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처음 구조는 얽힘이다. 얽힘은 부드럽다. 부드러운 볏짚으로 새끼를 꼴 수 있다. 새끼줄로 멍석을 매거나 돗자리를 짜면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들은 견고하다. 그러나 매듭이 풀리면 다시 본래의 부드러움으로 돌아간다. 구조는 본래 부드러우나 구조가 얽히면 딱딱한 성질로 변하고 풀리면 다시 부드러움으로 돌아간다. ‘외유내강’이라 했다. 구조는 내면에 견고함을 갖춘 부드러움이다. 세상은 구조다. 세상의 근본은 부드러움이다. 구조가 아니면 알갱이다. 알갱이는 단위unit를 이룬다. 숫자 하나, 둘, 셋처럼 낱개로 나뉘어진 것이 단위다. 숫자 1은 똑부러지는 단위다. 남는 우수리가 없다. 그런데 과학은 갈수록 부드러운 것을 보고하고 있다. 우선 물질의 외곽을 맡고 있는 전자라는 놈이 상당히 부드럽다. 미꾸라지처럼 미끌거리면서 손에 잘 쥐어지지 않아서 과학자를 당황시킨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노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다. 탈레스는 세상이 부드러운 물로 되어있다고 했다. 세상은 변한다. 부드러워야 변할 수 있다. 딱딱하면 깨진다. 구조로 얽히지 못하니 변하지 못하고 만물을 이루지 못한다. 딱딱한 알갱이 개념은 근대과학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게 셈하기는 편하기 때문이다. 자투리가 없이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니 뭔가 과학스럽다. 과학을 부정하고 주술사를 믿는 봉건인들을 제압할 의도가 있다. 과학의 도구는 수학이다. 수학만 해도 초딩들의 자연수만 딱딱할 뿐 깊이 들어가면 부드러워진다. 나누어서 끝자리가 똑 떨어지는 자연수는 수학이라면 지레 겁을 먹는 초딩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무엇인가? 뉴턴 이래 과학은 단단한 것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뉴턴이 틀렸다. 상대성을 주장하여 뉴턴을 깨뜨린 아인슈타인 역시 광속의 절대성에 집착했다. 견고한 것에 의지하려 한 것이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 신이다. 세상의 근원은 물처럼 부드럽고 불확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다. 일상에서 무수히 경험한다. 그런데 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뉴턴이 신에게 답을 미룬 것이다. 근원에는 부드러움이 있다. 신이 근원이다. 최종보스의 역할은 신에게 맡기고, 그 부드러운 신의 손길로 만들어진 인간들의 세상은 딱딱한 것이어야 한다. 세상이 딱딱해야 신이 주무르기에 편하다. 꼬마가 부드러운 손으로 딱딱한 레고를 조립하듯이, 뉴턴은 물질의 딱딱함 뒤에 신의 부드러움을 둔 것이다. 그렇다. 뉴턴은 물질을 존재의 최종근거로 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인 사유의 한계를 탐색하지 않았다. 밀어붙이지 않았다. 딱딱한 무대의 뒤를 부드러운 장막으로 가려두고 그 앞쪽만 관측하기로 암묵적인 규칙을 정했다. 가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왜? 계몽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봉긴시대의 주술사는 애매함의 두려움으로 대중의 마음을 지배한다. 과학가는 우수리없이 똑 떨어지는 과학의 견고함으로 대중의 두려움을 해체하고 과학의 길로 인도하려 한다. 의도가 들어가면 실패다. 과학 위에 철학 있다. 딱딱함 위에 부드러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은 부드러움이다. 계몽하려는 의도를 극복하고, 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보라.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고 변화한다. 부드러운 것은 스스로 결합하여 만물을 낳을 수 있다. 단단한 것은? 부드러운 접착제가 추가로 필요하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남의 손을 빌린다면 최종근거가 될 수 없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이래 일단의 과학가들은 최종근거에 대한 탐색을 회피했다. 과연 그대는 최종근거를 질문할 용기가 있는가? 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극복하여야 한다. 대중을 계몽할 마음을 극복해야 한다.
과학은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있습니다. 암묵적인 규칙입니다. 첫째 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음, 마지막 페이지를 아껴두고 싶은 마음, 다 까발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 불확실성 뒤에 숨으려 하는 비겁한 대중을 계몽하려는 마음, 과학을 쉽기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 현장에서 실용성을 입증하고 싶은 성급한 마음이 있습니다. 용기있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자의 말을 일부 인용하지만
구조론은 원래 노자와 친하지 않습니다.
애매함 뒤에 숨으려 하는
대중의 비겁한 마음에 편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대중을 계몽하려는
과학계의 오만한 마음도 문제지만요.
본문에 일부 추가했습니다.
"구름, 변하다.
그 흐름은 물과 같고, 형태는 안개와 같으며, 기세는 바람과 같다.
구름, 계속 변하다.
그 기상은 봉우리 같고, 그 빠름은 뇌전과 같으며, 그 도도함은 바다와 같다.
구름, 변하지 않는다.
내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
김동렬 선생께서 이 글을 마지막으로 요약하신 파란색 문장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6번씩이나 나오네요.
그러한 대중을 계몽하려는
과학계의 오만한 마음도 문제지만요.
'오만이 계몽을 낳는다.'
오만과 계몽은 저에게 참 어려운 단어입니다.
어떤 발언을 할때 이게 오만인지, 아닌지
계몽인지, 아닌지? 잘 구별이 안될때가 많거든요.
계몽의 어미가 오만이므로 오만에 대해 알면 계몽도 자연히 알게되겠죠
그럼 오만이란 무엇인가?
1. 나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
2. 한방에 해결보려는 성급한 마음
제 관점에서는 대충 요렇게 유추가 되는데요.
좀 더 추가적인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처음 구조론이 저에겐 근대과학처럼 딱딱하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좀씩 좀씩 부드럽게 읽히네요 ㅎㅎ
노자 선생님의 "유무상생"이 떠오르는 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