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일에서 불균일을 거쳐 균일로 간다 엔트로피의 ‘무질서도’라는 개념을 근래에는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에너지가 바닥상태인 양이 더 질서정연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사건 안에서 균일에서 불균일로 갔다가 다시 균일해진다. 처음 균일에서 에너지가 들어가면 그 에너지를 처리하느라 존재가 대응하기 때문이다. 처리하면 균일화 되지만 반작용에 의해 다시 불균일화 된다. ◎ 균일≫에너지 유입 불균일≫에너지 처리 균일≫반작용 다시 불균일의 5회 반복≫균일 처음과 끝은 균일하다. 중간은 에너지를 처리한다. 에너지 처리에 의해 정보화 된다. 애초에는 양자화 되어 있다. 양자화는 묶음 단위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에너지의 양자적 속성에서 물질의 대칭적 속성, 공간의 방향성, 시간의 순서성, 정보의 보존성으로 간다. 정보화될수록 단 번에 통제하기 어려우므로 무질서도 증가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나 때로는 무질서한 군중을 통제하기가 더 쉽다.
◎ (묶음단위) 양자화 ← 의사결정 → 정보화 (개별단위) 질서있게 정렬해 있으면 통제가 쉽고 한명씩 흩어져 있으면 통제하기 어렵지만 그 반대일 수 있다. 질서있는 군대를 이길 수 없고 흩어져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엔트로피를 이해하는 핵심은 아직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거다. 달리고 있는 말을 통제하려면 나의 힘이 아니라 말 자신의 힘을 써야 한다. 달리고 있는 말의 힘을 달리는 방향으로 빼먹을 수 있지만 그 역은 안 된다. 물레방아라도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만 힘을 쓸 수 있다. 가만이 있는 것도 사실은 동動의 상태이므로 그 동動의 진행방향으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양질전화의 착각은 정지해 있는 것을 쓴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금덩어리는 정지해 있는 것을 쓰지만 착각이고 실제로는 살아서 움직이는 시장을 쓰는 것이다. 화폐는 정지해 있는 종이를 쓰지만 실제로는 살아서 움직이는 신용을 쓰는 것이다. 멈추면 죽는다. 죽어서 못 쓴다. 양질전화가 안 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다. ◎ 엔트로피의 법칙 – 존재는 살아있고, 살아서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방향으로만 쓸 수 있다. 가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부의 에너지는 활동하고 있다. 양자화는 살아있는 것이고 정보화는 죽은 것이다. 죽으면 위치가 시점이 특정된다. 주소가 생긴다. 그러므로 정보를 얻어 정보화다. 에너지는 살아있고 사건을 마치고 죽으면 쓸 수 없다. ◎ 죽은 에너지는 사용할 수 없다. 광장에 몰려나온 청춘들은 에너지가 있다. 이들은 주소가 없다.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짱박혀서 공간과 시간의 위치를 특정하면 다시 불러내기 어렵다. 각자 흩어져 짱박혀서 주소를 얻은 것이 정보화 된 것이다. 사건은 위치에너지의 절대적 불균일을 운동에너지에 의한 상대적 불균일로 바꾼다. 최초 빅뱅에 의해 절대적인 우주의 불균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존재의 동력원이다. 에너지에 의해 물질이 생성되고, 그 물질이 운동하고, 다시 운동이 열로 바뀌는 과정은 불균일을 균일화 시키는 과정이다. 존재는 사건 안에서 5회에 걸쳐 불균일을 생성한다. 대칭은 불균일의 결과다. 국민이 고르게 살다가 경제성장에 의해 불균일해져서 부자당과 빈자당으로 대칭된다. 여당과 야당으로 정립된다. 선거 때는 균일하지만 선거결과에 의해 다시 불균일해진다. 다른 형식으로 5회 반복된다. 자연의 모든 움직이는 것은 불균일의 결과다. 처음 균일했는데 햇볕이 바다의 공기를 달구면 바다에서 육지로 해풍이 분다. 햇볕이 불균일을 만들었다. 저기압과 고기압의 대칭에 의해 균일화 되나 기압골이 움직여서 다시 불균일화되니 이를 처리하느라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수록 도리어 상처가 덧난다. 이런 짓을 5회 반복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된다. 코스모스가 균일이라면 카오스는 불균일이다. 처음 원시 부족민 사회는 모두가 균일했다. 코스모스다. 누군가 칼을 발명하는 바람에 불균일해졌으니 카오스다. 이를 시정하려고 지도자를 뽑으니 균일해졌다.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왕이 이웃나라와 전쟁을 벌이니 다시 불균일해졌다. 전쟁에 공을 세운 장수에 의해 균일해진다. 장수가 귀족이 된다. 이번에는 귀족끼리 다툰다. 왕의 불균일이 귀족의 불균일, 곧 재벌의 불균일로 바뀌고, 다시 중산층의 불균일로 낮아졌다가 마지막 하층민의 불균일로 바뀐다. 인종주의, 성차별, 소수자 차별, 외국인혐오, 일베충 행동으로 가는 것은 하층민집단 내부의 불균일이다. 이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수는 원래 없다. 다만 19세기 신대륙의 등장, 20세기 자동차의 등장, 21세기 인터넷의 등장과 같이 문명사적 의미를 가지는 새로운 사건을 계속 일으켜서 새로운 질서로 부단히 갈아타기를 반복하는 수 밖에 없다. 멈추면 죽는다. 성장하지 않는 나무는 죽는다. 진보하지 않는 역사는 죽는다. 보수는 죽은 자의 비명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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