽짜리가 된 자유를 힘겨워 한 끝에 자진하여 독재자에게 반납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거나 혹은 감옥 안에서의 자유일 수 있다. 진짜가 아니다.


진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의 무위에 의해 제어되는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것이 전체적인 것과 더불어 공명(共鳴)하는 것이다. 온전히 각성된 사람만이 그러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먼저 해방되어야 한다. 밖으로 난 창을 열어야 한다. 마음의 빗장부터 풀어야 한다. 타인의 삶에 참견하고 싶은 유혹을 견뎌내어야 한다. 타인을 밟고 그 위로 올라서고자 하는 경쟁의 본능을 떨쳐버려야 한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비참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위로 상승하여야 한다. 내 안에 감추어진 자유를 회복하여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 여기는 것 보다 더 위대하다.


천하가 아플 때 당신도 함께 앓는다면 당신은 그 자유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유는 참된 소통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아니한다.



삶은 내 안에 숨은 가능성 드러내기

이상주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완전성을 추구한다. 인격의 완전, 삶의 완전, 사회의 완전, 가치의 완전, 그리고 진리의 완전을 지향한다. 질문들이 주어진다. 완전한 인격은 어떤 것인가? 완전한 삶은, 완전한 사회는, 완전한 가치는, 완전한 진리는 무엇인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문명이란 인류가 힘을 합쳐 이 질문들에 하나씩 답해가는 과정이다. 문화란 인간의 삶 속에 숨어있는 그 완전의 가능성들을 바깥으로 노출시키는 방식이다. 한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에 도달하기다. 완전한 인격, 온전한 인간의 존엄성에 도달하기다.


우리가 꿈꾸는 진보는 무엇인가? 하나의 공동체가 사회화의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를 모색하기다. 왜 사는가? 한 인간의 내부에 숨어있는 그러한 완전의 가능성들을 겉으로 드러내고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왜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갈증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 때문이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허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되어야 한다. 가능한가? 인간의 내부에 숨은 완전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무엇이 가치인가? 미(美)는 그 완전성의 작은 조각들을 의미한다. 선(善)은 그 완전성의 조각들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징검다리 놓아 사회를 향해 나아감을 의미한다. 진(眞)은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가 자연과 소통할 때 얻어지는 근원의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성(聖)은 그 본래의 완전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궁극의 포즈는 무엇인가?

애초에 하나의 완전성이 존재한다. 그 완전성의 부스러진 작은 조각들을 발견할 때 인간은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 울림과 떨림에 감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유혹되어 이끌려 손잡고 함께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열정이다. 그 열정에 의하여 달아오른 즉 씩씩한 호흡의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다. 그 열정과 사랑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떳떳함이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포즈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의 포즈이다. 곧 성(聖)이다.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온전한 자연스러움, 한없는 떳떳함, 그 완전한 평정에 도달할 때 인간의 자유는 완성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실낱같은 완전성의 작은 단서들을 모아 어둔 밤길을 헤치고 나아간다. 그때 우리 내면에서의 응답함이 곧 우리의 가쁜 호흡이고 뜨거운 열정이다. 그때 우리는 들뜨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본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행복해진다.


최후의 가치는 성(聖)이다. 그것은 궁극의 포즈이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도달 가능한가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독립된 인격의 소유자인 개인들이 미(美)의 작은 단서를 들고, 선(善)의 네트워크의 인도를 받아, 진(眞)의 자연스러움에 도달한 바 천하와 더불어 공명함으로써 본래의 성(聖)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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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부유한 일본 가난한 일본인

- 인류학으로 본 권력의 작동원리 -



부유한 일본 가난한 일본인

일본은 부유하지만 일본인들은 가난하다는 말이 있다. 일본의 자치단체들은 많은 체육시설과 문화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의 대기업들도 사원주택이나 연수원 혹은 사원전용 휴양시설 등의 형태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개인들은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국가도 부유하고 회사도 부유한데 개인들은 작은 집에 소형차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일본인들은 기업과 공공기관의 그러한 과소비에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의 소비성향은 개인지향이 아닌 집단지향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특히 발달하고 있는 ‘마쓰리’ 등의 지역축제문화도 일종의 집단적인 과소비가 된다. 그런데 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러한 집단지향의 소비문화에 대해 불만을 갖기는커녕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러한 태도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어떻게 보면 사회주의적이기도 한 일본방식의 소비형태와 그 문화가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비해 훨씬 더 개인지향의 소비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렇다 할 마을축제도 없고 자치단체의 체육시설은 그냥 놀리고 있는 한국의 개인지향적 소비문화가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멜다를 소유한 필리핀 민중

영국은 부자 나라이다. 많은 영국인들이 왕실의 막대한 지출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필리핀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필리핀은 결코 부자나라가 아니다.


과거 마르코스의 독재치하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자들이 미스필리핀 출신의 영부인 이멜다 여사에게 물었다.


“화려한 대통령궁에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멜다의 대답이 걸작이다.


“가난한 필리핀의 민중들은 멋진 영부인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화려한 대통령궁에 걸맞는 멋진 영부인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따는 그것도 말은 된다. 문제는 국가가 가난할수록 이러한 가상의 심리적 소유형태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영국은 부자 나라이다. 영국인들이 왕실의 막대한 지출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필리핀 민중들이 실제로 그러한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한국의 대가족 사회주의

과거 대가족 중심 가부장제 하에서의 우리나라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가문의 재산은 많았지만 만석지기의 곳간에 가득한 재물은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사랑채에 머무는 식객들을 위해 소비되곤 했다.


식구들은 보리밥을 먹어도 식객들에게는 쌀밥을 대접하는 풍속이 있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식객들의 입소문에 의해 가문의 평판이 유지되곤 했다. 그 평판 덕분에 가문은 양반사회 안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문은 매년 정기적으로 화려한 잔치를 벌인다. 풍물패와 광대패를 부르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잔치떡을 나눠준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을굿을 후원하고 사찰에 시주를 바치기도 한다. 대가족 사회주의(?)의 비능률이라 할 수 있다.


화폐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다. 가문의 부가 대가족의 구성원 개개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고 양반사회 안에서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로 낭비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가문의 부가 노동에 의해 창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를 배출하는 방법으로 양반집단 안에서 평판을 얻어 유력한 가문과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다.


지출이 지나쳐서 곤궁해지면 신분이 낮은 상민집안의 며느리를 맞아들이면서 지참금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부를 유지하곤 했다. 이는 양반가문의 위세를 이용한 일종의 약탈행위가 된다. 멀지도 않은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가족이 해체됨에 따라 가문의 위세를 과시할 필요 또한 없어졌다. 화폐가 유통되고 있다. 노동을 통해 소득을 획득한다. 소득은 가부장이 사회주의 방식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노동을 통하여 획득하고 소비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사실은 지극히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일백 년 전의 일이 아니다. 불과 30년 전 까지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 잔재가 한국의 보수주의 문화의 뿌리로 남아있다. 일본의 집단주의 문화가 비판되어야 하듯이 한국의 대가족 사회주의도 비판되어야 한다.



권력을 소유하는 인도네시아인들

유인원 연구로 잘 알려진 세 명의 여류과학자가 있다. 케냐로 간 침팬지의 제인 구달, 콩고로 간 고릴라의 다이안 포시, 그리고 인도네시아로 간 오랑우탄의 비루테 골디카스가 그들이다.


이들 중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을 찾은 오랑우탄의 골디카스 박사는 아프리카로 간 앞의 두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현지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도네시아는 연구환경이 비교적 좋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뒤늦게 인도네시아를 찾은 다른 많은 학자들은 현지적응에 실패하고 있다. 골디카스 박사의 성공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녀는 상당한 인류학의 지식을 활용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인류학의 보고이다. 문명사회의 규범과 원시의 본능이 공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마을마다 ‘권력’이 존재한다. 그 권력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상징물도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잡는다’고 표현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 구체적인 권력의 상징물을 촌장들이 손으로 잡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국가대표 권력은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부인이 손수 짠 인도네시아 국기라고 한다. 왕이 권력의 상징인 왕홀을 잡듯이 인도네시아의 역대 권력자들은 수카르노의 부인이 손수 짠 국기를 잡는 것으로 권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대개 오래된 마을의 유물이 권력의 상징물로 되어 촌장의 집에 보관되고 있다. 그 상징물의 이름이 권력과 동의어가 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권력을 말할 때는 그 상징물의 구체적인 이름을 말한다고 한다.


외부인이 마을을 찾을 때는 마을 전래의 복잡한 격식을 따라야 한다. 외부인이 특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반드시 ‘권력’을 잡고 있는 촌장의 집을 먼저 방문해야 한다는 점이다. 규칙을 어기고 권력자인 촌장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은 채 함부로 마을을 드나들었다가는 주민들의 비협조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촌장님 앞에서 건방지게 한쪽 무릎을 세우는 실례를 범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이 달아나는 수가 있다. 동작 하나 하나에 신체언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무릎을 세우는 동작이 그들에게는 적대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바디랭귀지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도둑이 현장을 들켰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재빨리 경찰서로 도망치는 일이다. 주민들이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날이 휘어진 정글도로 현장에서 도둑의 목을 쳐버리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글의 규범이 국가의 법보다 앞서는 형편인 것이다.


골디카스 박사가 오랑우탄을 연구하던 중의 일화로 이런 것이 있다. 현지에서 고용한 노동자들이 별 이유도 없이 박사에게 대드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 경우 면전에서 큰 소리로 ‘넌 해고야!’ 하고 말하여 즉시 쫓아 보내야 한다. 그 노동자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나중에 슬그머니 재고용하면 된다. 요는 그 노동자의 항명이 인류학적인 어떤 이유에 의한 ‘권력 확인작업’이라는 점이다.


원숭이 무리들은 아침마다 서열대로 ‘마운팅’이라 불리는 권력확인 작업을 한다.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원숭이 등에 올라타는 행동 말이다. 침팬지도 매일 일정한 시간에 두목 침팬지가 암컷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권력확인 작업을 벌이곤 한다.


사람도 가끔 그런 짓을 한다. 골디카스 박사의 예에서 그 현지고용인들은 사실 박사의 권력에 도전할 생각이 없지만 자신이 모시는 상관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친구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항명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때 박사가 고용인을 즉각 징벌하지 않으면 그 사실이 마을에 알려져서 만인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때부터는 마을주민 누구의 협력도 받을 수 없다.


인류학을 전공한 바 있는 골디카스 박사는 이러한 원리를 잘 알고 있어서 적절히 대처했기에 지금도 많은 인도네시아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정글의 군주가 되어 여왕처럼 살고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이다.



조직폭력배의 매 벌어 가오잡기

이와 유사한 모습을 우리나라 조직폭력배들의 행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골디카스 박사의 고용인들의 경우 조직폭력배의 ‘가오’를 확인하려는 친구들의 부추김이 있었던 것이다. 조직폭력배의 세계에서 ‘가오’는 권력과 동의어이다. ‘가오’를 세운다면 권력을 세운다는 뜻이며 가오를 잡는다면 곧 권력을 잡는다는 의미가 된다.


조직폭력배의 세계에서 하극상을 당하면 즉시 퇴출된다. 70년대 중반 명동의 신상사가 사보이호텔에서 조양은에게 기습을 당한 후 그 세계에서 축출되었듯이 말이다.


조직폭력배들의 행태를 관찰하면 많은 연극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부하들은 정기적으로 사전에 약속한 듯이 무의미한 하극상을 시도한다. 두목은 그때마다 즉각 징벌하는 방법으로 위엄을 과시한다.


조직폭력배들은 강한 폭력을 수반하는 그러한 연극행위에 만족하고 있다. 부하들은 의도적으로 일을 벌여 구타를 자초하고 두목은 정기적으로 구실을 잡아 폭력을 가한다.


부하들은 두들겨 맞으면서 이렇게 ‘권력 있는’ 형님을 두었으니 이 얼마나 폼나는 일인가 하며 감격해한다. 골디카스 박사의 고용인들이 가끔 한번씩 항명을 저질러 박사의 권력이 얼마나 위엄 있는 것인지 친구들에게 과시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권력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조직폭력배들은 그 추상을 구상화하고 싶어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권력의 현장을 노출시키고 이를 체험하는 방법으로 영국인들이 여왕을 소유(?)하듯이 권력을 소유(?) 혹은 공유하려고 한다.


그들은 추상적인 권력이 집단 안에서 혹시나 증발해 버리지 않았는지 불안해하며 폭력을 자초하여 매를 버는 방식으로 정기적인 권력점검을 벌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원숭이 무리의 마운팅이 필요했던 것이다.



야노마미족의 정기 모의전쟁

아마존 정글의 야노마미족은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이웃 부족과 어설픈 형태의 전쟁을 벌인다. 전쟁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모의전쟁으로 볼 수 있다.


먼저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성대한 잔치가 벌어진다. 잔치가 끝날 때 쯤이면 꼭 불평꾼 한사람이 나타나서 소동을 벌인다. 지난해 자기네 부족이 초청했던 잔치에 비하면 대접이 너무 형편없다며 공연한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이는 싸움을 돋구기 위한 뻔한 절차가 된다. 전사들이 일제히 화를 내며 가슴때리기로 결판내기를 청한다. 부족의 용사가 한 명씩 선발되어 순서를 바꾸어가며 상대방 부족 전사의 명치를 주먹으로 힘껏 쥐어박는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 사망자가 발생한다.

  

점차 전쟁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족장이 신호를 보내면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가지고 온 나무몽둥이로 상대방 부족 전사의 대갈통을 난타한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윽고 일정한 숫자의 사망자가 나오면 족장이 휴전을 선언한다.


야노마미족에는 40살 이상이 된 남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한다. 전부 대갈통을 얻어맞아 죽어버린 것이다. 이방인이 마을을 방문하면 전사들은 자랑스레 자신의 머리통을 보여준다. 정수리 부근에는 수십 개의 상처가 나 있고 그 상처자국에는 머리털이 벗겨져 있다.

  

정수리의 상처는 전쟁영웅의 훈장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부족을 방문한 백인 인류학자는 단지 머리통이 벗겨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겁쟁이 취급을 당하게 된다. 물론 인류학자가 처음 정글을 방문했던 몇십 년 전에나 있었던 일일 것이다. 



콰큐틀 인디언의 경우

북아메리카의 콰큐틀 인디언들에게도 기이한 풍습이 있다. 마을의 유력자들이 포틀라치(potlatch)라 불리는 축제에서 자기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싸그리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자기 집에 불을 질러 홀랑 태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 더 많은 재산을 불태워버린 사람이 마을의 지도자로 대접을 받는다. 뉴기니아 마링족의 돼지도살 축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는 아직도 일생동안 벌어들인 자산을 결혼식에 몽땅 쏟아붓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야노마미족이 부족의 축제를 전쟁으로 연결시켜 가산을 파괴하는 일이나, 콰큐틀인디언이 자기 집을 불태워버리는 일이나 동남아에서 결혼식에 가산을 탕진하는 일이나 그 본질은 같다.


잔치와 전쟁은 공통적으로 집단의 과소비에 해당한다. 개인의 소비라면 그 상품 자체에서 만족을 얻지만 집단의 소비일 경우 이웃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고 동료로부터 인정을 받는 무형의 보상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무제한의 과소비로 치닫는 것이다.


콰큐틀 인디언 식으로 전 재산을 불태워 없애버리거나 혹은 동남아 식으로 잔치에 가산을 낭비해 버림으로써 재산을 잃은 대신 부족민의 존경과 찬사만을 오롯이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부족민의 존경과 찬사가 모여서 ‘가오’를 세우는 방법으로 봉건적 피라미드형 권력의 시스템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며 모의전쟁을 벌이거나 혹은 축제의 장을 빌어 일종의 연극을 공연하는 방법으로 그러한 권력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노예근성과 권력의 법칙

권력은 하나의 정밀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 권력은 권력자 1인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의 시스템 안에서 기능하는 다수의 협력에 의해 공유되는 측면이 있다.  


공공재가 사유되거나 혹은 공유되듯이 권력 역시 사유되면서 동시에 공유된다. 그 사유와 공유의 경계가 애매할 때가 있다. 예컨대 왕궁이라면 국가의 공유재산이면서 동시에 왕의 사유재산일 수 있다. 시청은 시의 공공재산이지만 실제로는 시장 한사람에 의해서 사유되는 측면이 있다.


반대로 권력은 권력자 일인에 의해 독점되기도 하지만 그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신하 혹은 노예들에게도 일정부분 공유되는 측면이 있다. 이때 신하와 노예들은 자신이 섬기는 주군의 권력이 강할수록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이 일부 공유하고 있는 권력의 시스템을 더욱 강력하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주군의 매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극우세력의 행태도 이와 같은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위엄과 권위를 갖춘 제왕이 정기적으로 신하나 혹은 반역자들에게 강한 물리력을 행사해야지만 만족해하고 존경심을 나타낸다.


그러한 폭력적 과정에서 자신이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권력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대망상과 허위의식에 기초한 그러한 가상의 소유가 그 어떤 자산의 소유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믿기도 한다. 곧 노예근성이다.


위엄으로 통치하라는 마키아벨리즘은 일정부분 이러한 인류학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엄은 야노마미식 모의전쟁이나 포틀라치 축제와 같이 연극적인 집단의 과소비행위를 통해 과시될 수 있다.


이 나라의 수구세력들이 북한을 상대로 야노마미족의 모의전쟁과 같은 가상적 만들기 제안을 내놓는 이유도 이러한 인류학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거기에는 명백히 ‘짜고 치는’ 연극의 요소가 있다.


과거 남북한의 권력자들이 ‘짜고 치는 듯한’ 적대적 의존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도 야노마미의 모의전쟁과 그 본질이 같다. 그러한 야만적인 권력의 내밀한 작동원리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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