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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단위들의 집합이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숫자 1, 2, 3...처럼 혹은 물체 한 개, 두 개, 세 개...처럼 인간이 손가락으로 지목하여 가리킬 수 있는 낱개로 된 것이 단위다. 그 가리켜 지시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을 반영하는 언어다. 인간에게 언어가 있으므로 자연에도 단위가 있는 것이다. 자연의 존재와 인간의 인식은 서로 대칭되어 있다. 언어는 단어로 되어 있다. 아니 문장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뭔가 이상하다. 단어가 단위인가 아니면 문장이 단위인가? 명사는 하나, 둘로 단위를 두어 구분이 가능하나 동사는 헷갈린다. ‘사랑’은 하나 둘로 구분하여 셀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셀 수도 있다. ‘나 오늘 열 번 사랑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색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명사 ‘사랑’은 셀 수 있을듯 한데 동사 ‘사랑하다’는 셀 수 없다. 문법적 의미에서 동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형용사도 셀 수가 없다. 언어가 그렇다면 사물도 그러하다. 인식과 존재는 대칭된다. 자연의 많은 것이 셀 수 없는 것이다. 기생생물처럼 애매한 것이 있다. 있기는 있는데 에너지를 외부에 의존한다. 그림자처럼 존재감 없는 반존재들이 있다. 그림자는 분명 있지만 곧잘 다른 그림자에 묻혀 버린다. 빌딩 그림자 속에서 내 그림자를 찾아 별도로 분리해낼 수 없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모두 연결된다. 어디까지가 임진강이고 어디부터가 한강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대나무는 뿌리가 연결되어 대숲 전체가 일제히 꽃을 피우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거기서 한 그루를 분리할 수 없다. 아니 분리하려면 분리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분리해서 따로 심어놓아도 같은 날자에 꽃을 피우고 일제히 죽는다고 한다. 분리되는데 분리되지 않는다. 애매하다. 세상이 구분단위로 되어 있다는 믿음은 착각에 불과하다. 단위는 입자에 해당되는 것이며, 구조론으로는 질이 입자에 앞선다. 질은 구조의 중첩이다. 에너지는 상부구조로부터 전달받는다. 단위는 다른 단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잘라낼 수 없다. 손가락 마디를 잘라낼 수 없다. 팔에서 손을 뗄 수 없다. 어깨에서 팔을 잘래낼 수 없고, 몸통에서 어깨를 잘라낼 수도 없다. 잘라낼 수는 있는데 사용할 수 없다. 의미가 죽는다.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핵과 전자로 조직된 원자모형처럼 똑부러지는 입자는 없다. 과학의 발달에 의해 원자모형도 점점 애매해지고 있다. 에너지를 공급받는 연결부분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다. 이에 과학은 새로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희망일 수 있다. 자궁 속의 태아처럼 자연의 입자들은 모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태아는 독립적으로 에너지를 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은 에너지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의사결정이 사건의 단위를 이룬다. 의사결정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에너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달된다. 당신이 스스로 백화점에서 옷을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의류 디자이너들이 당신에게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명대사 한 토막처럼 말이다.
우리는 존재를 원자처럼 독립된 알갱이들의 집합으로 여기지만 실로 그렇지 않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똑부러지는 단위는 없으며 단지 사건이 반복되면 그것을 단위로 삼을 뿐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은 똑부러지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동양은 입춘부터 봄이라 하고 서양은 춘분부터 봄이라 하는데 그게 딱 정해져 있지는 않다. 확실한 것은 계절은 반복되며, 반복되므로 단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언어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런데 문장도 반복된다. 작은 반복과 큰 반복이 있다. 동물어냐 유아어냐 대화어냐 지식어냐 깨달음이냐의 구분은 작은 반복이냐 큰 반복이냐다. 단어 하나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많은 생략과 함축이 있다. 단어는 불완전한 반복이다. 언어는 사건을 반영한다. 언어는 사건의 전모를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아기들은 사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아기는 사건의 절반만 책임져도 된다. 나머지는 엄마가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지발가락이 아프다.’고 구체적으로 아픈 부위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아프다.’고만 말하면 엄마가 ‘여기야?’ 하고 일일이 짚어가며 위치를 묻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대화어로도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그 수준으로는 작가가 될 수 없다. 그 수준으로는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기 때 언어를 배웠다. 불완전하게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서당의 훈장님이 바담풍 해도 바람풍으로 알아들으려면 깨달아야 한다. 언어의 감추어지고 함축된 부분을 알아야 한다. 연애에 성공하려면 말이다. 불완전하게 말하므로 말귀를 알아먹지 못한다. 오해가 누적되어 헤어지게 된다. 언어는 단어에서 문장으로 발전한다. 동사가 명사로 발전하고, 술어가 주어로 발전하고, 진술이 전제로 발전하고, 명제가 담론으로 발전한다. 물론 그럴수록 문장이 길어지므로 함축적으로 말해야 시인이 된다. 담론을 함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짧은 시도 있지만 담론까지 가지 못하면 곤란하다. 내용을 비워서 짧은 것은 시가 아니다. 대꾸하는 말은 시가 아니며 비판하는 말도 시가 아니다. 에너지를 태워야 시다. 에너지를 태우려면 두 사건을 연결시켜야 한다. 작은 사건이 커져야 한다. 언어 안에 두 사람과 그 둘을 연결하는 시소와 그 시소의 축과 그 축을 움직이는 지구가 있어야 한다.
둘 중에 하나만 보면 동물어, 둘을 보면 유아어, 둘 사이의 시소를 보면 대화어, 그 시소의 축을 보면 지식어, 그 축을 움직이는 지구의 중력을 보면 깨달음이다. 대화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다. 시소와 같다. 받아치는 것이다. 시소를 알지만 그 시소의 축은 모른다. 축을 모르므로 시소에 둘을 태우지 못한다. 지식어는 시소의 축을 알지만 고정된 축이다. 축이 고정되면 두 사람의 체중이 같을 때 교착된다. 시소는 움직이지 않는다. 지식인의 언어가 허무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식인은 바른 말을 하지만 도움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는 말하지만 첫 게임을 져주고 본 게임을 이기는 전략은 말하지 않는다. 판단기준이 되는 축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사건 안에는 절대로 답이 없다. 당신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인생에 답은 없다. 답은 두 사건에 있다. 당신은 죽지만 당신의 자식은 이어간다. 개인은 죽지만 사회는 진보한다. 사회는 시끄럽지만 인류는 전진한다. 두 사건의 연결에서 진정한 답이 있다. 첫 게임을 져주고 다음 게임을 잡는 것은 전략이다. 전략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넘어선다. 옳지만 양보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옳지 않지만 가야할 때가 있는 것이다. 고저가 있고 장단이 있고 완급이 있고 경중이 있다. 헤아려야 한다. 1승 1패를 할 것이면 첫 게임을 져주고 두 번째 게임을 잡아야 한다. 그 반대여야 할 경우도 있다. 동물어는 따를 뿐 명령하지 못한다. 이기지 못한다. 유아어는 이기나 자력의 승리는 아니다.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화어는 이기나 다음에 진다. 일진일퇴의 공방이 끝나지 않는다. 지식어는 항상 이기지만 싸우지 못한다. 상대방이 싸우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하지만 공허하다. 지식은 언제나 승리하지만 정신승리가 되기 십상팔구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다. 깨달음은 항상 이긴다. 작은 것을 져주고 큰 것을 이기므로 상대가 작은 승리에 낚여서 계속 도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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