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684 vote 0 2015.12.02 (22:34:51)

    

    아홉살이었다. 감기기운을 핑계로 조퇴를 허락받아 교실문을 나섰다. 반은 꾀병이었다. 다들 사각상자에 갇혀 있는데 나 혼자 자유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날따라 넓어보이는 운동장을 달음박질로 가로지른다. 그렇게 교문을 나선다. 사위는 적막하고 볕은 따갑게 살을 찌른다. 나는 그만 화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태산같은 허무가 엄습해온다. 어디로 가지? 거리는 너무나 조용하고 들판은 침묵으로 나를 외면하였다. 하늘도 돌아앉았고 태양도 비웃고 있었다. 어디로 가지? 나는 그 때 신과 처음 만났다. [생각의 정석 9회]


    내 안의 모든 기쁨과 슬픔들이 세상을 대하는 나의 입장과 태도라는 것을, 사회 안에서의 어떤 포지션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아버렸다. 세상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대치하는 데 긴장이 있다. 삶은 그 긴장을 연주한다. 어린이는 받을 때 기쁘고, 어른은 베풀 때 기쁘다. 그 긴장된 전선을 툭 건드려보았기 때문이다. 문득 그 가로막고 있던 강이 사라져 버리면 당황하게 된다. 전선을 잃어버린 병사와 같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세상과 내가 일대일로 만나버렸다.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인생을 건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가두어 놓으면 나가려고 한다. 정작 나가면 갈 데가 없다. 인생의 기쁨들은 세상과의 게임이다. 게임에 이겨서 기쁘고 져서 슬픈 것이다. 게임 바깥으로 나가면 허무 뿐이다. 나의 게임을 설계하는 것만이 진실하다. 남의 게임 안에서 진정한 승리는 없다. 패배도 없다. 기쁨도 없다. 슬픔도 없다. 나의 게임으로 갈아타기 앞둔 예행연습에 불과하다.


[레벨:30]솔숲길

2015.12.07 (16:21:50)

[생각의 정석 9회] 왜 병맛인가?

http://gujoron.com/xe/383023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sort
공지 닭도리탕 닭볶음탕 논란 종결 2 김동렬 2024-05-27 15016
3391 신은 의사결정이다 5 김동렬 2014-06-22 7608
3390 인간은 두 번 승부한다 image 4 김동렬 2014-11-27 7607
3389 수렴모형이냐 확산모형이냐? image 2 김동렬 2015-04-25 7606
3388 결혼은 연애의 무덤인가? image 김동렬 2015-02-28 7595
3387 객관이 틀렸다 7 김동렬 2014-06-16 7579
3386 의식은 놔두고 존재를 바꾸라. image 김동렬* 2012-10-21 7578
3385 나를 건설하는 절차 image 3 김동렬 2014-11-25 7564
3384 높은 음과 낮은 음 image 3 김동렬 2014-11-16 7560
3383 구조론적 세계관이란? [추가] image 김동렬 2016-09-16 7552
3382 장자의 불완전한 1인칭 관점 1 김동렬 2014-07-30 7541
3381 깨달음의 요지 8 김동렬 2014-06-18 7514
3380 유시민과 역이기의 삽질 1 김동렬 2018-07-19 7513
3379 신의 입장 김동렬 2018-07-18 7510
3378 구조론적 사유 훈련하기 image 50 김동렬 2015-01-16 7509
3377 인간의 본질은 이기심이 아니다 image 1 김동렬 2016-09-14 7508
3376 철학과 비철학 1 김동렬 2014-03-11 7502
3375 제프 베조스의 경우 3 김동렬 2018-07-25 7499
3374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 image 1 김동렬 2015-07-10 7494
3373 구조의 통제방법 4 김동렬 2014-04-12 7493
3372 좌표와 순서도 image 김동렬 2015-12-10 7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